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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세 개의 나라를 건국한 남자
https://youtu.be/WmnWOTlPIUQ?si=317uLl385SjrZ8L3 World War Z - Main Theme ExtendedMusic by: MuseTrack: Isolated System (Instrumental)Album: The 2nd LawFrom the Film: World War ZMuse - The 2nd Law: Isolated System (Instrumetal) ExtendedEpic...youtu.be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의사가 되었다가, 변호사도 되었다가, 언론인이 되었다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머나먼 타국의 소장이 되었다가,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미국 남부의 얼굴 중 하나가 되었다가, 대영제국과 두 개의 미국 행정부의 걱정거리가 되었다가, 머나먼 타국 땅에서 겨우 36세의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에 비해서 그는 오늘날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절대다수가 그를 사악한 침략자이자 학살자, 제국주의자라고 평가한다. 작은 군대를 이끌고 3개의 나라를 세운 그의 이름 윌리엄 워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1. 악명 윌리엄 워커는 1824년 미국 남부 테네시 주의 내슈빌에서 태어났다. 나름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던 그는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며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의사 생활도 잠시, 그는 금새 법학으로 눈을 돌려 뉴올리언스 주에서 법학을 독학해 변호사가 되었고, 변호사마저 금새 질렸는지 얼마 안가 언론사의 공동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마침내 1849년 그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거기서도 편집국장 일을 했고, 이때 3차례의 결투에 엮이면서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를 확장해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퍼뜨려야 한다는 사명을 하나님에게 받았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은 이 개념을 주장하며 멕시코와 전쟁을 벌였고 서부를 개척해 나갔다.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던 명백한 운명의 신봉자들은 종종 미국 정부를 기다리기보다는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필리버스터라고 불린 이들은 정부의 승인 없이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 자체적으로 군대를 꾸린 다음 외국의 분쟁에 개입하거나 아예 타국을 침공하며 친미 괴뢰국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외교적 문제를 염려한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필리버스터를 금지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들은 여전히 민중들에게 위대한 모험가이자 애국자로 칭송 받았고, 이들의 행동을 눈 감아주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윌리엄 워커는 이런 필리버스터의 대표 주자 격이 되었다. 1850년대 초, 그는 멕시코 북부의 소노라 지역을 방문한 다음 이 지역을 미국에 합병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미국-멕시코 전쟁이 종결한지 겨우 5년 밖에 되지 않았고, 일부 미국인들은 더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었는데 정부가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미국은 이 전쟁 전후에 멕시코 영토의 55%를 획득했다). 워커는 처음 멕시코 정부에게 미국을 원주민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멕시코 북부에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허가해달라고 했다. 멕시코는 당연히 이 요구를 거절했고, 워커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1853년 10월 15일, 그는 4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를 공격해 지역의 주도를 점령했고, ‘남부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워커 본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명목상 정부 조직과 장관들도 만들어졌으며, 노예제를 합법화하는 법령이 도입되었다. 워커는 머지않아 남부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소노라 공화국으로 개정하는 2차 건국을 선포했고, 멕시코 내륙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의 조그마한 군대는 결국 물자 부족과 끔찍하게 건조한 환경을 이기지 못했다. 원주민 및 멕시코인들과 교전을 벌이며 나아가던 워커군은 열악한 환경과 언제 올지 모르는 멕시코군을 피해 미국으로 후퇴했다. 퇴각 중에도 현지인들에게 시달리던 이들은 1854년 5월 8일 샌디에고의 미군에게 항복했다. 워커 일당의 첫 모험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민중은 워커의 모험에 열광했고, 그의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워커에게 8분 만에 무죄를 줬다. 이렇게 유명해진 워커는 곧 다른 나라에서 주목받게 된다. 인구가 27만 명에 불과하고 산과 밀림으로 뒤덮인 중앙아메리카의 소국 니카라과였다. 19세기 초 니카라과는 미국과 흥미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대륙횡단철도나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 미국은 동부에서 서부로 대량의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중간 경유지로 삼았다. 이 물자 공급로는 미국의 대부호이자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소유였다. 원래 그는 니카라과 정부와 운하를 만들기로 계약했으나, 실제로는 산 후안 강을 따라서 움직이는 단순한 마차-증기선 교통로를 만드는데 그쳤다. 이 밴더빌트 교통로는 니카라과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 시설이었다. 당시 니카라과는 정치적으로 북서부의 레온을 거점으로 하는 자유당과 남서부의 그라나다를 거점 삼은 보수당으로 나뉘어서 내전 상태에 놓여있었다. 보수당은 백인우월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자유당은 그에 비해 이주민-원주민 혼혈 계층인 메스티소와 물라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보수당은 대지주들의 지분이 높았던 반면 자유당은 소지주와 전문직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보수당은 독립 이전 식민 시대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자유당은 토지 민영화와 지방 분권화, 세속화와 자유무역 같은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두 정당은 본질적으로 똑같이 광산에서 금은보화를 채굴하고 대농장에서 환금작물을 재배해 해외로 수출하는 유산 엘리트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다수 민중을 탄압하는데 있어서도 의견을 같이했다. 양측은 주로 원주민 공동체와 도시 빈민들로 구성된 반체제 반란군을 상대할 때만큼은 휴전을 맺고 공동으로 진압에 나섰다. 물론 그 후 다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때 내전에서 불리하던 자유당은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필리버스터들을 초대하기로 결심했다. 자유당의 러브콜을 받은 워커는 1855년 6월 15일 자신을 추종하는 60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니카라과에 상륙했다. 이들은 고정적인 보수와 니카라과의 광대한 영토의 일부분, 그리고 시민권을 대가로 약속받은 용병 겸 개척자들이었다. 워커군은 곧 100명의 미국인과 170명의 자유당 소속 현지인들로 보강되어 총 330명으로 늘어났다. 윌리엄 워커가 이끄는 미국인들은 우월한 조직력과 사격술, 그리고 용기 덕분에 전황을 완전히 뒤집었다. 파죽지세로 진격한 필리버스터들은 밴더빌트 교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보수당의 거점 그라나다를 신속한 기동 전술로 점령하며 내전을 사실상 종결시켰다. 결국 평화 조약이 맺어져 자유당-보수당 연립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후 워커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니카라과인들을 상대로 폭정을 저질렀다. 그의 군대는 선량한 니카라과 국민들의 토지를 약탈하고 몰수하며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워커가 세운 대통령이 반발하자, 그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대통령을 강제로 끌어내린 다음 스스로 니카라과의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워커의 필리버스터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노예제를 다시 도입시켰고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하며 현지인들을 정치적, 문화적으로 박해했다. 수많은 식민주의자들이 미국에서 건너와 워커 정권에 합류하며 니카라과를 식민지 삼으려고 했다. 워커는 심지어 밴더빌트 회사의 자산을 강제로 압류하면서 같은 미국인, 그것도 당대의 대부호에게도 총구를 겨누는 미친 짓을 벌였다. 워커는 중앙아메리카 소국들을 전부 통일해서 하나의 백인 노예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자기가 그들을 정복하겠노라 도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유당과 보수당,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모든 국가들은 힘을 합쳐 위기의 니카라과를 구해내기로 했다. 코스타리카가 제일 먼저 총대를 메고 선전포고를 했다. 워커의 군대는 먼저 공세를 가했지만 코스타리카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코스타리카는 기세를 타고 니카라과 남부를 공격해 상당한 승리를 거뒀으나, 곧 콜레라가 유행해 후퇴해야 했다. 한편 니카라과 북쪽에서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자유당, 보수당의 연합군이 결성되어 마침내 해방 작전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콜레라 유행이 끝난 코스타리카와 분노한 당대 최대 부자였던 밴더빌트의 압도적인 지원까지 받았다. 연합군은 필리버스터 군대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했다. 패배가 가까워지자 워커는 그라나다 시를 통째로 불태우면서 발악했으나 대세를 꺾지 못했고, 그는 소수의 잔당과 함께 미 해군에게 항복하면서 니카라과에서 쫓겨났다. 오늘날의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그들이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이 침략자를 무찔렀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윌리엄 워커는 중앙아메리카 밖에서 유명하지 않으나, 그는 유튜브와 나무위키, 블로그와 해외 사이트 등지에서도 무모한 원정을 일삼고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극우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 노예제를 옹호한 인종차별주의자, 독재자 겸 침략자, 약탈자 겸 학살자, ‘전대미문의 광기와 폭주의 방탕한 행적을 보인 인간’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워커를 격퇴하고 끝내 살해하는데 성공한 밴더빌트와 중앙아메리카 정치 엘리트들이 원했기에, 이 시대의 진실은 워커와 함께 파묻혔다. 때문에 위에 쓴, 흔히 알려진 워커의 모습은 과장, 왜곡, 심지어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짜 윌리엄 워커는 어떤 인물이었나. 2. 통치 윌리엄 워커에 대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위에서 묘사된 친-노예 극우주의자가 아니라 노예제를 개인적으로 반대한 자유주의자라는 점이다. 노예제가 번성했던 남부에서 태어나고 남부에서 자라난 워커는 평생 한 명의 노예도 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언론사에서 일할 당시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칼럼을 종종 썼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반대급부로 ‘귀족제’를 혐오했으며, 자유주의의 확산이 자신과 미국의 과제라고 믿었다. 물론 워커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백인의 우월함을 믿었으나 이는 당대 평균 수준이었고, 역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던 지나친 혐중, 반가톨릭 정서에 비판적이었다. 워커의 멕시코 원정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상술한 멕시코에서의 노예제 도입은 사실 그가 소노라 공화국의 법률을 작성할 때 그가 오래 거주했고 노예제가 합법이던 루이지애나 주의 법안을 그대로 베끼면서 생긴 해프닝에 가까웠다. 워커는 멕시코 원정 이후에도 자유주의 전파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니카라과를 자유주의의 거점으로 삼아서 중앙아메리카 전역에 자유주의 제국을 세우고자 했다. 멕시코 원정의 실패에서 배운 워커는 니카라과에서 현지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는 그를 초청한 자유당의 더 과격한 분파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자유당 과격파는 ‘카우디요’라고 불리던 동네 힘센 사람들이 주도한 세력으로, 보수당은 물론 자유당 엘리트층도 적대하며 프랑스 혁명 같은 자유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윌리엄 워커를 자신들의 혁명을 실현시킬 주체라고 믿으며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내전을 종식한 워커는 실권을 자신이 잡았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은 니카라과 민중이 그 조치를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강했던 것을 워커가 사양하며 형식적 권력은 현지 인물에게 양보했다. 니카라과인들은 왜 이 낯선 외부인을 신뢰하며 그에게 대통령 직을 주려고 했을까? 당시 니카라과인들은 자신들이 발전이 덜 되어 있다고 여기며 미국을 문명국의 대표 국가로 우러러봤다. 니카라과인들은 미국인들의 이민을 권장했으며, 인종 혼합을 바라기도 했고, 아예 미국에게 합병되고자 희망하는 이들도 많았다. 친미 사대주의가 엘리트와 민중을 가리지 않고 팽배했다. 니카라과인들은 워커가 자신들을 ‘미국화’시켜서 ‘문명화’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들에게 윌리엄 워커는 마치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처럼 ‘외부 세계의 목소리’였던 셈이다. 워커의 필리버스터 정권은 니카라과인들의 ‘미국화’ 기대에 철저히 부응했다. 워커 정부는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27만명이 살던 나라에 무려 1만 2천명에 달하는 외부 이민자들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흔히 생각하는 ‘남부 노예제 지지자’들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미국 남부의 보수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워커의 ‘자유주의 제국’ 구상에 이끌린 북부인들이 더 많았으며, 유럽에서 희망을 잃고 건너온 유럽 자유주의자들도 적잖았다. 심지어 쿠바 등지의 히스패닉 이민자들과 해방 노예 출신 흑인들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니카라과로 건너올 정도였다. 이 새로운 고급 이민자들은 노동력 뿐만 아니라 의사와 군인, 공학자 등의 전문 인력도 제공했고, 니카라과인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전수했으며, 현지 상품도 대거 구매해 내전으로 파탄난 경제 재건에도 일조했다.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신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이는 양국의 발전과 미국화에 대한 기대를 불어넣었다. 워커는 미국 본토에서도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워커가 자신들의 대의에 합류해 범-아메리카 ‘노예 제국'을 세울 수 있다고 봤다.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개신교도들은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 제국'의 확대에 열광했다. 반대로 185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겸 초강경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존 프리몬트를 비롯한 북부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워커가 자유주의를 수출하고 노예제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동맹이라고 여겼다. 그는 노예제 폐지와 흑인들의 추방을 동시에 지지했던 폐지론자들의 지지도 받았다. 보다 숫자가 적었던 그의 반대파의 구성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미국 외교가와 군부는 필리버스터들이 외교에 장애물이 된다며 골칫거리이자 ‘해적’으로 여겼다. 개신교 근본주의 성향 반-가톨릭 단체들은 미국 정부가 ‘로마교’’ 세력을 공개적으로 승인했다며 분개했다. 일부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워커의 원정이 친-노예제 성격이라고 보며 니카라과를 비롯한 다른 중미 국가들이 향후 미국의 노예주로 편입될까 우려했다. 미국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들은 워커의 원정이 역내 전쟁으로 발전해 장기적으로 노예제 경제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이렇듯 워커가 이끌던 필리버스터들은 그 구성원과 본토 지지자들 모두 다양한 세력이었고, 서로 가치관은 달랐으나 니카라과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묶여있었다. 오늘날 단순 친노예 팽창주의 집단으로 인식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워커는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니카라과를 구축하려고 애썼다. 집권 초기의 워커는 그를 열렬히 지지하던 자유당 과격파들의 불만을 감수하고서 보수당을 포용했으며, 이들과 협력해 국정을 운영했다. 워커 정부는 군대의 경우 전적으로 필리버스터들에게 의존했으나, 장관직을 비롯한 여러 요직과 공무원 자리는 대부분 현지인들에게 제공했다. 필리버스터들은 국가 통합을 위해서 니카라과 국적을 공식적으로 취득하며 현지인들과 어우러지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니카라과인들 스스로부터 인종주의를 부분적으로 긍정했기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활동했지만, 현지 가톨릭 신앙은 여전히 매우 존중되었다. 유명한 가톨릭 사제들은 워커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아예 대미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 정부는 더 나아가 국가 재건과 대대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내전으로 지쳐있던 니카라과인들을 위해서 일부 세금을 제거했고, 전쟁의 피해자들과 그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했으며, 농촌 지역의 자치를 보장했다. 내전으로 파괴된 집과 건물, 도로와 철도를 재건하는 사업도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워커는 ‘미국화’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경제 발전 전략을 세웠다. 니카라과 신정부는 농촌 지역에 더 많은 도로를 건설해 지역간 연결과 바깥 세계와의 무역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또한 당시 니카라과에서 부진하던 커피 산업을 연구해 진흥시키고, 바나나 나무를 이용해 제지 산업을 육성하자는 전략을 세웠으며, 식용 농작물의 생산량도 대거 늘려 식량 자급자족을 가능케 하자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니카라과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명화 교육’도 실시되었는데, 필리버스터 정부는 이들에게 기초적인 위생 지식과 금주 습관 등을 가르치면서 전반적인 교육에 대한 투자도 강화했다. 수도 그라나다와 레온 같은 도시들을 ‘파리와 베니스에 비견될 정도로’ 현대화할 장대한 계획도 만들어졌다. 대대적 토지 조사와 지리 탐사 사업이 이뤄졌으며, 이 귀중한 자료는 이후 20세기 초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필리버스터들의 이런 구상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안정을 추구하던 워커 정부는 함부로 세금 부담을 늘릴 수 없었고, 오히려 특정 세금을 감면했다. 대신 그는 징세 공무원들의 부패 근절과 행정 효율화를 통해 실질 세입을 증대했다. 특정 부유한 상인들에게 더 많은 세금이 부과되었고, 전략적 품목을 제외한 물품들에 20%의 관세가, 귀금속에는 10%의 수출세가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커의 광대한 비전을 실현시키기엔 자본이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필리버스터 정권은 니카라과의 토지를 담보로 삼은 채권을 발행하고, 해외에서 융자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조치들도 부족했고, 워커는 결국 밴더빌트 운수회사를 공격했다. 그는 밴더빌트 회사의 계약 위반과 세금 납부 거부, 현지인 차별 등의 실제 악행들을 이유로 수송로를 압류한 다음 다른 재벌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워커는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를 건드렸고, 그는 머지않아 반격하게 된다. 필리버스터 정부는 원대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짧은 기간 동안 일부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충분한 자본 조달은 끝내 이뤄지지 않아 도시 개발 같은 주요 프로젝트들을 구현하긴 힘들어보였다. 더군다나 워커에 반대하는 온갖 세력들이 음모를 꾸미면서, 이들의 계획은 결국 엎어지고 만다. 짧았던 니카라과의 안정기는 머지않아 혁명과 전쟁의 열기에 휩싸인다. 3. 혁명 2부에서 기술했듯이, 워커와 필리버스터들은 통념과 달리 오히려 니카라과의 엘리트층 및 현지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려고 했다. 현지인들 역시 이들을 환영하면서 ‘미국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엘리트층은 필리버스터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미국 개척자들이 현지인들과 어우러지면서 그들의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설파했기 때문이었다. 유산 계급 엘리트들은 유순한 국민들이 미국화 덕분에 일을 더 잘하길 바랬지,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또다른 위협은 바로 개척자들과 현지 여성들의 통혼이었다.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필리버스터들은 종종 현지 여자들과 눈이 맞았고, 일부는 단순 매춘, 원나잇 관계가 아닌 결혼으로 이어졌다. 특히 일부 엘리트 층의 과부들이 미국인들과 결혼하자, 니카라과의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직접적으로 도전받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워커 위협론은 니카라과 외부에서 훨씬 더 강했다. 니카라과와 다를 바 없던 중앙아메리카의 유산 엘리트들은 워커의 ‘자유주의 제국’ 구상에 경악했다. 이들은 워커가 자신들을 향후 침공하거나, 최소한 필리버스터들의 영향으로 자국 내에서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실제로 이 나라들의 자유주의 야권은 워커에 동조했고, 전쟁 개전 후에도 친-워커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평소에 서로 으르렁대고 전쟁을 벌이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과테말라와 코스타리카의 지도자들은 서로 간의 악감정을 잠시 잊은 채 필리버스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의 불길을 끄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마치 반세기 전 온 유럽의 군주들이 나폴레옹에 맞서서 연합한 것과 같은 상황이 대서양 건너편의 중앙아메리카에서 전개되었다. 1856년 2월 코스타리카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 코스타리카가 침공하기 전 예방 차원에서 선제 공격을 가한 필리버스터들은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었고, 코스타리카군은 그대로 리바스 시까지 진군해 다시 한번 필리버스터들을 전투에서 격파했다. 하지만 니카라과인들은 필리버스터 정권을 지지하면서 코스타리카를 해방군이 아닌 침공군으로 여겼기에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국민들의 반란을 유발하려는 코스타리카의 선동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열악한 위생 때문에 콜레라가 돌면서, 코스타리카는 4월 말 퇴각했다. 콜레라 역병은 코스타리카를 몇 달 간 휩쓸며 인구의 10%를 앗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수당은 코스타리카 침공군을 지지했고, 침공이 실패하자 대거 게릴라군으로 활동하거나 반-워커 연합군에게 귀순했다. 보수당 출신 현직 대통령마저 나라를 탈출해 외세에 합류했다. 자유당 엘리트층 역시 머지않아 똑같은 선택을 저질렀다. 그들은 6월 레온에서 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장악했고, 북쪽에서 내려오던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병력에게 도시를 상납했다. 그러나 반-워커 동맹군은 레온을 점거한 후에도 한동안 더 진격할 엄두를 못 냈다. 이들의 배신에 분노한 필리버스터들과 자유당 과격파들은 민중파적 자유주의 혁명에 돌입했다. 워커는 먼저 공백이 된 대통령직을 채우기 위한 선거를 열었고 스스로 출마했다. 명목상 민주 국가던 니카라과는 실제로는 일부 지주들이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그 선거인단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다시 뽑는 비민주적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워커는 니카라과 사상 처음으로 모든 성인 남성이 투표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약 2만 3천명이 투표한 6월 22~24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전체 표의 70% 가량을 얻으며 정식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물론 이 선거는 완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최초의 자유선거였던만큼 혼란이 컸고, 설상가상으로 필리버스터들의 선거 조작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런 부정선거는 오히려 당시 대부분의 국민에게 지지받던 워커의 인기를 한풀 꺾었다. 그러나 동시에 니카라과인들은 최초의 보통 선거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기존 니카라과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일깨웠다. 7월 12일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워커는 더욱 과격한 개혁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의 미국 이주민 추종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영어 역시 공용어에 추가했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과 니카라과를 배신한 토착 엘리트층, 아니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그들의 권력 기반이던 토지와 자산을 수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워커는 근본적으로 자신에 반대한 토착 엘리트들을 충성스러운 백인 이주민들로 대체하려 했고, 압류한 자산을 그들에게 경매로 내놓아 필리버스터들의 지위를 굳히는 한편 전쟁과 개발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당 과격파와 니카라과 민중의 지지도 계속해서 필요했고, 그들에게 의존하며 필리버스터 혁명의 동지들로 대우했다. 그 결과 대대적인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자유당 과격파 소속 카우디요들은 군중과 필리버스터들을 이끌면서 국가를 배신한 유산 엘리트들의 토지와 자산을 대대적으로 압류했다. 몰수 과정에서 지배층의 저항과 이 기회에 땅을 개인적으로 강탈하려던 사람들 등이 혼란을 일으키며 폭력 사태가 발생했지만, 일부 억울한 지주들은 오히려 탄원을 통해 압류된 재산을 반환받기도 했다. 이렇게 수거된 토지는 한동안 국영 농장으로 사용되었다. 워커는 토지의 절반 정도를 미국인 개척자들과 미국 본토의 투자자들에게 11월 경 경매할 예정이었다. 필리버스터 정부는 이 땅을 기존 가치의 3분의 1 수준에 판매해 경매를 성공시키려고 했고, 일부 투자자들은 실제로 미리 토지를 구매했다. 나머지 절반의 경우,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당대의 정황을 종합해보면, 자유당 과격파와 카우디요들이 그들을 추종한 민중에게 재분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지배층에게서 몰수한 다른 물품들도 지지자들에게 대량으로 배급했다. 수백년간 이 땅을 지배한 대지주들의 권력이 해체된 이 혁명은 120년 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장 급진적인 농지 개혁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의 과정에서 워커는 그가 훗날 악인으로 기억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법을 제정한다. 바로 노예제 재도입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1824~1836년 사이 도입된 모든 법안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으로 보였다(니카라과의 노예제는 1827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정부는 머지않아 노예제가 부활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워커의 이 결정은 미국인 지지자들의 분열을 일으켰다. 미국 남부와 남부에서 온 친노예파 개척자들은 이 조치를 열렬히 환영했다. 반대로 노예제 폐지 운동이 갈수록 격해지던 북부와 자유주의 성향 개척자들, 해방노예와 유럽인들은 충격을 받으며 워커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마저 머지않아 비난을 멈추고 다시 단일대오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노예제가 합법인 나라는 한 곳도 없으나(모리타니에선 2007년이 되서야 완전히 범죄화 되었다!), 노예는 여전히 암암리에 존재한다. 윌리엄 워커의 니카라과는 정반대였다. 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도로를 보수하고, 토지를 압류하고, 노숙자들을 단속하며, 의료시설을 세울 여력이 있던 필리버스터 정권은 노예제를 부활시킨 이후에도 정작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노예제를 실제로 시행하지 않았다. 노예 없는 노예제 국가였던 셈이다. 워커의 이런 선택은 정치적인 것으로 그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노예제 합법화로 남부의 더욱 열렬한 지지를 받는 동시에 실제 실행에는 들어가지 않으면서 북부의 이탈도 최소화시킨 것이다. 이 작전은 실제로 북부인들이 투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워커와 함께하고, 반대로 남부에서 합류하는 지원자 숫자가 늘어나는 등 효과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니카라과인들은 이 조치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워커를 지지하던 그들은 이 상징적 조치에 큰 충격에 빠졌고, 민심은 그에게 조금씩 돌아섰다. 워커를 해외에서 온 압제자라고 비난하던 동맹군의 선동이 설득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4. 몰락 1856년 8월 말, 일부 보수당 병력이 활을 든 원주민 전사들과 결탁해 농촌에서 토지 수거 작전을 훼방했다. 필리버스터들은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9월 12일 산 자신토 전투에서 숫적으로 밀려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었다. 희소식을 접한 레온의 반-워커 동맹군은 마침내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금새 마나과를 점령하며 그라나다를 넘보게 되었다. 워커는 마나과와 그라나다 사이의 마사야라는 마을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800여명의 필리버스터들은 10월 12일 마사야에서 동맹군과 격돌했다. 필리버스터들은 전술적으로 우세한 모습을 보이며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워커는 병사들에게 그라나다로의 퇴각을 명령했다. 700여명의 동맹군 병력이 필리버스터들을 우회해 150명의 수비군만 남아있던 그라나다를 공격한 것이었다. 그라나다 수비대는 필리버스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용맹하게 싸웠고, 도시의 일부분만 장악할 수 있던 동맹군은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패주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과정에서 개척자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고, 일부 그라나다인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분노한 필리버스터들은 점차 자신들의 전쟁을 ‘자유 니카라과를 수호하는 전쟁’이 아니라 ‘비문명화된 야만인들과의 대결’로 여기기 시작했다. 워커의 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적개심이 들끓으면서, 현지인들과의 충돌이 늘어났고 군 기강이 해이해졌다. 11월이 되자 상황은 워커 정권에게 더욱 안 좋아졌다. 필리버스터들은 미국 본토에서 대량의 무기를 수입했고, 추가 병력을 충원 받아 총 병력이 2,000여명 가량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야의 연합군 역시 엘살바도르와 과타멜라에서 추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총 3,500여명으로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남쪽에서는 콜레라 유행이 끝난 코스타리카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미국 서부에서 물자와 병력이 공급되게 해주는 전략적 요충지 산 후안 델 수르와 밴더빌트 통로를 위협했다. 포위될 것을 우려한 워커는 11월 15일 다시 한번 마사야를 공격했다. 사흘 간 전투가 벌어졌고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필리버스터들이 먼저 퇴각했다. 워커는 그라나다에서 후퇴해 리바스로 거점을 옮기고자 했다. 밴더빌트 통로와 산 후안 델 수르에서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고 코스타리카의 위협도 견제할 목적이었다. 이때 그는 또다른 악명 높은 조치를 행하고야 만다. 그라나다를 불태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라나다 방화의 동기에 대해서 워커 본인의 자서전에는 복수심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그가 자유당 엘리트를 다시 회유하기 위해 그랬다는 추측도 유력하다. 실제로 자유당 세력은 내전기 당시 그라나다를 포위 공격하다가 처참히 실패해 워커에게 손을 빌리는 처지가 되어 그라나다 시에 한이 맺혀 있었다. 코스타리카 침공 당시 자유당 지도부는 대놓고 워커에게 그라나다를 방화하자고 건의했고, 이는 코스타리카군이 후퇴하지 않았다면 성사될 뻔 했다. 워커는 그라나다를 불태워서 적을 이간질하고 자유당 엘리트를 다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신빙성이 꽤 있는 주장이다. 만약 그게 노림수였다면, 그건 처참히 실패했다. 필리버스터들을 실존적 위협으로 여긴 자유당 지도부는 이제 와서 다시 편을 갈아탈 이유가 없었다. 기강이 해이해진 필리버스터들은 당초 조직적으로 빠르게 도시만 불태운다는 계획과 다르게 일주일 동안 술에 취한채 약탈을 일삼으며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 사건으로 자유당 과격파를 비롯한 워커의 현지 지지자들의 대다수가 이탈했고, 그의 악명은 훗날 한층 더 높아지게 된다. 필리버스터들의 상황은 리바스로 진영을 옮긴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여전히 900여명의 병력이 남아있었고,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그를 도우려는 자원병들이 추가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리바스의 민간인들은 필리버스터들을 보자 대부분 도망쳤고, 남아있던 이들도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밴더빌트가 복수에 나섰다. 이 당시 필리버스터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산 후안 델 수르로 통하는 보급로와, 미국 대서양 연안에서 산 후안 델 노르테를 거쳐 밴더빌트 교통로를 통해오는 보급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통로의 주인이었던 밴더빌트는 현지에 요원을 파견해 코스타리카군과 합동 작전으로 12월 말 산 후안 델 노르테와 밴더빌트 교통로를 장악했다. 이로서 필리버스터들은 미국 동부에서의 지원이 끊기며 더욱 열악해졌다. 약 5달간 이어진 리바스 포위전은 양쪽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는 보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워커군은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규율이 무너지려고 했다. 정신적으로 몰린 워커는 필리버스터들에게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며 무자비한 폭군으로 변했다. 필리버스터들은 옷도 전부 너덜너덜해졌고 식량이 없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었으며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사기는 바닥을 뚫었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연합군의 상태 역시 좋지 않았다. 필리버스터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격렬히 항전했고, 리바스를 공격해 워커를 군사적으로 끝장내려는 시도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중앙아메리카인들도 보급의 어려움과 대대적인 탈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은 또한 산 후안 델 수르에 정박해있던 미 해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니카라과의 민간인들도 워커에게 등을 돌렸을지언정 여전히 그들을 돕지 않았다. 미국 남부에서는 ‘친노예파’ 워커를 지원하려는 원정대가 몇 차례 조직되었으나 결말은 좋지 못했다. 당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의 최전선이던 캔자스와 미주리 주에서 활약하던 250여명의 남부 깡패들이 처음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소수의 적군과 맞이하자 혼란에 빠지며 와해되었고, 소수만이 리바스에 도착했다. 머지않아 이번에는 150여명의 텍사스인들이 3월 중순 산 후안 델 노르테에 상륙해 도시를 점거하고 밴더빌트 교통로를 통해서 구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이 타던 증기선의 보일러가 폭발하는 사고로 50여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이들이 부상당해 역시 실패했다. 결국 포위전의 행방은 4월 15일 코스타리카군이 산 후안 델 수르를 점거하며 완전히 결정되었다. 외부의 지원이 완전히 차단되자 워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 해군의 중재 끝에 그는 5월 1일 마침내 항복했으나, 동맹군이 아닌 미 해군에게 항복하며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워커의 니카라과 통치는 이렇게 1년 반 만에 종결되었다. 윌리엄 워커는 오늘날 광인이자 악인으로 기억되고, 이와 같은 평가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는 타국을 침공해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분명히 인종주의자였고, 자신이 문명이 덜 된 니카라과를 계몽해야 한다는 믿음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라나다 시를 불태웠으며 말년에 노예제를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지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거의 평생을 노예제에 회의적인 자유주의자로 살아왔다.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유주의적 혁명을 이끌어 현지인들에게도 부귀영화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국민들에서 강한 지지를 누렸으며, 경제 개발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려는 토착 압제자들에 맞서 싸우며 그들의 기득권을 일시적으로 해체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제국 건설을 꿈꾸던 윌리엄 워커는 근대를 풍미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그랬듯이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모험가이자 몽상가였고, 자유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으며, 노예제 폐지론자였다가 유지론자가 되었고, 혁명가이자 폭군이었으며, 해방자이자 침략자였다. 언젠가는 그에 대해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이 주류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 자료: Empire by Invitation: William Walker and Manifest Destiny in Central America - Michel Gobat The War in Nicaragua- 윌리엄 워커 The American Historical Magazine: Vol. 3, No, 3, pp. 207-222 William Walker and the Steamship Corporation in Nicaragua- William Oscar Scroggs William Walker and the Nicaraguan Filibuster War of 1855-1857 - John C. Ellis국제 관련 정성글들https://m.dcinside.com/board/newconservativeparty/725231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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