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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숲속에 버려진 폐가썰 매우장문-1편
**에 위치한 일본폐가임. 내가 눈팅했던 폐가썰중 가장 흥미로와서 귀찮지만 이갤을 재밌게 구경하는 눈팅러니까 나도 보답을 하기위해 번역을 올림 1949년쯤 만들어진 집이고 사람이 안산지는 졸라 오래됐음. 차고랑 부엌은 붕괴됐고 1층바닥도 지지가 안되서 붕괴될라고 함. 대충 이런 형태의 하우스. 탐사시작~ 첫짤부터 공포주의 . . . . . . . . . . . . . . . . 시작부터 개소름돋는 기모노를 입은 인형이 있음. 1층에는 넓은 식당이 있으며, 그 뒤에는 작은 부엌이 식당만으로도 놀라운 발견. 낡은 텔레비전 2대, 잡동사니 물건, 머리가 깨진 팬더. 조금 움직이려고 하면 갑자기 50㎝도 가라앉았음.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유감. 어쩌면 유통 기한이 있는 식품으로 과거의 생활의 힌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부엌에는 세 번째 TV가 있음. 소니 트리니트론의 첫 모델 (KV-1310)의 일종1968년제 모델임. 이 텔레비전은 천장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니고, 사진이 거꾸로임. 계단을 올라감. 2층의 바닥은 붕괴안됐음. 물건이 많이 막혀있는 방이 2개. 1방째의 입구에는 늙은 일본인 여성의 사진. 조금 더 가면 다른 문이 있음. 좀더 나아가자 맥주와 시가를 손에 쥔 남자의 사진. 이 사람도 여기에 살고 있었을까? 이 사람을 외국할배 라고 부르기로 하자. 첫 번째 부분은 사무실처럼 보임. 집 주위는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기 때문에, 큰 창이 3개나 있는데, 방은 매우 어둡고,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이불이 그곳에 쌓임. 누군가가 언제든지 이사 할 수 있도록 준비했던 것처럼 보임. 이 수수께끼의 상자는 포포짱 이라고 하는 이름의 새의 둥지 상자였던 것 같음. 그 새는 1979년에 죽었다고 써있음. 이 둥지 상자는 도쿄의 중심지에 있는 유명 호텔 오쿠라의 포장지에 싸여 있음. 이 집에는 물건, 편지, 기념품 등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방향을 정하는 것이 어려움. 그림엽서, 청구서, 사진 등, 서랍 가득 채워진 추억이 거기에 모두 남겨져 있었음.. 특히 눈길을 끈 것이 이 발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나란히 있는 사진이 있음. 분명 상류층 외국할배가 살았던 집으로 추정됨. 다음 방으로 이동. 화장실이라고 생각되는 문 앞에는 라디오나 축음기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음. 이것은 애드미럴 6S12라는 형태로 1951년의 물건임. 두 번째 방은 다다미 깔개로 전통적인 일본 방이라는 느낌. 여기에도 여러가지가 있음. 이 방에 있는 물건은 다른 방의 물건보다 특히 오래된 것 같음. 4대째의 텔레비전! 이 텔레비전의 정보는 아무래도 발견되지 않았음. 콜롬비아제 디럭스 '블랙 데이라이트' TV. 아무래도 싸지는 않을 것임. 이 일가는 호화로운 생활만을 볼 수 있음. TV 위에는 입구 근처 바닥에 떨어진 일본 인형보다 상당히 보존 상태가 좋은 인형. 바닥에는 무서운 노인의 초상화가 있었음. 도대체 여기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 것일까? 4대의 티비와 집안에서 그시절에 새까지 이름붙혀 키우며.. 영상 영사기도 있음. 틀어보면 좋을텐데.. 방에는 무서운 초상화 할매의 불단도 있음. 사진 근처에는 '포포짱' 사진도 있음. 노부인 할매가 매우 아끼고 사랑해줬을거임. 방의 오른쪽에는 낡은 사진이 대량있음. 왼쪽 사진은 어쩌면 '할매'일 것. 그 뒤에는 황실의 사진. 그 옆은 어린 아이. 그리고 그 뒤에 더 두 장의 사진. 이 사진이있는 것은 흥미로움. 쇼와 천황. 중국 침략과 잔학 행위, 나치 독일과의 동맹, 이어지는 일본에의 2발의 원폭투하와, 쇼와 천황의 역사. 중간에 비치고 있는 아이가 현재의 천황임. 이 사진에 찍혀있는 어린아이나 뒤의 남성 두 사람은 누구인지 짐작이 안됨. 이 둥근 안경의 남자는 누구? 여기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여기는 심상한 분위기가 아님. 하지만 무엇이 이상한가? 호텔 오쿠라의 가방이 많이 있다. 이 가족은 호텔 오쿠라에 꼭 가고 있었음에 틀림없음. 이 램프에 세워진 해피 생일 의 색종이는 무엇인가? 왜 강조되는가? 이 황실의 가문이 붙어있는 나무 상자도 매우 이상함. 황실의 가문이 붙은, 일본어로 쓰여진 서류가 있었음. 그것은 학교에서 제국 규칙이 쓰여진 공식서류임. 학생들은 이것을 암기하고 암창해야 했음. 이 문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금지되었다. 과거의 유물이다! 집안에는 지폐도 있었음. 오래된 동전이나 천엔 지폐,,, 무려 백엔 지폐도 있었다! 아휴 힘들어서 1탄 여기까지.. - 일본숲속의 폐가2편 복도를 좀 더 나아가자 또 그 외쿡할배의 다른 사진 성공한 배우나 사업가 같은 느낌. 이 사진에서는 더 젊게 보임.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메인 입구 부근에도 호텔 오쿠라의 이름이 들어있는 가방이나 패키지가 많이있음. 또 '해피·버스데이'의 편지가 있음. 1960년에 런던에서 보내온 프랑스어로 쓰여진 그림엽서가 “엄마에게, 런던에서는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응. 목적지 주소(여기서는 포토샵을 사용해 지웠다)는 이 집이 되어 있음. 이 집에서 찾아낸 다른 편지의 대부분은 호텔 오쿠라 첨부의 키요미 라는 인물에게 향한 것임. 화장실 열쇠로 보이는것. 첫탐사는 여기까지였고 두번째로 다시 찾아감. 호텔 오쿠라 첨부로 가와이 키요미라는 인물에게 보내진 편지나 호텔의 대량 청구서가 이 집 입구 부근에 쌓여 있음. 이로써 첫 길이 보였다. 우선, 도쿄에 있는 호텔 오쿠라에 가자. 우선은 순진한 느낌으로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카와이 키요미 라는 인물이 아직 여기에 머물고 있는지 물었음. (아아, 꽤 옛날이군요! )라고, 낡은 컴퓨터로 5분 정도 조사해 준 뒤에 말했다. (하지만, 이쪽은 개인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알고 있다. 그 날 오후 나는 호텔 내를 다양하게 둘러봄. 옛날부터 있는 호텔내의 가게나, 커피숍의 종업원에게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예쁘지만 낡은 카펫의 냄새 이외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음. 그 시기를 알고 있는 사람 둘이서만 말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있는 가족이라면, 어딘가에서 근처에서 쇼핑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함. 확실히 그렇다. 운이 좋다. 다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였음. 이 집안에는 가족 무덤의 많은 사진과 1973년으로 쓰여진 감사장 등이 있었음. 이 예장은 가족의 무덤의 관리를 하고 있는 절로부터의 것으로, 가와이가로부터의 다액의 기부에 관한 예장이었음. 새로운 방향이 보였다! 작은 절이지만, 오히려 이 정도가 알기 쉬울지도 모른다. 사원의 주직의 작은 집이 바로 옆에 있었음. 가장 큰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어깨에 들고 문을 두드렸음. 파리에 있는 '20분'이라는 무료잡지 기자를 가장하기로 한 것임. 곧 늙은 남자가 문을 열었음. 노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가족을 기억하고 이름과 날짜 등의 흥미로운 세부 사항도 가르쳐 줌. 그리고, 절의 기장을 열고 이 가족만이 쓰여진 페이지를 보여줌. 정보는 행서로 쓰여 있기 때문에 알기 어려움. 이 작은 절과 특히 이 노인의 기억이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정보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가족의 무덤도 있음. 자손도 없고 살아남은 가족은 없음. 이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음. 슬픈 일일 것.. 외국인이 일본인 가족과 함께 무덤에 들어있다는 것은 흥미로움. 이번 입수한 정보로 이 많은 사진의 다른 견해가 떠오르고 새로운 접점을 찾을 수 있었음.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주요 관련 인물을 정리해 보자. 어머니. 카와이 쿠마 (? – 1965) 찍혀 있는 것은 꽤 험한 표정뿐이다. 분명 나이가 있기 때문일 것. 아버지. 카와이 마사키 왠지 마사키는 모든 사진으로부터 잘라져있어 어떤 풍모였는지를 알수는 없음. 외국할배 존 저우드 (1918 – 1991) 앞의 사진에서 엘리자베스여왕 옆에 함께 찍힌 영국 신사. 존의 아내. 카와이 지나코 (1919 – 1997) 존과 결혼했기 때문에, 저우드 부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형제 카와이 준지 (? – 1982) 누나 카와이 키요미 (1912 – 2004) 여동생. 카와이 키요코 그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 각각의 인물을 조사해, 이 저택도 포함한 역사를 찾아보자. 아버지: 마사키 아버지는 완전한 수수께끼. 이 가족의 낡은 사진은 많이 남아 있는데, 한 장도 남지 않고 아버지의 부분은 잘려있음. 왜?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다. 이 사진에 찍힌 것은 존(외국할배)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다른 문서에 따르면 아버지는 도쿄에 큰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 90살이 지나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가족에게 매우 존경받고 있었던것 같고, 이 가족에서 가장 수수께끼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음.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 노부인이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남아있음. 취미였을까? 증거는 없음. 이 사진에서는 이미 80대나 90대 같음. 이 사진에는 가족이 많이 찍혀있다. 제일 좌단은 키요미, 그 옆에서 흰색을 입고 있는 것은 맨 아래의 여동생 키요코, 그 오른쪽 옆은 존, 다음에 어머니, 중심의 기모노 차림. 그 외에도 두 명의 외국인도 찍혀 있다. 다른 가족을 잊어서는 안됨. 포포쨩! 포포짱은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살았고, 그 뒤에 이 가족이 기르던 고양이 해피짱은 모른다. 이 비둘기(!)를 어머니는 매우 귀여워 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장례식 사진으로 일단 끝난다. 모든 가족이 찍혀있어 매우 인식하기 쉽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형제 준지 준지는 쇼와 천황의 시대에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었음. 1936년 파리에서 존을 만남.집안에는 매우 흥미로운 편지가 남아 있었다. 전 총리 대신의 할아버지인 하토야마 씨로부터 서명한 것이었다. 이 편지에는 (이것도 1936년의 것) 하토야마씨가 유럽을 방문해, 히틀러를 포함한 주요국의 정상과 회담을 한 것 등이 쓰여 있다. 여기에서 또 "화려한"접점을 발견했다! 준지는 마사히로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4세에 죽고 있기 때문에(오른쪽의 사진에 의하면), 여기에서 준지와 함께 비치고 있는 소년은 아들이 아님. 이 가족의 손자 세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음. 위 사진은 1949년 첨부의 준지 은행 통장임. 큰 금액이 아니었음. 준지의 사진은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도쿄나 집에서 찍은 것임. 나는 오른쪽 아래 사진을 좋아함. 불쾌한 고양이의 태도를, 준지가 재미있는 것처럼 보임.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양이의 이름은 해피쨩이라고 한다. 이 큰 고양이는 1956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음. 이 찢어진 커튼은 왼쪽 사진 뒤에 찍혀있는 것과 같다. 준지가 여기에 살았음이 증명됨. 그러나, 이 가족은 원래 나가노의 출신인 것 같음(키요미의 호적이 증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준지가 둥근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을까? 여기 있었다. 다른 물건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사진이 있었음. 점점 밝혀지는 호화저택 폐가에 살았던 가족들의 이야기..갠적으로 이런거 졸라 흥미로와해서 파고들기 좋아하고 재밌어하는데 좀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하고 뭔가 흔한 과거의 향수라던지 .그런감정을 넘어서 살짝 기묘하고 무서웠음. 생전에 이 살아있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세상에 아무렇게나 다 볼수있게 공개하고 까발려도 되는건지에 대한 좀 그런 기분이 들었음. 그래서 사실 여기다 글을 쓸까말까 좀 오랫동안 고민함.. 어쨋든 이거 꽤나 귀찮은일이네 ㄹㅇ글쓰는 갤러들 존경 존나귀찬타 ㅋㅋㅋ다음편이 마지막 라스트임.. - 일본숲속의 폐가 마지막이 댄스홀의 사진도 그 한 장이다. 아마 도쿄에서 찍은 것일 것. 그 후 1982년에 준지가 사망하고 장례식에 모인 가족의 사진도 있었다. 존의 자매(와 그 남편?)다운 인물도 있다. 존 저우드 – 영국 신사 존. 처음에 정보를 쉽게 발견한 것은 존이었다. 보기의 "잘린 인물"는 존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장관이었지만 1918년 존이 태어난 그 해에 사망함. 존이 18세 때(1936년) 파리에서 준지를 만남. 분명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일본 정부 관계의 일을 하고 있었다.(진주 관련의 사업에도 관련이 있었다), 존 자신도 진주 거래에 관련되어 있던 삼촌관련에서 일하고 있었음.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여러가지 추측할 수 있다. 여자는 젊고 오빠의 소식이라고도 생각된다(1902년 3월생) 인물과 존의 어머니와 함께 사진에 찍혀 있다. 존은 영국의 명문학교를 마치자마자 제2차 세계대전에 징병된다. 대령이 된 존은 나치에서 아리에리라는 마을을 해방한 전략을 전개했다. 그 공적을 칭찬받아 1943년에 매우 명예 있는 로열 크로스를 받게 된다. 그 후, 존은 일본에 옮겨 살고, 죽은 지 얼마 안된 삼촌과 완전히 독립해, 진주 비즈니스에 재착수했다. 이에 따라 곧바로 부를 손에 넣었다. 1948년에 집을 지어, 1950년에 결혼했다. 이 집은 사실 그녀의 부모 (와 형제)에게 선물처럼 보임. 여기에는 존의 것이 아무것도 없음. 반대로, 많은 선물이 여기에 있음. 50~60년대의 텔레비전 4대는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고, 축음기나 영사기 등도 있어, 어머니의 초상화도 반드시 선물에 틀림없다. 존 토코코는 도쿄 도심에 살았고, 자주 여행을 떠났다. 누나의 키요미는 1912년에 태어났고, 여동생의 키요코는 스기코보다 수년 후인 3월 3일에 태어났다. 존의 도쿄 주소는 그의 명함에 실려있다. 살던 곳에 가보니 불행히도 이미 철거됨.. 여기에서 보는 도쿄 타워는 왠지 어둡고 활기차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텔 오쿠라는 근거리였다. 여자는 남편이 부재중일 때는 여기에 자주 다녔다. 가족에게 이야기를 되돌리자. 키요미는 젊고 아름다운데, 왠지 항상 혼자다. 그녀는 일본인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다. 진주에 관한 것도 많이 남아 있으며, 이것도 그 하나이다. 만지지 않았다! 파티와 댄스 사진이 많이 있음,이 가족은 상류 생활을 보냈음. 여자는 존의 자매와도 사이가 좋았던 것 같고, 함께 찍혀 있는 사진이 많이 남아있다. 일본인 여성은 젊을 때 자른 머리카락을 나이가 들고 나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존해 둔거같음. 약간호러;; 유감스럽게도 이 두 자매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키요미의 인생은 조금 외로운 것 같고, 여동생의 키요코는 결혼은 하고 있지만, 가족과는 별거하고 있다. 재단 (1977-1997) 존은 매우 부유하며 1977년 자신의 재단( 저우드 재단 )을 설립했다. 꽤 많은 기부를 한 것 같고, 이것으로 엘리자베스 여왕 옆에 찍혀 있던 사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재단은 지금도 아주 활동적이고 잘 알려져 있다. 가쿠란만은 이 재단에 관한 책을 사서 그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이 책에서는 존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음. 그러나 오늘 행해지고 있는 많은 것에 그의 업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왜 그걸 잊을 수 있을까? 창립자의 공적을, 왜 이 재단이 어둠에 장례해 버리는 것인가? 1983년 당시의 지하철 노선도. 당시 존은 도쿄에 있는 이치바시 대학에서 영향력을 가진 교수였다. 가족의 재산의 잔재가 아직 이 집에 남아있다. 위 사진은 당시의 주권이지만, 무려 판지로 되어 있다! 주로 의약품 업계에 투자를 한 것 같다. 이 기업들은 오늘날에도 존재. 이야기의 끝에 다가왔다. 이 집에는 쥰지의 어머니가 살고 있고, 자매도 한때는 여기에 살고 있던 것 같다. 존과 휴가에는 놀러 왔을 것이다. 호텔 오쿠라의 기사가 바닥에 떨어졌다(1973년). 만년도는 호텔 카페에 매일 다니던 것 같다. 앞서 쓴 것처럼 그녀의 집은 매우 가까워서 일과가 되었다. 여자는 조금 어려운 손님으로 그녀가 방문하면 스탭은 신경을 쓴 것 같다. 세 자매가 사이좋아보임, 존도 꽤 늙어가고는 있지만 항상 밝다. 훌륭한 서랍장 위에는 존의 자매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다. 존의 어머니의 오래된 사진이 될 수 있지만,,,
작성자 : ㅇㅇ고정닉
2차대전기 벌어진 마다가스카르 전투
아프리카 남동부의 거대한 섬 마다가스카르 이 섬은 1885년 이래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마다가스카르 총독이던 아르망 아네는 비시 프랑스 지지를 선언했다 이는 연합국에 있어 해상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줄 수 있음을 뜻했다 마다가스카르는 인도, 아프리카, 중동을 오가는 선박들의 주요 보급로였으며 추축국의 손에 넘어갈 경우 수에즈 운하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처음부터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상륙전을 치루기에는 갈리폴리의 악몽이 여전히 남아있던 데다, 본토 항공전을 치루는 것도 정신없었고 섬의 비시 프랑스군이 미약했기에 당장의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처칠에게 지속적인 마다가스카르 점령을 요구했다 그러나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우리는 여유가 없다" 라는 전보를 보내고, 참모총장에게 마다가스카르는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전 세네갈 다카르 에서 벌어진 자유 프랑스군의 졸전으로 영국이 자유 프랑스군의 전투력에 많은 의구심을 품은 상태였다 그러나 동부 인도양에서 일본의 공격이 심화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싱가포르와 버마(미얀마)가 점령되고, 1942년 2월 실론(스리랑카)에서 영국 함대가 일본에 대패하자 연합군의 인도양 재해권이 크게 흔들리고 만다 이대로 마다가스카르마저 일본의 손에 들어간다면 인도양 전체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이 개발한 해대급 잠수함은 추축국 최대의 항속거리를 가져 최대 2만km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일본 해군이 마다가스카르 항구를 이용한다면 인도양뿐 아니라 대서양까지도 일본군 잠수함이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처칠은 1942년 4월 섬 북부의 안치라나나(Antisare)와 디에고 수아레즈 점령을 목표로 한 아이언클래드 작전을 계획한다 1942년 5월,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50척 규모의 대규모 연합국 선단 Force 121이 1만명의 병력을 싣고 섬 북단의 디에고 수아레스 만 앞으로 집결했다 네덜란드와 호주, 뉴질랜드가 해상 지원에 동참했으나, 상술한 다카르 졸전으로 인해 자유 프랑스군은 작전에서 배제되었고 병사들은 영국군과 인도 남아프리카 등 식민지인들로 충당되었다 현지 비시 프랑스군의 주력은 2천명의 프랑스군과 6천명의 현지 징집병으로 해상 및 항공 전력은 사실상 정찰 병력 수준뿐이었다 이윽고 5월 5일 영국군은 항복 삐라 투하 및 소규모 공습 뒤 상륙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거센 저항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아무 저항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중국인 상점 주인에게 차를 대접받는 등 작전은 순조로운 듯 했다 그러나 내륙으로 35km 정도 들어간 순간, 영국군에게 소총과 박격포 세례가 날아왔다. 비시 프랑스군이 늪지대에 '조프르 라인' 이라고 불린 방어선을 구축한 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12대의 탱크 중 10대가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난다 이틀째의 공격 시도도 실패하자 영국군은 정면에서의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우회 병력으로 방어선의 후방을 공격해 통신시설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데에 성공한다. 아르망 총독은 후방 기습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병력의 열세를 느껴 본국에 도움을 청했다 뒤늦게 상륙 소식을 접한 비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은 분노했다 다를랑은 캐터펄트 작전에 이어 다시 벌어진 영국의 공격에 분노하며 "우리 국기의 명예를 굳건히 수호하고, 영국이 값비싼 대가를 치루게 하라" 명령하며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한다 기습이 효과가 있엇지만 여전히 조프르 라인은 버티고 있었기에, 영국은 재차 후방에 해병대 50명을 상륙시켜 기습했고 이들이 창고를 점령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해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윽고 5월 7일 안치라라나는 영국군의 손에 떨어지며 아이언클래드 작전은 완수되었다 3일간의 전투 끝에 영국군의 사상자는 600여 명,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여 명, 포로 1000여명이었다 일부 프랑스군은 영국에 항복했으나 대부분의 병력은 섬 남쪽으로 철수해 저항을 이어갔다 비록 대부분의 프랑스군이 섬 남쪽으로 후퇴했지만 영국군은 추격하지 않고 점령지 안정에 주력했다 섬은 전부 점령하기에 너무 넓었고 기반 시설 대부분도 안치라라나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주가 지난 5월 29일, 항구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폭음이 상황을 다시금 바꾸어 놓았다 비시 프랑스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일본군 해대급 잠수함 3척이 도착해 항구에 어뢰 공격을 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유조선 한 척이 침몰하고 전함 라밀리스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것이 대전기 일본이 유럽 추축군 세력을 직접 지원한 유일한 사례이다 일본의 지원함대는 곧바로 격퇴되었지만 영국군은 다시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섬 남부에는 비록 안치라라나보단 소규모지만 여전히 항구가 있었고 이는 일본 해군이 인도양을 활개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꼈다 영국군은 마중가 항구 공격을 시작으로 섬 전체를 점령하는 스트림, 라인, 제인 3개의 작전을 재수립했다 아이언클래드 작전은 3일만에 끝났지만 섬 전역을 점령하는 데에는 6개월이 걸렸다 작전 양상은 프랑스군이 도로를 봉쇄하고 후퇴하면 영국군 공병이 다시 길을 뜷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교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주요 교전은 10월 18일 안드라마날리나 계곡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기습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으나 역으로 영국군의 두 우회 부대가 프랑스군의 후방을 기습해 800명의 포로를 잡아 쐐기를 박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산발적인 소규모 교전이 이루어지다 11월 8일 아네의 항복으로 마다가스카르 전투는 끝이 난다 프랑스 현대사를 연구하는 줄리안 잭슨 교수는 자신이 집필한 드골의 전기에서 "프랑스는 1940년 독일에 맞선 것보다 1942년 마다가스카르에서 영국군과 싸웠을 때 훨씬 오래 버텼다"고 평했다 출처는 영문위키 마다가스카르 전투 문서 및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 홈페이지 축약 및 오역이 많으니 직접 가서 보는것을 추천 여기엔 다루지 않았지만 비시 프랑스군 장교가 항복한 뒤 한 첫 마디가 자기 연금은 어떻게 되는거냐고 묻는 등 재밌는 일화도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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