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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라이크게임을 까던 유튜버(센터로드).jpg
리니지라이크류 게임의 BM, 그리고 리니지라이크게임 방식, 프로모션BJ를 극혐하며 반드시 시작도 해선 안되고 존재해서는 안되는 악으로 까고 이게 흥해서10만구독자를 찍은 센터로드란 유튜버가 있음이렇게 리니지라이크에 부정적이던 이 센터로드가 조금 달라졌는데갑자기 4월부터는 착한리니지방식이라며 예로들어 레퍼럴서버를 따로 만들거나 BM부분에 대해 말장난을 안하면 괜찮다는 식으로 옹호영상을 만들기 시작함그리고 갑자기 방송에서 스마게 칭찬을 하기 시작함믿을수 있는 회사라느니 이미지가 좋은 회사라느니물론 여기서 리니지라이크게임을 만든 개발사는 쏙 빼놓고 말한다분명 예전 영상에서도 이 개발사를 가루가되도록 깐 적이 있지만 갑자기 기억을 잃었는지쇼케이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선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자기가 4월에 올린 영상을 근거로 레퍼럴bj서버가 따로 준비되어있기 때문에로드나인의 레퍼럴 제도는 착한 레퍼럴 착한 리니지라는 식으로 포장하는데이건 이미 예전에 자기가 올린 영상으로 반박이 가능하다프로모션서버든 뭐든 결국 거기로 몰려갈꺼고 이런 방식도 가루가 되도록 깐 적이 있기 때문그럼 로드나인만 특별취급으로 착한리니지 착한레퍼럴 착한과금이 되는 이유가 뭘까??분명 로드나인은 자기가 죽어라 깠던 내용이 모두 포함된 완벽한 리니지라이크인데왜 로드나인은 착한리니지 착한과금 착한레퍼럴이 되는걸까??그가 말한대로 착한bm이기 때문에? 리니지 악세 말장난처럼 나쁜 bm이 없어서??로드나인도 케릭터장비 아이템대신 탈것장비로 말장난쳐서 확률형bm장난질을 친게 공개됐는데과연 그 센터로드는 어떤입장이었을까?리니지라이크는 리니지라이크로 봐라과금은 자기만족이다 (실제로한말)그 동안 보여준 리니지라이크에 대한 태도와 너무 다른데 대체 왜이러는 걸까?분명 그는 확률형 아이템은 도박이고 한국게임에 이런 제도가 적용되는것에 욕을 시원하게 하시던 분이었는데로드나인만큼은 왜 우리게임 지켜야하는게임이 되어버리는 걸까?출연료는 받았지만 광고홍보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는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여기서 센트로드는 자기는 게임 이름을 모르고갔다 게임이름을 모르는데 무슨홍보냐?라는 식으로 말장난을 치는데 중요한건 리니지라이크임을 알고 갔느냐지게임 이름이 뭔지는 아무 쓸모가 없다그럼 센터로드는 정말 이 게임이 리니지라이크임을 몰랐던 걸까??그에 대해 시청자들이 1. 출연료받았는지? 2. 린라인지 알고 갔는지? 3. 질문내용을 미리 유출했는지물어보는 질문에 처음엔 왜 알려줘야하냐면서 알려줘야할 이유를 말해보라던지아니라면서 질문하던 시청자들에게 욕하면서 과잉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이 쯤 되면 눈치 채겠지만 대놓고 말장난하면서 구라치던게 걸리고리니지라이크인지도 몰랐는데 어떻게 리니지라이크용 질문을 준비했을까??즉 게임이 리니지라이크인것도 알고 질문도 미리 보내주고 돈도받았단거다.자기가 그렇게 까내리던 프로모션bj와 뭐가 다른걸까? 그래놓고 홍보는 아니라고한다.분명 자기입으로 광고라고 말하면서 광고홍보는 아니라고 하는 센터로드돈을 받았고 직접 면전에서 봤으니 예의는 지켜야해서비판을 제대로 안했다는 센터로드(여론이 나빠지니 로드나인을 까기 시작했다)왜 그동안 자기가 그토록 깠던 리니지라이크 완성판 로드나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건지이제는 이해할수 있다. 돈도받았고 직접봤으니 로드나인은 좋은리니지고 좋은bm이고 좋은레퍼럴 이었던거다.아직도 센터로드는 불리한 영상을 비공개로 돌리고 불리한 댓글은 삭제하고불리한 질문이 들어오면 예의가 없다며 차단하고 있다.출연료가 높지 않으면 정상적인 홍보활동으로 보이겠지만출연료가 비상식적으로 높으면 프로모션bj로 보인다는걸 알기 때문일까??그리고 왜 지금 린클에서는 눈에 띄게 쌀먹을 하며 오늘 몇천 벌었다며 좋아하고 자랑하는걸까???3줄요약1. 돈 받으면 착한리니지로 포장시켜주는 센터로드2. 내심 프로모션 레퍼럴 bj가 부러웠던걸까3. 앞으로 리니지라이크게임은 나한테 검사맡으세요(유료)
작성자 : ㅇㅇ고정닉
한국 균학의 어머니, 김삼순에 대해서 알아보자
김삼순...김삼순 하면내 또래 틀딱들은 응? 드라마 그거? 떠올릴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김삼순은그 김삼순이 아니라한국에서 균학이 학문의 형태를 갖추고 버섯 연구가 산업과 연결되는데 기초공사를 한 과학자이자, “한국 균학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그를 한국인 여성 최초의 농학 박사이자 과학자로 말하고과학기술유공자 공식 자료는 아예 “균학의 대모”라고 부름190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로 갔음 김삼순 본인이 과학 쪽으로 마음을 굳힌 이유가 “경성에 처음 와서 전깃불과 전차를 보고, 앞으로는 과학이 더 중요해질 것 같아서”였다고 함...지금 보면 낭만적인데, 당시 조선 여성에게는 꽤 과감한 진로 선택이었음 이후 교사로 일하다가, 대학에 가겠다고 직장을 던지고 큰오빠의 도움으로 가족 반대를 이겨내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물론 잘사는 집안이긴하나 당시 여자로썬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던건 확실함 그리고 1941년,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식물학과에 입학함 이게 왜 중요하냐면, 당시 조선인 여성에게 제국대학 이학부 입학 자체가 거의 돌벽 뚫는 수준이었기 때문임 여기서 식물생리학 교실에 들어가 사상균, 즉 곰팡이류를 연구했고, 1943년 9월 조선인 여성 최초로 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했음 즉 훗날 버섯 연구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출발부터 버섯 재배 전문가는 아니었고 기초 균류 연구를 제대로 밟은 식물학·균학 계열 엘리트였음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꼬임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 더 공부하려 했지만, 1944년 말 귀국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됨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음 교수 자리도 있었고, 그냥 그 시대 기준으로 충분히 성공한 여성 지식인으로 살 수도 있었는데, 본인은 박사 학위의 꿈을 꼭 이루고 싶어했음 그래서 다시 일본 유학을 준비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녀를 지지해주던 큰오빠가 북한군에게 희생되고, 본인 건강도 악화되고, 남편까지 사망하면서 계획이 무너짐 사실 이정도면 그냥 멘탈 터져서 다 포기할만할 함
그런데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음 보통 이쯤 되면 인생이 접히는데, 김삼순은 1961년 다시 일본으로 감 무려 25년 만의 재도전임 처음엔 홋카이도대로 갔지만 연구 주제를 맞춰줄 교수가 없어 규슈대로 옮겼고, 거기서 도미타 키이치 교수 밑에서 다카아밀라아제 A의 광불활성 반응을 연구함 그리고 1965~1966년에 일본 학술지와 Nature에까지 논문을 발표한 뒤, 1966년 57세의 나이로 한국인 여성 최초의 농학 박사가 됨 이건 그냥 여성 최초 타이틀만 대단한 게 아니라, 57세에 국제 수준 논문을 묶어 박사를 딴 거임 .많은 사람이 여기서 착각하는게 “김삼순은 원래 버섯 전공이 아니었는데 왜 느타리버섯을 했냐?” 하는 식으로.그런데 그건 반만 맞음 이 분은 애초에 사상균을 연구했고, 효소 연구로 농학박사까지 딴 균류·미생물 기반 연구자였음 즉 느타리버섯 연구는 뜬금없는 외도가 아니라, 기초 균학에서 응용균학으로 넘어간 확장에 가깝움 1968년 귀국 후 서울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창립 교수로 합류하면서 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우고, 여기서 버섯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균학 연구에 착수했음 원래는 균학 전문가 였지만, 이쪽으로 연구비는 잘 안나오고당시에는 정부에서는 수출에 쓸수 있는 실용적인 연구를 바랬고그리고 여기서 느타리 버섯이 나오게 됨 당시 국내에서 느타리버섯은 아직 제대로 상품화되지 않았고, 연구는 있었어도 사회적 반향이 크지 않았음 김삼순은 국가 지원을 받아 느타리버섯 인공재배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느타리가 전국 어디서든 재배 가능하며 양송이보다 20~25% 수량이 많다는 점을 확인했음 쉽게 말하면 진짜 농가에서 먹힐 수 있고, 농가 소득 증가 가능성을 보여준 셈임 김삼순보다 먼저 느타리를 건드린 사람은 있었지만 정작 보급의 돌파구를 연 건 김삼순의 연구와 그 파급효과였다고 평가됨 김삼순 이전에도 느타리 버섯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가 그걸 국가적 보급 가능성이 있는 연구로 바꿨느냐는 건데, 그 자리에 김삼순이 있었다는 거임 단순히 그냥 논문 몇 편 쓴 교수가 아니라, 오늘날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생각 안 하는 버섯 산업의 초기 인프라를 깔아준 인물로 봐야함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님 보통 연구자들은 자기 실험실만 챙기는데, 김삼순은 아예 분야의 판 자체를 만들었음 1972년 한국균학회를 창립했고 초대 회장이 되었음 그리고 재임 4년 동안 한국균학회지를 창간하고, 한국어 버섯명 통일안을 마련하고, 국내외 학술대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버섯 공동 채집회까지 추진했음 한국균학회 항목을 보면 창립 멤버는 여러 명이지만, 초대 회장이 김삼순이었고, 국제균학협회 가입과 학회지 발간 같은 제도화 작업이 이때 이뤄졌음 한국 균학이라는 분야를 바닥부터 세팅한 사람임 괜히 김삼순을 두고 한국 균학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나오는게 아님1974년 정년퇴임 뒤에도 끝이 아니었음보통 여기서 자서전등을 쓰면서 쉬는데, 김삼순은 고향 담양으로 내려가 1978년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웠음 운영은 쉽지 않았다고 함 연구 인력과 비용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기대한 만큼 크게 굴러가지는 못했음 그런데도 그녀는 후배 김양섭과 함께 10여 년간 버섯 연구를 계속해서, 1990년 81세의 나이에 한국산버섯도감을 냈음 여든하나에 도감을 쓴거임 그리고 이후에도 논문 발표를 이어가다가 2001년에 생을 마감하심요약하자면 전쟁과 식민지와 성차별의 시대를 뚫고,쉰일곱에 박사 따고,귀국해서 느타리버섯 연구를 산업화의 길로 밀어 올리고,한국균학회까지 세워서 한국 균학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 볼수 있을꺼임 국가와 학계도 완전히 몰라준 건 아님 김삼순은 1976년 여성 과학자 최초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79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았음 1990년 월남상, 1995년 자랑스런 경기인, 그리고 훨씬 뒤인 2021년에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었음 아쉬운건 이런 훈격과 평가에 비해,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음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 대한민국 학술사 기준으로는 이 분의 위상이 애매하지 않음 한국 균학의 제도적, 학문적 발전을 이끈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부정할수 없을꺼임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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