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체스는 한 판 게임 부담이 바둑보다 덜하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있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이미 최강자가 기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만의 경기" 를 진행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인간 최강자들끼리의 경기에서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바둑은 한 판이 매우 길며, 초기에 어느 정도 배치가 세팅되어 있는 체스와 달리 구조를 쌓아올려야 하는 바둑은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피로감을 준다. 즉 재미 면에서 경쟁력이 현저히 뒤쳐진다. 

2. 바둑은 신선놀음이라는 고상한 이미지 덕분에 팬덤을 구축해왔지만 반대급부로 진입장벽 같은 게 쳐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개박살로 인해서 그 고상한 이미지가 무너졌다. 

고상한 이미지는 주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음과 심오함" 에 대한 것인데, 알파고는 네이쳐에 공개된 논문과 알고리즘을 통하여 

그것을 방법론적 차원에서 접근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내렸고 신비함을 걷어내버렸다. 

즉 이 시점에서 바둑은 "좀 어렵긴 한데 어차피 기계가 다 커버할 수 있는 정도" 일 뿐인, 마치 그 안에서 현학적인 어떤 것을

찾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경기 전에 프로기사들 행태를 떠올려봐라. 얼마나 상대 수준을 몰라보고 야부리를 털었던가? 그 행동의 기저에는 바둑이 가진

심오한 이미지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개박살. 다 우스운 꼬라지가 되었다만.

3. 사실 이게 제일 큰데..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결과에 의미를 두며 승리냐 패배냐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보는 동양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입신양명, 사회적 스테이터스 내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 기질 이 모든 것이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바둑이 그런 동양에서 인기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약하다면, 기계한테 인간 고수가 깨졌든 말든 각자가 자기의 바둑을 두면 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그런데 일단 승패부터 먼저 주목을 하게 되면, 누가 현 최강이냐에 화살표가 집중되게 되고, 자연히 기계에게 모든 주목이 쏠린다. 

실제로 초심자가 기계보다는 인간 프로기사에게 배울 건덕지가 비교불가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 자체는 간단히 묻혀버린다. 

어차피 1인자 최강자는 알파고인데, 인간들끼리 2위를 가려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에 대해 동양권 문화는 반론이 불가능하다. 

각자의  my way 를 중시하고 개인의 진보에서도 의미를 찾는 서양권 문화에서만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