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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생활상에 대해서 알아보자.txt

ㅇㅇ(45.14) 2021.10.09 16:14:47
조회 5126 추천 21 댓글 25
														

1.일제시대 임금과 물가



1930년대 한국인 노동자의 일일 평균 임금이 90전으로 한 달에 25일 일한다고 해도 22원 50전에 불과하였으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의 경우 연간 총수입이 70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제하 우리 국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경제 정책의 근본은 토지를 극소수의 대지주에게 집중시켜, 고액의 소작료를 통해 한국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드는 식민지 지주제였다.


이러한 정책하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계속된 소작료의 인상에 따른 극심한 생활고는 농사를 계속한다는 것이 더는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 출처: [정재걸의 역사 속 교육] 식민지 교육의 이해 - 에듀인뉴스 ]


원문: https://www.edu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15






열악한 조선인들의 생활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에서 보이는 1923년 부산부의 물가를 기준으로 5인 가족의 한 끼 상을 차려보자. 밥과 두 가지 반찬을 놓는다고 할 때, 한 끼 식사 에 드는 재료비를 산출해 보면, 밥 한 그릇에 1홉씩(10홉=1되)의 쌀이 들어 5인이면 5홉 1/2되 16.65전이 들고, 반찬은 표에서 가장 저렴한 것으로 두부 1모 3.8전과 무 500g 3.3전, 모두 합쳐 23.전이 된다. 이것을 3끼로 계산하면 총 70.8전이라는 수치가 산출된 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의 최고치는 60전이고 여기에 못미치는 60전 미만인 경우도 있어, 이들의 일급 은 하루하루 식사만 하기에도 부족해 땔감, 의류, 기타 잡화 등의 구입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부산부에서 조사된 인력 거꾼과 짐꾼의 일급은 각각 1원30전, 1원으로 이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일급으로 생활하기에는 빠듯함을 알 수 있다.



출전 - 홍순권 외 『 일제강점하 부산의 지역개발과 도시문화 』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caesar117/70148129671







그러나 제 의문은 수탈이나 착취가 없었는데 왜 조선인들이 그렇게 가난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일제 때 한국에 온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거나 직업이 없는 실업자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 부자가 됐다. 조선인은 더 가난해졌는데 일본인은 거의 전원이 큰 부자가 됐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고 이상하지 않나. 그런 수수께끼를 공부를 통해 나름대로 풀었다. 결국 수탈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총독부의 통계연보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당이 일본 노동자의 절반인 1엔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30~40전, 심지어는 20~30전만 지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실질 임금은 도리우미 박사가 일본 청부업자들의 회고록 등 생생한 자료를 뒤져서 찾아낸 성과다. 그러한 불공정, 편법을 식민지 당국이 방관하고 조장했기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시기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착취이자 수탈이 이뤄진 때라는 것이다.


회고록 등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가서 물건값이 비싸다면서 때려서 가격을 싸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사적 폭력을 경찰은 방치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손해를 봐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 사업주들이 아예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도망가는 사례도 많았다. 이처럼 일본인 입장에서는 폭력 등을 이용해 실생활에서 이득을 봤지만, 한국인은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 출처: ‘반일 종족주의’ 비판 일본 학자 “조선인이 그렇게 가난해졌는데 수탈·착취 없었다니” - 한겨레 ]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11267.html








2.일제시대 대부분의 인구의 생활상 및 영양상태




일제강점기 농민은 조선 전체 인구의 70-80%대를 차지하였다. 이농현상이 심해지면서 1930년대 후 반부터 감소추세를 보였지만, 예컨대 1910년 농민은 전체 인구의 78.1%에서 1920년 83.4%로 급증하 였고(윤수종, 2010: 17), 1925년에는 84.6%에 달하였다(민경배, 2008: 267). - 287p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 계통의 문헌 곳곳에 일제가 조선 농 민에게 복리사업을 펼쳤거나 펼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농가의 소 비권역이 생산권역 안에서 이루어졌던 시기에 이들 권역이 서로 벌어지면서 자급권역은 줄어든 반면 구매권역이 넓어지면서 당시 농민은 지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고(文奉午, 1936: 53), 전체 인구의 80%인 농민 중 85%가 소작인으로 사는 것이 농촌사회문제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한 점을 (阿部望洋, 1926: 77) 통해 짐작할 수 있다. - 290p



출처: 최옥채. (2013). 일제강점기 농민복리 -사회사 관점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학, 65(2), 287-311.


원문보기: 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13185525343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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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dsr_005_0040_0010_0020






우리 농촌을 일제의 식량기지화하기 위하여 1920년대에 전개되었던 두 차례의 산미증식 계획은 우리 나라의 농민을 더욱 몰락시켰다. 산미증식은 수리조합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이에 의한 조합비 부담의 고통은 조합원 농민이 토지를 방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의 소작농화 경향과 궁핍화가 더욱 심화되었고, 우리 나라의 쌀은 일본으로 수출하고 만주의 좁쌀을 수입하여 먹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1930년대의 농업공황은 농산물가격을 폭락시켜 농민의 궁핍상은 나날이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농가의 빚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예컨대 1930년에는 전체 소작농민의 약 75%가 1호당 평균 65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1933년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농가의 78%가 평균 115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더욱이 빚의 용도가 생산자금이 아니라 식량구입에 쓰여졌다는 것을 보면, 농민의 궁핍상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우리 농민들은 밥은 죽으로, 쌀은 잡곡으로, 잡곡은 만주의 좁쌀로,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은 만주의 좁쌀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싸라기를 산채나 나물의 묽은 죽에 띄워 먹곤 하였다.이들은 초근목피 중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소나무껍질·칡뿌리·솔잎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전단토(田丹土)나 흰 찰흙을 죽에 섞어먹기도 하였다.



수탈자의 입장에 있던 당시 조선총독부 당국자까지 「조선」 1921년 3월호에 “먹을래야 먹을 것이 없고, 입을래야 입을 옷이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어, 산야나 노변에 쓰러져 친척과 친구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인생행로에 종언을 고하는 자가 연년이 거수(巨數)에 이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 혹독한 수탈을 참아가며 소작농에 안주하거나 걸인의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거나, 아니면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소농층의 양상이었다.



한편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합작시켜 동아권업공사(東亞勸業公司)와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殖株式會社)를 설치하여, 만주이민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 농민을 만주의 소작농으로 쫓아냈다.



1939년까지 이렇게 나간 유민(流民)은 동아권업공사가 2만 550명, 선만척식주식회사가 6만 5,015명으로 집계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 할 것이다.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농민이 겪은, 심한 식량난은 보릿고개라는 극한상황으로 드러났고, 이런 참상은 만주로 이민간 우리 농민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농림국장이 “1936년 미곡연도 쌀소비량은 1,209만석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소비된 1,033만석을 공제하면 남는 것은 176만석”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앞의 176만석의 쌀이 당시 2,500만 동포가 여섯달(5∼10월) 동안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이었다면 한 사람 앞에 하루 평균 0.04홉씩 돌아가는 셈이다.이 0.04홉도 당시 우선적으로 백미배급을 받던, 우리 나라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60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양민들에게는 거의 한 톨의 쌀도 돌아갈 게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릿고개)]


원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326





당시 농촌인구의 43%이상이 초근목피 먹고, 진흙쿠키 먹음. 쪽뽕 씹덕 빨갱이 좀비들이 항상 들먹이는 이씨 공산조선이랑 비교해도 별 다른게 없다.







'조 교수는 ‘사할린 화태청(樺太廳·1907∼1945년 남사할린을 관할한 일제의 관청) 소장 경찰 기록과 일제하 조선인 신장(身長) 추세’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1896∼1900년생 남성은 평균 키가 162.8cm였지만 1921∼1924년생은 평균 159.5cm로 3cm 이상 작아졌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평균키를 볼 수 있는 당시 국내 자료는 매우 드물다. 국내 관보(官報)의 행려사망자 기록을 분석한 연구가 있지만 원자료가 눈대중으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높아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서울 양정고보 학생들의 기록을 조사해 “같은 연령대에서 신장이 점점 커졌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들은 청소년인데다 조선인 가운데 상류층에 속해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으로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 출처: “일제때 조선인 키 3cm이상 줄어” - 동아닷컴 ]


원문: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1205/81664223/1




일제때 불리한 자료를 많이 불태우거나 가져가서 그런지 키에대한 정확한 연구를 찾을 수 없는데 사할린 관할권 조사를 보면 키가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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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18년까지는 영양 공급량이 증가하다가, 그 후 1945년까지는 감소 경향을 보이며, 해방 뒤 반전하여 뚜렷한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에너지 공급량과 단백질 공급량이 거의 정체해 있는 것은, 이 시기가 되면 다이어트가 주요 관심사로 될 정도로 영양 공급이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의 소득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이 기간에 조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고 가정해 보자. 낮은 소득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기, 즉 항상 배가 고프던 그런 시기에는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음식물 소비량이 늘어날 것이다. 영양 공급량이 증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프를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영양 공급량이 감소했다는 것은 평균 키가 커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연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유의해야 할 점은 1918년까지의 증가 경향이다. 필자는 이 증가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직후의 초기 통계가 갖는 문제점 때문이며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동시에 이 기간의 경제성장을 둘러싸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미 수많은 논쟁을 벌여왔다.결론적으로 말해 1910~1918년 동안에도 영양 공급량은 감소하거나 정체했다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주장을 못 믿겠다면, 쟁점이 되는 기간을 논외로 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더라도 결론은 큰 차이가 없다.




글·허수열(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출처: 식민지 근대화론은 ‘불편한 진실’ 아닌 ‘불편한 허구’다 - 한겨레 ]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07420.html







필자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추계한 GDP가 현존하는 추계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부분이 남아 있다고 생 각하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1918년 이전의 추계 부분이다. GDP를 추계할 때 사용한 조선총독부의 원자료는 초기로 갈수록 과소평가 의 문제가 큰 것이었다. 이 문제는 조선총독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 조사사업이 종료된 후 조선총독부는 1910~1917년 간의 농업생산과 관련된 통 계를 『통계연보』 1918년판과 1919년판에서 두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정하였 다. - 100p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1914년과 1936~1944년 간의 9개년 평균의 곡물생 산량을 비교해 보면,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경우(18개 품목) 증산률이 20.34%이고, 『한국의 경제성장』의 경우(6개 품목) 증산률이 22.65%였다. 차 명수의 인구추계에 의하면 1911~1944년 간에 인구증가율이 55.9%였기 때문 에 1인당 곡물소비량(생산량 기준)은 33.3~35.6%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된 다. 식민지기 1인당 곡물소비량의 감소는 주익종이 생각한 것처럼 14%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30%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106,107p



1911~1944년 간의 차명수의 인구증가율 이 55.9%이기 때문에 이것을 차감해 주면 1인당 야채와 과일 소비량(생산량으 로 대신하였다)은 6.5% 증가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식민지 초기의 값을 1915 년 수준으로 잡는다면 1인당 소비량의 증가율은 -8.0%가 되어 버린다. - 108p



현재 두수를 보면 1910~1914년까지 급증하고 그 후에는 완만한 증가세를 보여준다. 29) 1920년대 중엽 이후에는 출산 두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폐 사·도살·박살된 소의 두수가 추세적으로 감소하였기 때문에 현재 두수가 약 간 증가한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상에서 소의 동태를 보면, 가계에서 소비 되는 쇠고기(그 부산물과 가공식품 포함)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통계상으로 증가했다면 1910~1923년 사이에 특히 1910~1914년 간에 증가했을 것이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만약 쇠고기 소비량을 소의 현재 두수와 일정한 비례관계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30) 식민지기의 쇠고 기 소비량은 27.9% 증가(1914년과 1936~1944년 평균의 비교)한 것으로 되고,

1911~1944년 간의 인구증가율 55.9%를 감안하면 1인당 소비량은 28.0% 감소 한 것으로 된다. 돼지와 닭의 경우에는 동태통계가 부족하여 위와 같은 세부 내역을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두수로부터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림 11> 참조). 닭의 경우에는 초기 두수를 1914년 수준으로 잡고 1936~1944년 9개 년 평균값과 비교해 보았을 때, 현재 두수가 57.9% 증가한다. 1911~1944년 간 의 인구증가율 55.9%를 차감하면 1인당 닭고기 소비량(현재 두수 기준)은 2% 증가에 그치게 된다. 돼지의 경우에는 초기 두수를 1914년경으로 잡고 1936~1944년 간 9개년 평균값과 비교해 보면, 현재 두수가 75.2% 증가하고, 여기에서 인구증가율 55.9%를 차감하면 19.32% 소비량(현재 두수 기준)이 증 가하게 된다. - 108~109p



지금까지 소, 닭, 돼지에 대해 일정한 도살률을 전제로 현재 두수로부터 1인당 육류소비량을 계산해 보았다. 1인당 쇠고기 소비량은 약 28% 감소했고, 닭고기의 경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돼지고기의 경우에는 19% 정도 증가한 것으로 계산되었다. 주익종은 1인당 육류소비량이 60% 증가했다고 하였지 만, 필자의 계산으로는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되었다. 주익종이 언급한 것 중에서 1인당 어패류 소비량이 3.3배로 되었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1인당 식품소비량의 감소는 명백하다. 요 컨대 농축산물의 경우, 1인당 소비량은 모두 감소경향이 뚜렷했고, 따라서 1인 당 총 칼로리 섭취량도 감소경향이 뚜렷했다고 보아야 한다. - 110~111p




지금까지의 1인당 소비에 대한 계산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 등에서 차 명수가 추계한 인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차명수가 추계한 조선의 인 구는 1915~1924년 간의 인구증가율이 기존의 이시 요시쿠니[石南國], 김철, 미조구치 토시유키[溝口敏行] 등의 추계에 비해 매우 낮도록 책정되어 있다. 그 결과 식민지기의 인구증가율도 다른 추계에 비해 낮아진다. 차명수가 추계 한 인구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루기는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인구증가율이 차명수가 추계한 것보다 더 높다면, 1인당 소득과 1인당 소비의 증가율은 한층 더 낮아지게 된다. 즉 생활수준의 악화는 한층 더 뚜렷해지게 된다. - 111p




출처: 허수열. (2007). 식민지근대화론의 쟁점. 동양학, 41, 227-250.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05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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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조차도 힘듬






3.일제시대의 세금




당연히 식민지 조선은 본토보다 훨씬 악랄한 세금 착취에 시달렸다. 일본의 '전시이득세'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임시이득세'를 물렸고, 전신주에도 세금을 매겼으며, 유흥업소 출입시 입정세를 받았다. 일본의 세금 항목들이 식민지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던 것이다.


거기에다 태평양전쟁 때는 '특별행위세'라 하여 사진 촬영, 미용, 옷 염색, 인쇄 제본 등을 할 때마다 요금의 20~30%를 거두기까지 했다.


이렇다 보니 일제강점기 내내 농민, 노동자, 상인들의 '항세(抗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상해 임시정부의 포고령 제1호가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 이었을까 싶다.



[ 출처: 전봇대에도 세금을 매겼던 일제의 악랄한 착취 - 시사저널 ]


원문: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049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조세수입이 40배, 1인당 조세부담액은 30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제 강점기 1인당 조세부담액을 보면 1910년에는 0.81엔이었으나 1943년에는 24.1엔에 달해 29.7배로 증가했다.



[ 출처: 일제 강점기 세금 40배 증가 - 경남신문 ]


원문: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59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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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ntent.v.daum.net/v/5c7e6a636a8e5100018bceab







이씨 좃선이랑 말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북좃도 한 때 배급은 퍼줬는데 일제는 더 악랄하게 수탈함. 쪽뽕 씹덕 빨갱이 좀비들이 맨날 이조타령을 할 수 밖에 없는거야.. 북괴보다도 딸리니깐




일단 농촌인구랑 도시빈민들 합치면 80%넘게 꿀꿀이죽이나 초근목피,진흙쿠키 먹는 극빈층일텐데 여차저차 다른 변수를 제거하고 아무리 보정치를 퍼줘도 그 당시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비율이 총인구의 20%조차 절대로 안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0%도 혜택을 못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친일파 = 이씨 공산조선 양반 = 북좃,중국 공산당원 이렇게 보면 되는거야



이좃 유교탈레반 vs 친일신토,불교,공산탈레반 과연 승자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새 인터넷상에 많이 보이는 네오좆빨이 씹덕 파시스트 빨갱이 좀비 구울 새끼들이 강철서신,자본론 같은거 읽거나 어설프게 주서들은 거로 헤롱헤롱하는 주사파나 극좌빨갱이들이랑 똑같은 거야



얘네들이 경성시내 전경사진 올려놓고 일제가 좋았다고 빨잖아 만약에 그 건물들이 공실률 엄청 심하거나, 사실 사진촬영 하려고 만들어낸 모델하우스들이라고 자료나 인터뷰 쏟아졌다고 가정했을 때 이 새끼들은 그래도 빨꺼라고 예상함

얘네랑 주사파랑 별 다른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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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갑 절대 안 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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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0469 아내가 주먹쥐고 젓가락질 vs 아내가 쩝쩝충 [1] ㅇㅇ(223.38) 21.10.18 58 0
2180468 최동원 = 이순신 / 벌렌더 = 전두환 ㅇㅇ(121.180) 21.10.18 43 2
2180467 X자 젓가락은 손가락 상처낫을때 해봤는데 ㅇㅇ(39.7) 21.10.18 29 0
2180466 디시 분발해야겠네요 ㅇㅇ(203.226) 21.10.18 41 0
2180464 근데 신립도 졸장인가요? [5] ㅇㅇ(223.39) 21.10.18 70 0
2180462 국민의힘 이재명상대로 필살기시전 [2] ㅇㅇ(220.70) 21.10.18 169 8
2180461 그럼 박찬호 일본 추신수 미국처럼 국적 갈아탄 건 ㅇㅇ(118.235) 21.10.18 58 0
2180460 똥양 올스타가면 mlb시즌100승가능한가요? [3] ㅇㅇ(223.39) 21.10.18 114 0
2180459 런조 글씨원툴 아니었는지... ㅇㅇ(219.248) 21.10.18 50 0
2180458 희삽신은 3루못봄 ? [4] ㅇㅇ(39.7) 21.10.18 92 0
2180457 젓가락질 주먹쥐고 하는거랑 존나 큰 X자는 ㅇㅇ(223.38) 21.10.18 23 0
2180456 아시아 역대 투수로 선발진 꾸리면 이거 맞음? ㅇㅇ(106.101) 21.10.18 28 0
2180455 이대남들 문제는 그거죠 ㅇㅇ(223.39) 21.10.18 51 6
2180454 조선 어느순간 시발 면 후루룩쩝쩝 해대는게 [3] ㅇㅇ(118.235) 21.10.18 116 0
2180453 주빈하고싶다 [2] ㅇㅇ(14.51) 21.10.18 25 0
2180452 올해 번스 사이영 받으면 내년 류현진이나 오타니도 가능하냐? ㅇㅇ(121.180) 21.10.18 22 0
2180451 오늘자 이탈리아 태축.jpg [3] ㅇㅇ(121.172) 21.10.18 107 0
2180450 개야갤에서 원균 떡밥 자주 도는 이유가 있었네요 ㅇㅇ(118.235) 21.10.18 62 3
2180449 질문) 한국 일본 연합팀이면 하위 포시 진출가능? ㅇㅇ(118.235) 21.10.18 20 0
2180448 졸순신 = 개눈깔, 원균신 = 개스벅이죠 [1] ㅇㅇ(220.127) 21.10.18 63 0
2180447 임진왜란 5대장이 이거 맞나요? [4] ㅇㅇ(223.39) 21.10.18 98 0
2180446 용택하고싶다 씨발 타르감별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10.18 11 0
2180445 젓가락질 가지고 씩씩대는 거 다 학식때까지죠 [2] ㅇㅇ(223.38) 21.10.18 47 3
2180444 이대호 - 김하성 - 강정호 - 최희섭이면 너드7은 되네요 [1] ㅇㅇ(39.7) 21.10.18 42 0
2180443 조선올스타 mlb가면 5할은 할지도 [1] ㅇㅇ(223.39) 21.10.18 56 0
2180442 순신신은 자주 언급되는데 왜 시민신은 언급 안되는지? [4] ㅇㅇ(223.39) 21.10.18 210 0
2180441 임진왜란 war순위 [2] ㅇㅇ(223.39) 21.10.18 114 1
2180440 조선 역대 올스타가 이거 맞는지? [12] ㅇㅇ(211.36) 21.10.18 184 0
2180439 최고의독립운동가 글씨체 [1] ㅇㅇ(39.7) 21.10.18 88 0
2180438 오푼신 VS 거박신 [5] ㅇㅇ(118.235) 21.10.18 129 2
2180436 이름이 균이면 큰 사람이 되나봐요 [3] ㅇㅇ(175.121) 21.10.18 85 0
2180435 민정신 대표적인 마기꾼이죠 ㅋㅋㅋㅋ [1] ㅇㅇ(118.235) 21.10.18 103 1
2180434 정알못인데 대선후보가 보트타면 누가 대타로 나오나요? ㅇㅇ(39.7) 21.10.18 50 0
2180433 이재명-추미애-박주민-김남국-고민정 ㅇㅇ(223.39) 21.10.18 29 0
2180432 임진왜란 현실...jpg [6] ㅇㅇ(118.235) 21.10.18 228 6
2180431 또또 보수여전사 민정신 음해 ㅇㅇ(118.235) 21.10.18 38 0
2180428 센세 산보1위랑 4개차이밖에 안나네 [2] ㅇㅇ(118.235) 21.10.18 79 0
2180427 저는 그래도 고민정 좋아합니다 ㅇㅇ(223.38) 21.10.18 46 1
2180426 조선 내야 역대로 하면 누구누구인지? [6] ㅇㅇ(222.112) 21.10.18 108 0
2180425 팩트) 의사 변호사들 죄다 악필이다 ㅇㅇ(118.235) 21.10.18 31 0
2180424 국저스 병클란타함테 2연패했네 ㅋㅋㅋ 55(39.7) 21.10.18 29 0
2180423 글씨체는 좀만 노력하면 고칠수있는데 안고친다는건 [4] ㅇㅇ(39.7) 21.10.18 128 0
2180422 고민정 그 분 남편도 상태안좋고 공천마저 떨어지면 [1] ㅇㅇ(118.235) 21.10.18 78 0
2180421 다음대선이 ㄹㅇ 기대되기는합니다 ㅇㅇ(223.39) 21.10.18 43 0
2180420 고랄이 7월만 해도 서재앙 넘을줄 알았는데 ㅋㅋ [1] ㅇㅇ(175.223) 21.10.18 60 0
2180419 그와중에 저미 2군 모선수 개추하네요 ㅋㅋ [5] ㅇㅇ(112.153) 21.10.18 155 10
2180418 아니 씨발 새보갤 언제는 40대진보대학생 모임이라더니 [2] ㅇㅇ(39.7) 21.10.18 90 3
2180417 글씨 못 쓰는 이준석 vs 글씨 잘 쓰는 박근혜 [4] ㅇㅇ(118.235) 21.10.18 108 0
2180416 김광현이 김선우는 넘음 ? [1] ㅇㅇ(39.7) 21.10.18 7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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