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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글) 남베트남은 왜 패망했는가
베트남 전쟁은 6.25 전쟁과 함께 냉전시기 대표적인 열전으로 손꼽힌다.처음 베트남에 미군이 개입할 때까지만 해도 미군은 남베트남에 창궐하는 베트콩 따위 신속히 궤멸시키리라 믿었다.그러나 미군은 수 년 간을 질질 끌려다니다 끝내 패배하고 남베트남의 적화통일을 바라봐야 했다.흔히 정훈 교육 시간에 나오는 이야기로 ‘남베트남은 전시에 좌빨 간첩들이 시위 선동해서 망했다!’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패망 원인 중 하나는 맞을지라도, 핵심적인 부분은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오늘 정성글에선 왜 남베트남이 패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1. 남베트남의 탄생흔히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국의 괴뢰’, ‘미국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유사 국가’라는 설명이 뒤따를 때가 있다.물론 전쟁 후반부쯤 가선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공화국이 수립될 초창기에 그들이 정말 근본없는 반동 괴뢰분자였는지에 대해선 오늘날 많은 반박이 있었다.일단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하면 호치민과 베트민만 주로 떠올리지만 베트남에는 수많은 성향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 vs 사회주의로 나뉘어 싸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베트남은 어땠겠는가?남베트남이 처음 성립될 무렵에는 실제로 반프랑스 독립항쟁을 꾸준히 펼치던 민족주의-반공주의 성향 독립운동가들이 한 데 뭉쳤었다. 초대 총통(대통령) 응오딘지엠은 우익 진영 사이에서 최고존엄급 독립운동가였고, 다름아닌 호치민이 그의 형을 납치해 죽일 정도였다.[남베트남 초대 총통 응오딘지엠(오정염)]주로 외교 활동을 수행한 응오딘지엠 외에도 베트남 내부에선 불교 계열 베트남 고유 종교인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를 중심으로 한 무장 투쟁 집단이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켰고, 북베트남 지역에선 베트남 국민당이라는 우익 민족주의 성향 정당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항불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그런데 이들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조금씩 프랑스와 유착한다. 겉으로만 보면 그들이 ‘식민 권력에 빌붙어 동포 독립운동가들을 배척’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복잡했다.베트남 우익 독립운동 단체들이 프랑스와 협력한 것은 베트민이 이념을 이유로 꾸준히 우익 독립운동가들을 테러하고 팔아넘겼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적색테러와 배신에 학을 뗀 베트남 우익 독립운동 세력은 그들 사이의 알력다툼을 알아챈 프랑스가 내민 손을 잡고 프랑스의 괴뢰국인 베트남국 성립에 가담한다.물론 그렇다고 베트남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프랑스에게 마냥 순종적이었냐 하면 절대 아니었다.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친불 매국노 숙청을 부르짖었고, 이에 맞서 친불 성향의 군부는 공공연히 민족주의자들에 대항한 쿠테타 위협을 하고 있었다.베트남국의 마지막 괴뢰 황제 바오다이는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한다.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베트남국의 친불 군벌들을 배척하기 위해 민족주의 우익 군벌들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친불파들을 날려버리고 바오다이마저 국민투표로 끌어내린다.그렇게 프랑스는 기껏 만들어둔 괴뢰국마저 응오딘지엠과 민족주의 군벌들에게 빼앗긴다. 우리가 잘 아는 남베트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2. 새로운 공화국의 설립과 권력 투쟁[베트민, 프랑스군 둘 다와 맞서싸웠던 저명한 우익 독립군 지도자 ‘찐민테(정명세)’]마침내 프랑스를 축출한 응오딘지엠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무엇인가 하면 같은 우익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하고 절대권력을 잡는 일이었다.1955년, 과거의 독립군 겸 수도 사이공의 물류와 치안을 독점한 조폭 군벌로 세력을 떨친 빙쑤옌을 토벌한 응오딘지엠은 자신을 지지했던 우익 민족주의 군벌, 정치인들을 전부 숙청해나가기 시작했다. 까오다이, 호아하오 같은 불교 계통 종교는 인정되지 않았고, 오직 가톨릭만이 강조되었으며, 국가는 응오딘지엠의 친인척이 장악했다.새로운 공화국의 군대로 편입될 거라 보장받았던 반불 우익 독립군은 전부 밀림으로 쫓겨나 내부의 적이 되었고 응오딘지엠은 빠르게 정치적 명분을 상실해나갔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항불 무장 투쟁 경력도 있고, 공산주의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이들 군벌들이 죄다 숙청되고 오직 ‘응오딘지엠에게 충성하는가’로 군부 고위직이 가려지다 보니 남베트남 군대가 극도로 약화된 것이다.거기에 더해 빨갱이를 잡는다며 온갖 종류의 백색 테러를 자행하고, 수 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을 감옥에 집어넣으며 공포통치를 자행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내부적으로 큰 실망만 사게 된다.3.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다: 토지개혁 대참사그래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대항해 반공 민족주의를 형성할 기회는 있었다. 바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이 중요한 토지개혁을 말아먹고 말았다.일단 응오딘지엠은 독립운동을 하기 전, 1930년대에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괴뢰국화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관료로 일한 바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행정능력 자체는 우수했고, 실제로 남베트남에 여러 고무공장, 유리 공장 등이 들어서며 (그 난리통에도) 자체적인 발전을 시작하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공업화를 추진한다 한들, 당장 인구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민이었다. 당시 남베트남은 0.025%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지주가 40%의 농지를 차지했다. 서둘러 이것을 분배해 소작농의 지지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새로운 토지 개혁 법안에서 1인당 토지 보유 한도를 100ha로 하는 찐빠를 내버린다.(한국의 토지개혁은 1인당 토지 보유 한도를 3ha로 잡았다)당연히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고, 거기에 더해 지방 관료와 기득권 층의 저항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개혁은 시행도 못하게 된다.응오딘지엠은 이런 난국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여 농민을 이주시키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것은 토지개혁보다는 효과가 있었지만 농민의 근본적 불만을 해소할 순 없었다.결국 양극화된 농촌은 베트콩의 소굴로 전락했다.4. 쿠데타의 연속과 패망[남베트남의 마지막 총통 즈엉반민(양문명)]가톨릭만 강요하며 인구 대부분인 불교도를 탄압하고, 농지개혁에 실패해 민심 이반을 초래하고, 민족주의 군벌을 죄다 날려먹어 군사력 약화까지 초래한 남베트남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어버렸다.베트콩들에게 수도 사이공 인근까지 털리는 걸 본 미국은 결국 군사적 개입을 하게 되었고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남베트남의 극심한 민심 이반, ‘중놈 바베큐’ 발언으로 유명한 퍼스트 레이디 쩐레쑤언으로 대표되는 대책없는 지도층을 본 미국은 학을 뗐고, 결국 즈엉반민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군의 쿠데타를 묵인하게 된다.응오딘지엠을 날려버리면서 미국은 다소 안심한 듯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남베트남의 패망을 앞당겨버렸다. 그나마 미국 눈치 보지 않고 독자적인 정책을 시행할 남베트남의 저명한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총살당하자 남베트남은 진짜 미국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괴뢰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더해 응우옌 반티에우와 같은 또다른 군인들이 권력 좀 잡아보겠다고 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 년동안 쿠데타가 너무 자주 반복되어서 이 시기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따지는 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그리고 미국은 전쟁을 확실히 끝낼 수단이 없었다.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으로 북진하기엔 중국의 참전이 걸렸고, 대책없는 남베트남의 상황 때문에 무한 리스폰되는 베트콩만 밀림에서 죽어라 소탕하던 미국은 결국 남베트남에서 손을 떼게 된다. 전쟁이 극도로 길어지면서 미국인들이 극심한 피로를 호소한 것이었다.결국 남베트남 정부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떠났다. 북베트남이 드디어 정규군을 동원해 대공세를 감행하자 남베트남은 단 한 달만에 붕괴되었다.아이러니하게도 남베트남의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은 응오딘지엠을 총살한 첫 쿠데타 시도지 즈엉반민이었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스압] 네덜란드판 이순신, 미힐 더 라위터르를 알아보자.
이번에 전설함장에 네순 9티어까지 뽑는 등 네덜란드 트리 진행이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몇년전부터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쓸까 말까 고민을 엄청했다. 뭔 명분이나 건덕지가 있어야 시너지가 나서 적을거 아냐. 이번에 그 명분이 제대로 이루어진게 그 기회라고 생각해서 이제껏 구상만 하던 사안을 현실화해보고자 한다. 조선의 이순신 제독과 매우 유사한 삶을 걸어온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해상 영웅, 미힐 더 라위터르를 소개한다. 先 3줄 요약 1.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하던 시기 2. 미힐 더 라위터르가 캐리해서 네덜란드를 구한다. 3. 근데 인생을 쭉 훑어보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비슷함. https://youtu.be/CCzdQ_TLdl0?si=8dSNy_QQp2zoVtMx Koninklijke marine (defileer mars)Defileer mars der koninklijke marine, Defilation March of the Royal Netherlands Navy fleet.youtu.be 미힐 더 라위터르 1607. 3.24. ~ 1976. 4.29. 1. 배경 먼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영국-네덜란드 왕실의 가계도를 살펴보아야한다. 우리가 주목해야할건 빌럼 3세인데, 영국왕가와 네덜란드 왕가가 빌럼 3세, 훗날 윌리엄 3세로 영국 왕과 네덜란드 총독의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두는게 좋아. 1630년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무려 80년동안 독립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네덜란드는 국토 서부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되찾고 프랑스와 분할하기 위해 분전했지만 육상에선 고전하게 된다. 반면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이후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네덜란드는 해상 주도권을 잃지 않았으며, 이때 네덜란드의 마르텐 트롬프 제독이 스페인의 함대를 상대로 영국 켄터베리에서 대승을 거두며 명실상부 제1의 해상 강국이 된다. 일찍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깨부순 영국이 이 광경을 보게되는데, 자기보다 훨씬 작던 네덜란드가 전 세계에서 자기들 동인도 회사보다 무역으로 잘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혔겠냐? 그동안 네덜란드의 총독 빌럼 2세가 요절하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빌럼 3세를 대신해 네덜란드 주의회는 의장(수상)인 요한 더 비트가 통치하게 된다. 요한 더 비트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니 나중에 또 나온다. 빌럼1세 이후로 오라녀 가문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닌, 의회가 통치하는 혼란기가 오게되자 당시 영국의 호국경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홀란트 주의회에 동맹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심기가 상한 영국은 이때다 싶어 1651년 영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건은 영국 선박만 이용해야한다는 '항해조례'를 발표하며 해상무역을 독점하려하고 네덜란드가 반발하게 되며 1차 영란전쟁이 일어난다. 2. 유년기와 청년기 플리싱언에서 맥주 운반공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 교회 종탑에 올라가길 좋아했던 사고뭉치 꼬마로 유명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사략 권리가 있는 무역선에 승선하여 선원생활을 하게 된다. 15세에 마우리츠 오라녀의 군대에 합세해 독립전쟁에 기여했는데, 이때 말을 타고 다녔기에 'De Ruiter(기수)'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때부터 미힐은 '더 라위터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육지에서의 모험을 마치고 다시 바다로 돌아온 그는 포경(고래잡이), 네덜란드 해군 소장 신분으로 포르투갈 독립전쟁에 파견, 모로코와 카리브해를 떠돌며 무역을 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무역 중엔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키기도 했다고. 1650년 43살의 나이에 바다와 작별할만큼 부를 축적한 그는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역사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3. 마르텐 트롬프 제독의 후임 1차 영란전쟁 시기 영국에 맞서 상선을 싸움배로 전환하여 해군의 확장을 꾀했던 네덜란드. 유능한 선원이 필요했고 이때 풍부한 해상 경험을 가졌던 더 라위터르를 영입하려했으나 편안한 여생을 보내려했던 라위타르가 거절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가 해군 중장에 임명하는 등 간곡한 요청 끝에 수락하여 참전한다. 1652년 플리머스에서 승리하며 '질랜드의 바다사자'라는 별명을 얻는 등 27번의 해전에서 싸우며 대부분의 해전에서 확실히 승리했다. 그러나 1653년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트롬프 제독이 전사한다. 네덜란드의 전략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전투에서 영국이 많은 전력 손실을 입고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트롬프 제독을 잃고 전의를 잃은 채 웨스트민스터에서 항해조례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는다. 그동안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해상무역 독점을 노리는 영국. 북미의 뉴 암스테르담(뉴욕)을 점령하며 도발하고 항해조례를 연장하는 등 갈등이 커지며 2차 영란 전쟁이 발발한다. 2차 영란전쟁 초기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는 전력의 1/3을 상실하는 어마어마한 패배에, 해군 총사령관 이었던 오프담 제독마저 잃는다. 전설적인 제독을 잃은지 얼마되지 않아 최악의 참패까지 겪은 네덜란드. 지휘부에 공백이 생겼으니 후임이 필요하겠지? 당시 네덜란드는 빌럼3세를 지지하던 왕당파와 요한 더 비트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파로 나뉘었다. 왕당파는 마르텐 트롬프 제독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트럼프를 추천했으나 공화파, 특히 요한 더 비트는 미힐 더 라위터르를 상급중장의 계급을 수여하며 해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대장은 왕족만 가능해서 중장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으로 예우한 것. 4. 해군 재건, 그리고 혁신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17세기 전반에 걸쳐 번영을 누리던 해양강국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 네덜란드. 다행히도 요한 더 비트는 매우 유능한 수상이었다. 해군력 강화에 몰두하며 국채 금리를 5%에서 4%로 내리는 등 군비를 마련했고 신규 군함도 대거 건조한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해군력 복구를 넘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함대를 만들어낸다. 최고 지휘관이 된 라위터르는 현명하게 혁신을 꾀했다. 함대를 현대화하고 색상 깃발을 활용하여 신속한 통신이 가능하게끔 훈련했다. 이런식으로 개별 선박이 하나의 단위로서 기능하게끔 만든 것이다. 또한 해병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당시는 해전과 육상전이 분리되었는데 라위터르는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싸울 수 있는 부대가 큰 전략적 이점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5. 4일 전투와 메드웨이 기습: 전설의 시작 로스토프트의 참패를 딛고 라위터르는 4일 전투에서 영국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전쟁을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데.. 바로 메드웨이 기습이다. 당시 영국은 업노어 성의 요새와 템스강에 쇠사슬을 설치해 안전을 꾀했는데, 라위터르가 육성했던 해병대가 쳐들어가 사슬을 끊고 영국 배들에 불을 지르고 템스강을 봉쇄해버린다. 게다가 영국의 기함이었던 '로열 찰스'까지 나포하는데 당시 국왕이 찰스 2세였으니 그 이름을 딴 배를 상실하게된건 엄청난 치욕이었다. 영국은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까지 겹치게되며 버틸수가 없었고 브레다 조약을 체결하며 1667년, 2차 영란전쟁은 끝나게 된다. 6. 요한 더 비트의 죽음, 그리고 최후 영국은 굴욕적인 평화를 이루었기에 복수를 원했다. 1672년 영국은 프랑스, 쾰른, 뮌스터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공격한다. 당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의 무역독점 타파를 빌미로한 침공의 목적도 컸고. 육지에서 프랑스의 육군에 속수무책으로 털리던 네덜란드. 전쟁이 길어질수록 요한 더 비트의 공화파는 힘을 잃으며 민심이 나락으로 가다 결국 총리직을 사임한다. 게다가 요한의 형인 코르넬리스 더 비트가 왕인 빌럼 3세를 암살하려했다는 빌미로 체포당해 재판에 넘겨지는데, 요한이 항소를 제기하려고 법정에 가자 맞이한건 분노한 민중들이었고.. (혐주의) 군중들은 더 비트 형제를 때려죽이고 시신을 훼손, 심지어는 장기 일부를 먹어버리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 요한이 네덜란드의 군주제를 없애고자 노력했기에 왕당파가 손을 써버렸다는 주장이 강하다. 권력은 왕인 빌럼 3세에게 넘어간건 덤. 자신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후원자가 끔살당하는 엄청난 일을 겪은 슬픈 시기에 어찌됐건 빌럼3세는 라위터르에게 침략자를 막으라 명했다. 라위터르는 솔베이 해전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국의 추가 상륙을 저지하고 텍셀해전에서 60여척 vs 100여척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며 영란전쟁이 어느정도 마무리짓게끔 한다. 이 승리로 민중들은 국왕인 빌럼 3세보다 라위터르를 더욱 지지하게 되고. 네덜란드는 외교적으로 3차 영란전쟁을 끝내려 하는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영국과도 어느정도 화해한다. 빌럼 3세는 더이상 권력이 이동하는걸 원치 않았기에 정적을 제거하기로 한다. 스페인 함대 지원 명목으로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와 싸우라고 파견을 보낸 것. 스페인 함대의 지원도 없이 분전하던 라위터르는 포격에 다리를 잃고 시칠리아 남부의 시라쿠사로 이동하지만 공격을 받은지 일주일 후 감염으로 사망한다. 향년 69세. 그의 장례는 장엄한 국장으로 치뤄졌고 암스테르담에 잠들어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조국을 구했으나 정치적으로, 특히 왕의 질투로 온갖 고난과 전장에서 최후를 맞는 것까지,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과 굉장히 비슷한 운명의 위대한 제독을 기리며 네순을 타보는건 어떨까? 정말 긴 내용인데 읽어줘서 고맙다. 여담 1. 드 제번 프로빈시엔(일곱개의 주)은 라위터르의 기함이다. 지금은 두 이름 모두 네덜란드 해군의 함명으로 사용된다. 2. 라위터르를 사지로 내몬 빌럼 3세는 어떻게 됐냐고? 맨 처음에 언급했듯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왕위를 모두 먹음으로써 동군연합을 이뤄 길고 길었던 영-란 갈등을 끝내는데 일조한다.
작성자 : Al_Capone_ScarFace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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