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전 강원지사는“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나타나 나라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지금 국민에겐‘파격’보다는‘경험’을 바탕으 로 예측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지도자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강훈의 와일드 터치]이광재 前 강원도지사
23일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FTA·용산미군기지 이전…
필요한 정책은 욕먹으면서도 추진
자기 주장 워낙 강한게 흠
이명박 대통령 대해
여론조사로 보면 40점 쯤
서민경제 살리는 데 주력했으면
지난달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낙승이 예상됐던 엄기영 한나라당 후보가 최문순 민주당 후보에게 졌다. 최 후보는 소감을 밝히며 "이광재의 승리"라고 했다. "죽은 이광재가 산 엄기영을 눌렀다"는 풀이도 나왔다.
이광재(李光宰·46).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1등 공신으로 37세에 정권의 이인자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강원지사가 됐으나 7개월 만에 \'박연차 게이트\' 유죄 선고로 지사직을 잃었다. 10년간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도 강원도는 그가 민 최문순 후보를 택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광재를 만났다. 작년 지사 출마를 위한 그의 첫 \'작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라 했다. 그는 3시간 반 동안 인터뷰에서 \'중도\'와 \'운명\'을 역설했다.
그는 "대통령은 진보·보수에 관계없이 중도의 길을 가야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다"면서 "참모는 입이 없기에 참았고, 도지사가 잠깐 되어 도정(道政)을 밝힌 적은 있으나 속내까지 털어놓는 인터뷰는 처음"이라 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인간과 조직은 변화하고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23일은 그가 22년간 모셨던 노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이다.
◆"내가 진짜 강원의 아들"
―최문순 후보가 불리할 줄 알았는데.
"선거 보름 전 여론조사에선 최 후보가 20% 지는 것으로 나오더라. 그러나 장터를 돌면서 봤더니 그게 아니었다. 이기는 게임이었다. 작년 도지사 선거에서 이계진 후보와 내가 붙었을 때도 여론조사는 불리했지만 8%가 넘는 차이로 이겼다."
―최 후보 선거를 적극 도왔다고 한다.
"아내뿐 아니라 아버지·어머니가 최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해 뛰었다. 최 후보 캐치프레이즈 중엔 \'최문순이 당선돼야 이광재가 부활한다\'도 있다."
―지역구(영월·평창·정선·태백)에선 \'우리 광재\'라고 부른다던데.
"과분한 사랑이다. 강원도엔 오랫동안 김영삼·김대중씨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 나에게 그런 인물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도지사 중에 최연소였고 청와대 참모와 국회의원 2선 경력까지 있다 보니 잘 봐주셨나 보다."
―지난 정권 시절 강원도에 예산을 많이 따왔다고 하더라. 실세라서 가능한 것 아닌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대뜸 장·차관에게 전화 걸어 부탁하고 그러지 않았다. 정부 실무 과장과 사무관을 만나 설득했다. 그들을 움직여야 예산을 딸 수 있다."
―대선뿐 아니라 본인이 나선 두 차례의 국회의원과 도지사 선거에서 이겼고 이번엔 최 후보까지 당선됐다. \'선거의 달인\' 소리도 들을 법한데.
"정치인들은 마이크 잡고 자기 말을 전달하려고만 한다. 그게 문제다. 정치인은 경청(傾聽)하는 자리다. 마을회관 가서 자고 어촌계에서 직접 들어보라. 선거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열정과 의지로 하는 거다. 정치는 업종으론 서비스업이요, 업태로는 유통업에 가깝다. \'희망 바이러스\'를 유권자에게 퍼뜨리는 게 선거다. 아, 내가 진짜 강원의 아들이다."
―무슨 의미인가?
"아버지 함자가 \'이\'자 \'강\'자 \'원\'자다. 그러니 강원의 아들이 맞지.(웃음)"
―형제는.
"1남 6녀 일곱명 중 둘째다."
―모범생이었나.
"평범한 시골아이다. 축구를 좋아해 한 달에 한 번 운동화를 바꿨다. 다소 내성적이어서 고향 친구들은 \'정치인 될 줄 몰랐다\'고 한다. 교수 될 줄 알았단다. 정선에서 초등학교 다녔다."
―집안 형편은?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다.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연극 하는데 만날 \'포졸\'만 시키더라. 나중에 어머니가 정미소를 차려 집이 잘살게 됐더니 여동생은 \'왕비\'를 하더라. 중학교 때 도회지(원주)로 전학 갔다.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무슨 책이 그렇게 많으냐. 문화적 충격이 컸다. 매주 그 집에서 책 빌려 서너 권씩 읽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노 전 대통령과는 언제 만났나.
"학생운동 하던 1988년 시인 강은교씨의 남편인 고(故) 임정남씨의 소개로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원실을 꾸릴 때였고 난 스물세 살이었다. 최도술씨를 제외하곤 나머지 보좌진 선발을 내게 맡겼다."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봤나?
"1992년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에게 졌다. 당시 민주당 기획실에서 선거를 도왔다. 호남 인구가 적어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때였다. 그때 결심했다. 김대중은 낙선했지만 노무현은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노 전 대통령이 어떤 인상을 줬기에.
"신촌 여관방 잡아서 5공 청문회 준비할 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보좌진이 준비해놓은 방대한 자료를 큰 전지 한장에 도표로 담아냈고, 이것을 다시 A4용지 2장으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상고 나오고도 사법고시 된 데는 바로 저런 머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지도자라면 연설문도 직접 써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쉽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 바로 그분이었다."
―2002년 12월 결국 대통령 꿈은 이루어졌다. 그날 기분이 어땠나.
"당시 12월 18일과 19일은 예측 불허의 날이었다. 후보 단일화로 승산이 높아졌다가 하루 전날(18일) 정몽준씨가 노 후보 지지를 철회했다. 18일 낮만 해도 대선 캠프에 사람들로 북적댔는데 그날 밤부터 19일 아침까지 사람이 썰렁하더라. 선거 당일 아침 캠프에 5명 앉아 있었다. 밀물 썰물과 같은 정치의 비정함이라고나 할까. 하도 허탈해 제주도에 다녀오려고 김포공항 가는데 노 후보의 전화가 왔다. \'오늘 뭐 하는 게 좋겠냐\'고 묻더라. 더할 게 뭐 있느냐, 고향 선산에 가셔서 절이나 하고 올라오시라고 했다. 또 전화가 왔다. \'비행기 내리면 기자들에게 뭐라고 할까\'라고 하기에,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이렇게 말씀하라고 조언했다."
―그 다음엔?
"오후 4시쯤 문재인 실장이 찾더라. 판세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이길 것 같다고 했다. 전화를 바꿔 받은 노 후보가 자세히 물었다. 그래서 오전 출구 조사에서 1~2% 밀렸지만 점심시간 지나면서 격차가 줄어드는 추세에다 부재자 숨은 표를 고려하면 우리가 최종 1~2% 차로 이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날 밤 당사는 다시 인산인해였다. 나는 물론 후보조차 엘리베이터에 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천당과 지옥, 세상인심 지독하게 체험한 이틀이었다."
◆30대에 최고 실세가 되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되었는데.
"처음엔 청와대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정치권의 집중 타깃이 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돌이켜 보니, 당시 내게도 자리 욕심이 있었나 보다. 결국 청와대로 간 것을 보니."
―38세에 불과했지만 정권 이인자로 통했다. 현 정권 초기 \'왕비서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박영준 비서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실세가 아니었나?
"그건 언론의 과도한 표현이었다. 청와대는 수석 체제로 움직였고 실제로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온라인 보고가 많았다."
―8개월 만에 청와대를 떠났는데.
"우려했던 상황이 닥치더라. (나를 겨냥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는 세력이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만두기로 하고 청와대 관저를 찾았다. 권 여사께서 \'광재씨가 안 온다고 할 때 놓아줬어야 하는데\'라고 위로하셨고, 대통령은 크게 화를 냈다. 계속 일하라는 것이다. \'더 있어봐야 대통령께 절대 도움이 안 된다. 다신 안 돌아오겠다\'고 하고 물러나왔다. 측근의 숙명이었다. (※2003년 10월 국정상황실장에서 물러난 이광재는 다음해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좌희정 우광재\'라는 말이 회자됐다. 안희정씨는 그러나 2003년 대선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두 실세의 운명이 엇갈렸고, 그래서 이 전 지사가 더 주목받은 측면이 있다.
"희정이에게 늘 빚졌다고 생각한다. 희정이는 선거의 \'살림\'을 맡았고 난 기획을 담당했다. 내가 살림을 맡았다면 내가 구속되었을 것이다. 1992년 희정이를 노무현 대통령 곁으로 데리고 온 것도 나였다. 희정이가 충남지사가 됐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
―\'노의 남자\' 중엔 이광재·안희정 외에 유시민·김두관·문재인씨도 있다. 이들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아낀 사람은 누구였고, 누가 정치적 후계자가 될 것으로 보는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다 장단점이 있는데."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7년 청와대 관저에서 이광재 전 지사의 가족과 사진을 찍었다. |
―이 전 지사와 정치궁합이 잘 맞는 사람은.
"당연히 희정이다. 밖에선 온갖 추측 나도는데 둘 사이가 나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 지사와는 나중에 경쟁관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난 김부겸(민주당 의원) 선배에게도 대통령 꿈을 가지라고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스스로 훈련을 하게 된다고. 임종석 전 의원에게도 그랬다. 송영길(현 인천시장) 선배에겐 큰 꿈을 위해 먼저 수도권 자치단체장에 도전하라고 했다. 다른 나라를 봐도 정치인보다 단체장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유권자들이 \'실적\'을 보고 후보를 택한다는 것이다. 난 희정이에게 JP 같은 이인자가 아니라 충청도가 배출한 일인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호남의 송영길, 영남의 김두관, 강원의 이광재가 모두 나와 경쟁하는 그런 날이 오지 말란 법 있느냐. 한나라당의 오세훈 원희룡 남경필 같은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꿈을 꿔야 준비한다."
◆"386세대 2017년쯤 집권할 것"
―여야를 떠나 386세대 정치인은 동질감 같은 게 있나?
"대학 77학번에서 87학번까지는 에너지가 충만한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이자 학력고사 세대로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등 격변기를 겪었다.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세대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아마 2017년쯤으로 예상한다."
―왜 2017년인가?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 김대중 대통령도 JP와의 연대, 노무현 대통령은 정몽준과의 연대를 통해 대권을 차지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좌파\'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치고, \'개혁\'이라는 말 한마디에 절대 추종하는 층이 있다. 여기에 지역 갈등이 더해진다. 이걸 한꺼번에 용광로에 담아 녹일 수 있는 지도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독자적 힘보다는 연대를 해야만 집권할 수 있다고 본다. 오세훈, 원희룡, 송영길, 안희정 등의 쟁쟁한 승부는 그다음에 펼쳐질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내년 민주당 대선 후보는 누가 될 것으로 보는가?
"그걸 누가 알겠나."
―누가 되었으면 좋겠나.
"손학규, 문재인, 정동영, 정세균 이런 분들로 경선구도가 만들어진다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특히 중도와 진보 색깔이 섞인 손학규 대표나 문재인 실장 같은 분이 의미 있게 등장해주는 게 좋다."
―한나라당은 어떤가?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고, 이후에도 최선을 다했다. 박 전 대표는 그 순간부터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기 포지션을 가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으로 보는가?
"그렇게 되지 않겠나."
―이명박 정권에 몇점을 주고 싶나.
"숫자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여론조사를 보면 한 40점쯤 받고 있는 것 아닌가."
―현 정권 임기가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뭘 조언하고 싶나.
"서민경제 살리는 데 주력했으면 한다. 경색된 남북관계도 풀어줬으면 좋겠고. 대통령의 출신이 진보 진영이라 해서 진보 정책 하고, 보수 진영이라고 보수 정책으로 기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중도로 가야만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에 서명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미소금융 내놨다. 만일 노 대통령이 서민들 위한다고 미소금융 도입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지난 정권 얘기를 들어보자. 노무현 정권은 무엇을 잘했나.
"무엇보다 돈 안 드는 선거, 정치 개혁 이뤘다. 과거 선거 때면 조 단위로 돈이 움직였고 재벌 총수들은 외국으로 도피했다. 이젠 그런 게 사라졌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보통 사람과 호흡할 수 있는 자리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졌다. 권위주의를 철폐한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자기 지지자와 싸워가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FTA, 용산 미군기지 이전, 사패산 터널 등 욕먹었지만 필요한 정책이라면 기꺼이 했다. 자기 지지자 잃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중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대통령이란 자리다."
―그렇다면 잘못한 점은 무엇인가
"노 대통령이 어느 날 (한나라당과) 연정해야겠다고 하더라. 야당과 매일 싸우는 것보다 권력 나눠주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게 낫지 않으냐는 것이다. 필요하면 중임제 개헌하고 자신 임기 1년 줄이겠다고도 했다. 물론 이 논의는 파묻혀 버렸다. 정권기간 내내 매일 아침 대변인을 동원한 싸움판이 벌어졌다. 그 지긋지긋한 정치판을 종식시켜야 했는데 이루지 못했다.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노 대통령은 부당한 건 참지 말자는 주의였다. 자기주장도 워낙 강했고."
―참모들도 책임 있는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원래부터 말을 쉽게 전달하려고 반어법과 비유를 자주 사용하고 직설적이었다. 천성을 고치라고 조언하는 게 어디 쉬운가."
◆많은 사건과 의혹
이광재는 지난 정권 시절 특별검사로부터 두 차례 조사받았다. 2003년 썬앤문 게이트, 2005년 철도공사 유전게이트에 연루되었다. 문병욱 썬앤문 그룹 회장 등에게서 2002년 대선 당시 1억500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선고됐다. 유전게이트에선 이 전 지사에 대한 수사가 보류됐으나, 김세호·신광순씨 등 주요 관련자들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사실상 무혐의로 종결됐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 수사를 한 박연차 게이트 사건 때는 5개월간 구속되었고,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두 정권에 걸쳐 조용한 날이 없었다.
"특검 두 번 받은 사람 나밖에 없을 거다. 그간 검찰에서 9차례 내사와 수사했다는 보도도 있더라. 썬앤문 사건 땐 \'95억 수수설\' 등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1억원 대선 자금은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했고."
―두 사건은 그래도 잘 버텼다. 박연차 게이트는 피할 수 없었는데.
"할 말이 많았지만 법원이 들으려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산 높으면 계곡 깊다는데. 어쩌겠나, 모두 운명일 뿐이지."
―작년 재판 계류 중에 출마했다. 유죄 확정되면 지사직 박탈되는데도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무죄를 확신했다. 어찌 됐든 강원도민에게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정치적 탄압이라고 보나.
"한나라당 의원은 증인 불러주고 난 안 불러주고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 그러나 누구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이 상황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나."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
―10년간 출마 못한다. 강원도민들에게 대통령으로 키워달라고 하지 않았나. 재기할 생각은 있나.
"모든 사람에게 위기가 기회가 되는 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세속적으로 할 수 있는 자리는 다 해봤다. 다만 일에 대한 욕심만 남았다. 당분간은 \'시련\'과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다. 운명이 있다면 재기의 기회가 올 것이고 아니면 재기하지 못할 뿐이지."
―늘 그렇게 낙관적으로 사는가?
"인간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닌가. 잊힐까 두려워할 필요 없고 돈 없는 거 비교할 필요도 없다."
―좌파라는 말이 듣기 싫은가?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 맞는 최적의 방정식을 찾는 게 최선이다. 오류 없는 인간과 조직이 어디 있나. 오류 빨리 발견하고 극복하고 노력하는 그게 바로 진화이고 발전이다. 이데올로기 같은 거 믿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 측근 일부에선 \'변절자\'라고 하더라.
"(한참 생각하다)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 있다. 노 대통령은 사상가적 측면이 강하지만 구체적 방법을 택할 때는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나도 현실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신과 다를 수 있다. 그때 얼마나 공정하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 차이가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아선 안 된다. 이광재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비판을 달게 받겠다."
―실업자가 되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도 바쁜가.
"강원도가 추진하던 사업을 계속 도울 계획이다. 백의종군이다. 연세대 객원교수로 출강도 하고 내년엔 중국이나 미국 연수도 계획하고 있다."
―23일 노 전 대통령 2주기 추도식이 있다.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분양하러 중국 갔다가 22일 들어온 뒤 다음날 봉하마을로 간다. 노 대통령과의 인연과 숙명은 잊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이제 고인이 된 분이다. 더 이상 정치적으로 색칠당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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