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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의 발자취

QQQ(221.157) 2008.08.01 21: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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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
2006/07/17 오후 11:33 | 교회건축이야기(카톨릭)

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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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ASE         target="_son">흑백사진은1899년 축성된 한국식 십자형 목조성당. 1901년 2월4일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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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290호로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소재한 계산성당의 모습. 영남 최초의 고딕 건축물.
이곳에 있던 목조 기와집이 1900년 화재로 소실되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A.P.로베르(한국명:김보록)신부가 설계하고
프랑스, 중국 등지에서 건축기술자들을 초빙하여1902년 5월에 완공하였다. 1918년 12월 증축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쪽 정면에 종탑기능의 2개의 8각형 첨탑을 세워 건축물의 수직성을 강조했고, 현관과 측랑 위쪽에 있는 꽃무늬창은 한국의 건축양식상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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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대구대교구의 주교좌 계산동성당. 지난 1886년 대구 경북 지역의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본당)으로 첫발을 내딛고 1911년 조선교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된 계산동성당은 그간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러나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전신인 대구본당이 처음부터 계산동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자리잡은 곳은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경북 칠곡군의 신나무골. 1886년 당시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본당이 설립된 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한국명 김보록, 재임 1886∼1919)가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은 대구 읍내에서는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신나무골에 본당 거처를 임시로 잡았던 것이다.
그 후 본당은 대구 지방관리와 불량배들의 박해와 음모 등에 휩싸이면서 1888년과 1891년 두 차례에 걸쳐 새방골(현 대구 상리동 일대), 대어벌(원대동 일대)로 거처를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 한국식 팔각 기와 지붕을 이은 목조 십자형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한다.
2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1899년 루르드의 성모를 본당 주보로 모신 가운데 축성식을 거행한 로베르 신부는 당시 감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대구에서 이런 축제를 한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제대 위의 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성당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다시 1년간의 공사 끝에 1902년 세운 성전이 영남 최초의 서구식 성당인 오늘날의 계산동성당이다.
설계를 맡은 로베르 신부는 신축을 위해 전주 전동성당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색유리와 철물 등 공사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 주문한 뒤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진척시켰다.
그 후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당 내부에 주교 강론대와 제단을 만드는 공사를 했고,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전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종탑에는 두 개의 종이 있는데, 이를 헌납한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김 젤마나의 세례명을 빌려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불리고 있다.
계산동성당은 건축적으로 고딕식 벽돌조 건물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서쪽 정문에 세운 2개의 종탑부에는 8각형의 높은 첨탑을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 모양의 창문으로 장식돼 있다.
근대 초기 성당은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지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마을이나 전 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계산동성당은 이와 달리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처음 성당 부지 물망에 올랐던 자리는 현재의 동산동 일대였는데, 황무지인 허허벌판 언덕에 성당 자리를 잡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논란을 거듭하다가 대구 읍내 평지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지난 1981년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계산동성당은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벽돌로 이뤄진 성당 외벽은 물론 성당 내부 바닥의 부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계산성당 설립 당시 흙 모래 석회를 섞어 깔아놓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는 신자들을 고려해 바닥 위에 마루를 깔았으나 마루 밑의 환기 공간 부족으로 부식이 심화됐고, 이를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 장판마저 썩어 들어가자 보수를 단행, 바닥 원형은 보존한 채 대리석을 대신 깔았다.
또 세파에 시달려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다. 1914년 세워진 유스티노 신학교 건축 당시 벽돌이 계산동 성당 벽돌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1886년 본당 설립 이후 116년간 달구벌의 신앙 터전이 된 계산동 성당. 새빨갛던 벽돌이 비바람에 씻겨 주홍빛으로 바랬지만 웅장함은 그대로 간직한 채 흔들림 없이 건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아직도 교구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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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2월 제7대 교구장(조선교구장) 백주교께서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불란서의 김보록 바오로 신부(Achille Paul Robert)를 임명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나무골에서 3년간 은신 전교하셨다.
1886년 한불조약 후에 신앙의 자유가 넓게 허용되었다. 그래서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읍내의 교회 진출을 위해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대구시 서구 상리동)로 옮겨 3 년간 은신 전교하면서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각급 교우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와서 성밖 대야불 정규옥 승지댁에서 7년 동안 전교하면서 영구적인 본당을 설치할 부지를 물색하던 중 1897년 3월 김보록 신부는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동산 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신자들 특히 노인층 신자들은 현 계산성당 자리가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구릉 지대이며, 허허벌판 지대에(당시 황무지) 성당 자리를 잡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 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십자형 성당의 건립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신자들이 성전 건축과 신부의 새 사제관[사랑]을 짓기 위해서 한결같이 보여준 열성으로 3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과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海星齋) 건물 등을 건축했다.
사제관인 신부 사랑은 2층으로 지었으며,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고용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 그런데 성당과 사제관을 단청한 스님들 중 2명이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서울에 세워진 약현(중림동)성당, 종현(명동 1898)성당, 인천 답동(1896)성당 등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 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동양 건축이었다. 1899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십자형 성전의 화재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에 1900년 2월 4일 밤 8시경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십자형 성당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때의 화제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했던 김보록 신부의 서한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틀담(성모 마리아)의 루르드 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 화 하였다.
지난 2월 4일, 5일 밤사이 나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즉시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까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른 뛰어가 성당 옆문을 박차고 성가대석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발을 들여놓자 불길이 번져 황급히 물러나 마당 밖으로 나와 쓰러졌다. 얼굴은 반쯤 화상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잠시 후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조선 군대와 일본 군대도 달려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건물 내부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근처에 있는 집은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성전은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14m 떨어져 있는 해성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은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러들었다. 화재는 지진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지난 2월 4일 오후 8시에 대구에서는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제대 위에 세워 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25전 교난에 휩싸인 조선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는 작지만 아담한 성당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제의도 일상복도 생활필수품도 없으며, 고해를 듣기 위한 영대와 중백의 조차 없다.
1천명이 넘는 신자들이 주일날 미사에 참석하는 데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두 번째 성당을 짓기 위한 건립 기금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가 건물이라도 세워야겠다. 한국식 십자형 성당은 이미 너무 협소해서 더 크게 석재로 지을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믿음에 자비를 구하면서 나는 다시 성전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
고딕식 새 성전을 다시 건립함 본당 설립 후 14년만에 어렵게 건립된 십자형 성당이 이렇게 화재로 소실되자 모든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김보록 신부만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 한지 1주일이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 그 내용은 "천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신데, 이는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인 줄로 받아들이고, 다시 성당을 더욱 잘 짓기로 한 마음으로 협력합시다."라고 했다.

김보록 신부는 교회 중진의 협력으로 벽돌로 내화구조와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현재의 계산동 성당은 1901년에 착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축조의 경험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 와서 일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들의 기술도 신통한 것이 아니었다.
12사도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함석 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는 불란서 본 국에다 주문하여, 착공한지 1년만인 1902년 5월에 양식성당을 준공하였고, 1903년 11월 1일(모든 성 인의 날)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도 찾기 힘든 정면 쌍 탑의 고딕성당이다.
구조와 세부상세는 오히려 로마네스크양식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 3랑식 열주의 아케이드(Aceade)를 이루고 천정에 의해 네이브(Nave)와 아일 (Aisle)의 구획이 뚜렷이 되어 있다. 주현관은 서쪽 정면의 나르텍스(narthex)의 좌우 아일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차지하고 있다.
전체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는데, 회색 이형벽돌의 사용은 버트레스(Buttress)와 정면 출입구 및 창둘레,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정 리브에 집중하여 구조체와 장식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정면 중앙에 있는 박공부분의 큰 장미창과 좌우 익랑 박공부문의 창미창은 이 건물을 한층 화려하고 또한 엄숙하게 하고 있다.
그때 2개의 종탑에 달 종도 축성되는 예식이 있었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 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 지방에서는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주교좌(계산동)성당 증축공사 완공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본당이 된 대구 대성당(계산동)은 그 동안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주일과 교구의 모든 전례 행사 때마다 큰 불편을 겪었다.
그리하여 1911년 7월 2일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본당의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대목구를 봉헌하는 허원식을 거행할 때도 신학교, 수녀원, 주교관 설립과 함께 이대 성당의 증축을 소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종학 베드로와 한윤화 야고보가 총 경비 2만여원의 거액을 자진 분담하여, 종각 지붕을 배로 높이고, 성당 뒤편을 물려서 남북으로 남개를 달아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12월 24 일 준공하였으며, 새 성전의 축성식(헌당식)이 1919년 5월 11일 성대히 거행 되었다.1981년 10월에 문화공보부에서 이 성전 건물을 사적 제290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19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였다.

대보수 공사
1991년 6월 21일 성당 건립 이후 처음으로 대보수 공사가 착공되었으며, 1992년 8월 14일에 완료하였다. 이어 다음날인 199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준공 기념 미사가 있었다. 이 공사를 통하여 지붕은 함석을 해체하고 동판으로, 바닥은 목재 대신 대리석으로, 그리고 창호, 스테인드글라스, 전기 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교적 상 신자 수는 12,000여명이며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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