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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폭동의 진실 = 11년신문기사

ㅈㄷㄱㄱ(118.218) 2011.09.04 00: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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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구청신청사 사진.



5.18광주폭동 유발시킨 \'박관현 사망설\'
남민전 전사들이 양성한 전남대 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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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폭동 유발한 박관현 사망설
남민전 전사들이 양성한 전남대 운동권

작성: Daniel Kim
2011년 7월 4일 월요일 오전 4:10

5월 18일 광주사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전 11시에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광주역에 모여 30분을 기다려도 학생회장이나 학생운동권 리더가 안 보이자 모인 이유를 몰라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 하던 찰나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회장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박관현 회장은 그때 여수로 가고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두 그 유언비어에 감쪽 같이 속은 것이 광주사태가 하루 앞당겨져 일어나게 한 도화선이었다.

즉, 19일에 무장봉기 일으키기로 이미 열흘 전에 거사 계획이 짜여 있었으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18일 정오 무렵부터 폭동을 유발시켜 민중봉기가 하루 앞당겨져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날 오후 12시 30분께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재집결한 5백여명의 시위대가 곧바로 공용터미널로 향하였는데 (광주매일『正史5・18』1995, 167), 그 이유는 그 다음날인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를 위해 (전남농민대회를 명분삼아) 광주로 올라오는 전남 서남지역 운동권이 거기 모여있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대동고 고딩으로 등장시킨 영화 ‘화려한 휴가’의 줄거리는 박관현(진우)이 5월 21일 도청광장에서 계엄군 총탄에 쓰러지자 그의 형 윤상원(민우)이 복수하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박관현은 김대중이 정동년 편으로 봉기 선동 자금으로 쓰라고 전해준 돈으로 여수 돌산에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박관현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기 훨씬 전에 여수로 갔다.

1980년 5월 18일 처음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을 때는 광주 경찰이 죽인 것처럼 말이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고, 2007년에 제작된 엉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가 진우(박관현)의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시신을 어깨에 둘러멘 장면의 포스터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거의 모든 관객이 이 거짓에 속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거짓이 진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실제 역사에서는 사건이 어떤 순서로 전개되었었는지를 사건 진행 순서 그대로 살펴보자.

1. 남민전 전사들이 양성한 전남대 운동

박형선 등 광주일고 동문들의 광주사태 31주년 작품인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이 2011년 5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이란 명칭은 2011년 봄에 비로서 등장하였으나, 광주일고 동문들의 비리는 금년 봄에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박형선과 그의 처남 윤한봉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그 주동세력이었던 1980년 봄의 5.18 사건 역시 그 역사적 뿌리가 있는 사건이었다.

누가 언제 부르느냐에 따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광주사태’ 등으로 명명되는 5.18 사건은 그 주동자들이 1980년 5월18일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던 것이 아니라, 여러 해전부터 양성되고 있었다. 즉, 광주일고 동문으로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정용화와 영문과의 양강섭과 법대의 박관현 등 10여명이 이미1978년 3월부터 운동권 학습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때 박관현과 자신 등 10 여명의 전남대생들이 공산주의 서적, 즉 막시즘 원전으로 세포교육을 받고 있었음을 양강섭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때부터 민족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초보적인 학습을 했다. 지금은 좋은 책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환시대의 논리 등이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구해 산장이나 증심사 등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학습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회과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있는 중에 이른바 교육지표사건이 1978년 6월 29일 발생했다” (양강섭 1989).

광주일고 동문 정용화는 박관현 등 10 여명에게 세포교육을 시킨 자들은 이강과 김남주 등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전사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그들은 김상윤, 윤강옥, 이강 선배들이 살고 있는 두암동에서 자발적으로 형성한 그룹 단위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김선출, 김남주 등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그룹, 윤상원 등 노동현장운동을 모색하며 전단계로서 야학을 운영하는 그룹, 상대 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몇몇 사람들의 그룹 등이었다. 나도 두암동에 자주 들르는 사이 여러 선후배를 알게 되었다......1978년 3월, 1학년에 복학을 하고부터는 점차 두암동 출입을 줄이고 문리대 1학년 중심으로 10여 명을 모아 사회과학을 공부하였다. 같은 연배로서 가깝게 지내게 된 영문과의 양강섭과 법대의 박관현도 함께 하였다. 1977년부터 자발적으로 꾸려졌다. 여러 그룹들도 심화된 학습을 통해 역량이 강화되고 있었다 (정용화 1989).

그런데 전남대 운동권이 말하는 사회과학이란 막시즘 및 좌익・반미・친북 이념이었다. 세포교육으로 운동권을 양성하던 전남대의 모든 서클들이 그런 류의 이념 서적들만을 학습 교재로 사용하였다. 김윤기는 자기가 속한 서클도 이영희의 좌익서적으로 세포교육을 받았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던 중 밖에 있던 전남대 민청학련세대들 이 학생운동을 재건하기 위해 전남대학교에 재건그룹을 만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그룹에 열결되어 소그룹 학습을 했다. 우리 그룹은 예닐곱 명으로 노준현, 박병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숨어다니다시피 1년 동안 운동권 입문서 수준 정도의 서적을 가지고 학습을 했다. 지금이야 사회과학서적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당시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김윤기 1989).

박선정은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얼샘회 역시 이영희의 좌익서적과 황석영의 반미소설을 세포교육 교재로 사용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교육지표사건으로 서클회장인 신일섭 씨와 학술부장인 안길정이 구속되었다...... 문우회 멤버들이 겨울방학에 다시 모여 민족의 얼과 대학의 양심을 되찾자는 뜻의 \'얼샘회\'를 창립했다. 곧바로 겨울에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사회과학의 원론보다는 주로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베트남전쟁\' 등 기초적인 사회과학책과 문학책을 읽고 학습했다. 나는 열심히 활동하여 1979년 2학기 때 얼샘회 회장을 맡았다 (박선정 1989).

박선정에 따르면 이 얼샘회가 전남대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총학생회장도 인문사회과학대 힉생회장도 이 서클 회원이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이들이 민주주의 사상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주입시키는 좌익서적류만 교재로 사용하여 학습하였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로당 및 빨치산 2세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세포교육만 받은 자들에게서 민주주의 사상이 싹트고 자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던가? 이들의 머리 속은 생각이 비뚤어지게 하는 좌익이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의 독서물은 공산주의 서적 내지 좌익서적에 국한되고 편협되어 있었다. 요컨대 이들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후반 및 이십 초반의 연령기에 반(反)민주적 책들만 읽었다. 이렇게 의식화된 운동권은 민주주의를 습득하기가 몹시 어려우며, 설사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수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걸리는 법이다. 그 당시 그들은 남한 정부를 타도시키라는 구호들로 세뇌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을 대적하는 빨치산 투쟁이 빨치산 2세대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남민전 전사들이 세포교육으로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양성하였다. 민주주의 사상을 키워주었는가? 만약 민주주의 사상을 키워주었다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민전의 암살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언정 결코 남민전 전사는 될 수 없었다. 남민전 투사 이재오도 남민전 전사로 승격하지는 못했을 정도로 남민전은 철저한 사상 검증을 거쳐 김일성에 대한 충성에 결코 변절이 없을 자들만을 충성 맹세와 선서의 절차를 거쳐 전사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러기에 남민전 전사들은 자생 간첩단이 아니었던가! 북한에서 보았을 때 가장 사상이 확실하며, 또 북한방송으로 지령을 내리면 그대로 복종하던 자들이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키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이 아니던가? 그런데, 남민전 전사들이 1970년대 후반에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세포교육으로 키운 영향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 전남대 학생회관에 김일성 분향소가 설치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유인물 4종이 발견되었다 (조선일보 1994년 7월 16일자). 이렇듯 1970년대 후반에 남민전 전사들이 세포교육으로 전남대에 핵심 운동권을 양성하였을 때 그 학습 내용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김일성 숭배 사상 및 종북반미이념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 어떻게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80년 5월 18일 오후 1시경부터 화염병과 돌로 파출서를 파괴하는 등 갑자기 폭동이 일어난 이유에 대하여 5.18 진영이 흔히 하는 거짓말이 공수부대가 진압하였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수부대 광주시내 투입은 오후 5시 이후의 일이요, 1980년 들어 아직 단 한번도 시위진압이 없었던 5월 18일 오후 1시경에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발생 후 두 시간이 지난 오후 3시경에도 여전히 공수부대는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영택은 이렇게 확인한다: “그러나 18일 오후 3시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시간이다. 다만 정웅 31사단장이 시내 출동명령을 내려놓고 있어 출동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영택 1996, 48).

그 이전까지는 광주에서는 시위진압을 한 예가 없으며, 1980년 새해가 밝아온 이후 대한민국 그 어느 곳에서도 시위진압을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는데, 어떻게 시위진압이 폭동 발생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심지어 19일부터 무장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던 주동자들조차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폭동이 그 날 18일 점심 시간 무렵에 갑자기 일어난 이유는 유언비어, 즉 이른바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박관현이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밝히지 못하고 진우라는 고등학생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면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은 누구였는가?

1980년 3월 전남대 바깥에 있던 광주운동권이 학생회장 선거에 개입하였던바, 정용화는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는 밖에 있는 우리들과 전남대 학생권과의 연계가 긴밀하여 총학생회장 후보도 우리들이 물색하였는데 한봉이 형이 법대 행정학과 3학년인 박관현을 추천하였다. 이에 전남대는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선거작업이 한창이더니 4월 2일 박관현을 중심으로 전남대 총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정용화 1989).

윤한봉은 그때 학생이 아니었기에 박관현에 대하여 잘 몰랐다. 복학생회 회장 정동년이 추천하고 윤한봉이 동의하여 결정된 것이었다. 조선일보 조광현 기자는 그의 기고문 “국회 광주특위 증인-정동년은 누구인가.”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보도한다: “들불야학의 경험담을 교내에서 강연하는 박관현을 본 정씨는 박씨와 금방 뜻을 함께했고 복학생회가 주동이 돼 박씨를 총학생회장에 추대, 80년의 운명을 함께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9:491).

정동년이 박관현에게 대준 선거운동자금에 대해서는 정동년이 말을 번복하였다. 처음에는 김대중이 대준 거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복학생들이 돈을 모아주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의 일거일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당시 전남대 직원 서명원은 복학생들의 모금 활동은 모르는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4:615). 게다가 만 37세의 나이에 복학하여 고학하여야 했다던 정동년이 단 하루 만에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천만 원에 달하는 거액을 마련하여 희사할 만한 재력가였을까?

자신이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에 추대하였다는 정동년의 주장과 달리 박노해는 윤상원과 김상윤이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에 추대하였다고 기록한다:

상원과 김상윤은 이미 「학원 자율화 추진 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괄목할 만한 지도성을 발휘했던 관현을 주시했다. 상원이 관현 에게 현 정세의 성격과 총학생회가 수행할 임무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총 학생회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시했으나 관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들불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상원은 계속 관현을 설득했다. 상원은 이 일이 결코 노동자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혁명적으로 강화시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견고하게 지켜 나감으로써 더 큰 모습으로 노동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원의 끈질길 설득에 마침내 관현은 출마를 결정했다 (박노해 1989, 89-90).

2. 김대중 돈으로 도피한 박관현

김대중 진영 운동권이 운동권 자금과 운동권 조직을 동원하여 당선시킨 박관현은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민청학련 출신 광주운동권과 복학생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5월 14일 오후 3시경 전남도청 앞 분수대 위에서 제2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16일 횃불행진과 5.16 화형식 등의 가두시위를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고정희에 따르면, 16일 밤 10시에 박관현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에 앞서 월요일인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일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고정희 1988, 405).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농민회가 ‘전남 농민대회’라는 행사 명칭 하에19일에 주동하기로 한 무장봉기에 전남대 학생들을 동원시켜 주기로 한 약속 이행을 위해서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무장봉기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단체들 중에는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도 있었던바, 광주매일『正史5・18』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미 무안 벌교 등에 농정조사차 내려갔던 학생들과 교감이 있던 가농과 기농회원들은 19일 광주시 북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전남대 총학생회등에 학생동원을 요청한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전남대총학생 기획실의 비밀문건인 [자유]에 다음과 같이 놀랄만한 내용으로 기록돼 있다: “농촌파급효과를 위해 공용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죽창과 밧데리를 준비하며 방송국.공공건물 예비군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124-125).

광주매일『正史5・18』은 과격시위대와 시민군 중 상당수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운동권이었음을 이렇게 밝힌다: “농민운동세력도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민주농정실현과 농민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다각적인 투쟁을 모색해나간다. 5월 19일 광주시 북동천주교회에서 전남대 학생회와 연대해 대규모 [전남농민대회]를 갖기로 했으나 5.18로 무산되고 대회준비자들은 5월 투쟁에 합류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115). 이 책은 광주사태 기간 중 과격시위대와 시민군 상당수는 해남 운동권이었음을 또 이렇게 밝힌다: “당시 해남의 농민운동인사들은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했기에 해남시위에는 가담하지 못하고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자체시위가 시작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385).

윤한봉은 그의 자서전 "운동화와 똥가방" 57쪽에서 광주운동권이 5월 17일 밤에도 19일로 예정된 광주에서의 대규모 농민시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5월 17일 밤에 나와 정용화는 19일에 계획된 광주에서의 대규모 농민시위 준비차 광주에 올라온 \'카톨릭농민회\' 간부 최성호 씨 등과 함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잠자러 갔다." 그런데, 최성호는 광주사태 주동자 중 한 명이며, 그간 5.18 단체 간부직을 역임해 왔던 자이다. 그래서 5.18측에서도 광주사태 주동세력 중에 카톨릭농민회와 그 간부 최성호를 포함시킨다.

당시 현대문화연구소 소장 정용화도 그의 증언록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에서 "5월 19일은 북동성당에서 70년대 말 종교적 보호막을 입고 급격히 성장한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가톨릭농민회가 그 준비를 전남대 총학생회에 의뢰했는데 전청협도 전남대 총학생회와 17일 오후 7, 8시경까지 그 행사를 준비하였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전청협이란 정동년, 윤한봉, 김상윤, 윤강옥, 정상용 등으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의 공식명 ‘전남민주청년회’의 약칭이다.

그리고 여기에 당국이 용인해 줄 수 있는 불법 가두시위의 한계가 있었다. 16일 시위가 마지막 시위일 거라더니,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에게 “이번만 허락해 주면 평화스럽게 횃불시위를 끝내고, 더 이상 시위를 하지 않겠다”더니, 그날로 그 약속을 깨고, 다음 주부터는 훨씬 더 큰 규모의 가두시위를 하려 하였으며 더구나 이제는 당국의 허락 따위는 전혀 받으려 하지 않고 가두시위를 결정하고 광고하였다. 이것도 17일 저녁 비상국무회의 소집과 계엄령 전국확대가 불가피했으며, 18일 0시를 기해 수사당국이 주동자 예비검속 혹은 연행을 시작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5월 17일 오전 박관현은 양강섭과 더불어MBC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하였으므로 그 날 일약 유명 인물로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그가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면서 민심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폭동선동 방법이 필요하였던 광주운동권에 이 해괴한 뜬소문은 아주 유용한 호재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진우의 실존인물이 박관현인데, 영화에서처럼 고교생이었던 것이 아니라,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민우—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 장본인 박형선의 여동생과 영혼 결혼식을 올린 윤상원—가 진우의 친형이었던 것이 아니라,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영화 주인공 이름을 들어 쉽게 이야기하면, 민우가 진우 사망설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폭동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윤상원은 박관현이 18일 여수로 간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17일MBC방송국에서 기자회견 이후의 박관현의 행방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기자회견 후 광주운동권이 상대 뒤에서 박관현과 양강섭을 위해 막걸리 파티를 베풀어 주고, 민중봉기(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에게 활동자금 명목 하사금3백만 원을 주었다. 그 액수는 오늘 날의 화폐가치로 수천 만원에 해당되므로 당시 학생에게는 거액 현찰이었다. 양강섭은 박관현과 자기가 그런 자금을 전달받은 막걸리 술자리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같이 고생했던 활동가들이 상대 뒤에서 막걸리를 마신다고 하여 관현이와 함께 가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면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용봉축제 준비금 명목으로 3백만 원을 탔다. 몇몇 주요 인물들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 줄 몰라 도바리(형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 자금으로 조금씩 갖고 있게 했다 (양강섭 1989).

임낙평은 실제로 그 날 그 시각에 그런 술자리가 있었으며, 그런 막걸리 술판에 자신도 있었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17일 저녁 7시 구YWCA에서 박현채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YWCA 소강당 1층과 2층을 꽉 메우며 박선생의 경제 전망을 듣고 있었다. 물론 나도 노준현 선배와 함께 강연회에 참석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그동안 잘 알고 지내던 학생운동권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고 또한 재야인사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고 주최 측과 재야인사 그리고 운동권 학생들이 구전남매일 앞 한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김태종, 김원[윤]기, 황일봉, 나 그리고 갓 제대한 김상집, 휴가 온 박석면 등이 자리했고 문병란, 장두석 등 재야인사들이 참여했다.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마치고 젊은 층만의 2차가 있었다 (임낙평 1988).

문석환은 그 날 오후 상대 뒤에서 운동권이 회동한 그 술자리에는 자신도 함께 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7일 오후 상대 뒤 반룡슈퍼에서 박관현, 김영휴, 양강섭 등과 함께 18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간단히 막걸리 한잔씩을 하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문석환 1989). 그 술자리에 자신도 있었음을 김윤기는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7일 저녁 함석헌씨가 와서 YWCA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강연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 합석을 했다. 그날은 또한 박석면(박석무 선생님 동생)이 휴가를 나왔다. 그날 저녁 나, 석면, 태종, 선출이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박석무 선생님 댁으로 갔다” (김윤기 1989).

그렇다면 정동년이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전남대 운동권에 전달하였다는 1980년의 법정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며 진실에 매우 근접함이 명확하게 입증된다. 도대체 어떻게 5월 17일 전남대 운동권의 술판에서 오늘 날의 수천 만원에 해당하는 3백 만원이 솟아난다는 말인가? 대학생들이 술판을 벌이니 수천 만원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다거나 땅에서 솟아난 예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느 상부 기관에서 술자리를 통해 하부 기관에 그런 거금을 준다는 말인가? 학생 운동권이 술자리에서 그런 거금을 수수하는 것도 민주화운동인가? 아닐진대 우리는 그런 검은 돈의 출처를 물어야 한다.

정동년에 대한 공소사실 4항에서 박관현의 이름과 3백만 원의 돈이 이렇게 언급된다: “동월 6. 10: 00경 위 전남대 학생회의실에서 위 박관현에게 위 3백만 원 중 2백 80만 원을 제공하면서 ‘김대중 선생이 학생투쟁을 위해 보내는 자금이니 보안을 유지하면서 잘 쓰도록 하라’고 하면서 위 ‘1’항과 같이 모의된 바를 전하여 주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7:471). 이 기록에서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이 증언하는3백만 원은 김대중에게서 온 돈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17일은 박관현에게 인생 최고의 날로 시작했다. 고아인 그가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때가 지난 달이었는데, 벌써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명사로 떠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식집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위한 푸짐한 식사 대접도 받고 2차 막걸리 술판 때 (정동년이 김대중에게서 받아 광주의 운동권들에게 뿌린) 자금도 아주 두둑하게 받았다. 실로 그 날은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신나게 대접받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런 들뜬 기분으로 김영휴, 차명석, 문옥희 등과 더불어 무등산장으로 가는 길에 청천벼락 같은 뉴스를 들었다. 쉬운 말로, 불과 몇 시간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달라진 상황을 양강섭은 이렇게 서술한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관현이와 나, 김영휴, 차명석, 문옥희 등이 무등산장으로 가기로 했다. 밤 10시쯤, 라디오에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면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을 해보자는 생각에 산장에 올라가 방을 잡고 TV를 켰더니 확실한 내용이 화면에 나왔다. \'일 났구나\'하는 생각에 관현이와 영휴를 남겨두고 시내상황 점검을 위해 이곳저곳 연락을 해보고 11시 30분경 사전에 약속되었던 대지여관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김상집 선배한테서 빨리 피하라는 연락이 왔다 (양강섭 1989).

17일 밤에 박관현이 대지호텔에 투숙해 있었다는 사실은 정현애의 증언과 고현정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위에서 김상집 선배란 당시 김대중 세력의 광주 아지트였던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을 가리킨다. 녹두서점의 사실상의 주인은 김상윤의 부인이었던 정현애였다. 그녀는 그 시간 박관현이 대지호텔로 이동해 있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고현정의 기록을 따른다면 박관현더러 은신하라고 전화를 건 이는 김상집의 형수 정현애였다:

그보다 앞서 밤 9시부터 이미 녹두서점에 이상한 전화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 전화 속에는 서울 대학생 회장단들이 전부 연행됐다는 전갈이 끼여 있었다. 사태를 알기 의해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렸으나 연결이 안되었고……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현애는 즉각 대지호텔에 이동해 있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등에게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를 급하게 걸고 그로부터 20분쯤 뒤인 11시40분에 서점 셔터를 내리는데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고현정 1988, 405-406).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거사 음모가 D-day 하루를 앞두고 큰 차질이 생긴 것을 가장 먼저 직감한 인물은 총진행을 맡고 있던 윤한봉이었다. 정용화는 윤한봉과 더불어 자신이 직접 겪었던 그 긴박한 세 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 있는 것보다 편리하여 한봉이 형과 동명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17일 오후 8시 30분경 밖에서 한봉이 형을 만났는데 술집으로 끌고 가더니 막걸리를 건네면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였다. "이화여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사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말하는 형과 술을 마시다 11시쯤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갔다. 형이 주위 사람들의 신변을 확인해 보라고 하여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해본 결과 상윤이 형은 잡혀갔고, 그외에도 대부분은 집에 있지 않았다. 걱정을 하며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TV를 보는데 긴급뉴스라며 \'전국계엄 확대, 김대중 씨 연행\' 등의 내용이 나왔다. 그 소식을 듣자 매우 놀랍고 당황되었다 (정용화 1989).

이때가 광주운동권처럼 전남대 운동권에게도 민중봉기 거사 음모를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피신할 것인가를 즉석에서 결정해야 하는 중대 선택의 기로였다. 학생회 간부는 아니었으되 박관현과 광주고등학교 동기동문 단짝 친구로서 그의 운동권 활동을 지원하였던 차명석씨는 그 긴박한 순간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7일 저녁 박관현, 김영휴씨와 함께 무등산장 부근의 식당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서울 쪽으로 연락을 취해 전국에 계엄확대 조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일단 피하기로 하고 식당의 자가용을 타고 산수동 오거리까지 왔다. 일단 총학생회에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박관현과 김영휴 씨에게는 상대 뒤에 후배 자취방에 은신하라고 하고 나는 곧장 총학생회실로 달려갔다.

밤 11시 40분경 총학생회실에 도착했다. 총학생회 부회장인 이승룡을 비롯한 예닐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계엄확대 소식을 알려주면서 빨리 피하라고 일렀다. 학생회관 창문을 통해 보니 전남대 정문 앞에는 이미 20여 대의 군용트럭이 라이트를 켠 채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을 빠져나와 사범대 뒤의 담을 통해 상대 뒤의 후배 자취방으로 갔다 (차명석 1989).

그러나 그 시각 이후의 피신 선택은 박관현을 위시한 전남대 운동권에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던 만큼 피신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되었다. 그러나 박관현에게는 공적 약속이 있었다. 19일 가톨릭농민회가 ‘전남농민대회’ 개최 명분 하에 주동하기로 한 봉기에 전남대 학생들을 동원시켜 주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며, 하루 전인 16일 밤의 5.16 화형식 폐회 때 학생들의 집결 시간과 장소까지 이미 공적으로 광고한 바 있었다. 그런 그가 19일의 행사와 시위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두 팽팽한 의견이 양 갈래로 갈라진 격론이 두 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당시 총무부장 양강섭은 그 갈등을 “피튀기듯 갈등”이란 말로 표현한다:

시내상황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했다. 학생회 집행부였던 우리들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피신 할 것인가로 2시간 가까이 토론을 벌였다. 어찌됐든 남아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쪽과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피했다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측이 서로 피 튀기듯 갈등을 겪다가 피해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양강섭 1989).

17일 밤 학생회 집행부의 피신 결정이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이틀 전인 15일 최종확정되었던 내란음모 결정 사항 때문이었다. 15일 밤의 결의 내용을 양강섭은 이렇게 요약한다: “15일에도 전날과 똑같은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있었다. 그때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등학생들을 동원시키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끝으로는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양강섭 1989).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계획을 집행부는 13일부터 구체화시키고 있었으며, 15일 밤에 최종 결의되었다. 바로 이 음모가 당시 수사기관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고 명명한 엄청난 음모 사건의 한 단면이었다. 이것이 내란음모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이전에 김대중이 이미 ‘예비내각명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야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씨에게 밀려 신민당 5공화국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김대중은 5월 20~22일로 예정된 전국적 민중봉기(혹은 총궐기대회)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하였으며, 이런 집권 전략을 ‘새도 캐비닛’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새도 캐비닛’ 음모를 수사당국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임낙평은 5월 중순의 전남대의 가두시위도 바로 이 ‘새도 캐비닛’(김대중내란음모)를 위한 것이었음을 1988년의 ‘경찰을 인질로 붙잡아’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17일 오전, 대학의 캠퍼스는 연 3일 동안의 함성의 뒤끝이고 토요일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나는 오전에 복적생 문승훈 선배와 제1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한참 동안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토의했다. 문선배는 새도 캐비닛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학생대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지도부의 연행으로 \'박관현의 지도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고 다만 상호 연락체계를 확인하고 그런 상황이 오면 즉각 대처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임낙평 1988).

광주사태 직전 김대중이 구성한 ‘새도 캐비닛’이 비근한 예가 2011년 6월 현재의 리비아 반군의 내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중의 ‘새도 캐비닛’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反)민주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이 비근한 예이기도 하다. 반군의 승리를 바라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어째서 반군 과도정부에 국가승인을 해주지 못하는가? 그것은 반군 정부 집권자가 선거로 당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군이 민주세력이라는 것은 주관적 견해일 뿐, 반군 집권자가 선거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결코 민주정부가 되지 못한다. 비록 나토의 지원을 받는 반군 정부가 무장봉기로 리비아 내전에서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현 반군 집권세력이 선거의 절차를 생략하고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민주정부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다. 어째서 김대중이 1980년 봄 일으키려던 민중봉기를 내란음모라고 불렀는가? 그것은 김대중이 선거의 절차를 생략하고 민중봉기로 스스로 집권자가 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분명 내란음모였으며, 민주의 원칙에 역행하는 음모였다.

여기서 5월 14일부터 이미 시작된 가두 시위 때 주동자들이 박관현이 연행될 가능성을 사전 점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다. 어느 나라에서나 계엄 하에서는 가두시위가 금지된다. 계엄이 선포된 바 없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가두시위는 비록 그것이 비정치적 시위라 하더라도 ‘1인 시위’만 허용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남대는 최규하 대통령 퇴진과 신현확 총리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내각이 동시에 없어지면 국가가 전복되기에 이것은 정치적 시위였다. 만약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수천, 수만 명의 시위군중이 대통령과 장관들이 동시에 모두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하면 당국은 이것을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진압하지 아니하겠는가? 2008년의 ‘광우의 난’(광우사태 혹은 광우반미시위) 때도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시위대가 ‘이명박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을 때 당국이 조용히 있었는가?

리비아 동부의 반군이 민중봉기를 일으키며 리비아 국가원수더러 물러나라고 하였을 때 국가원수와 그의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국민은 어떻게 하여야 했는가? 반군의 요구대로 따르든가 무장봉기를 진압하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리비아 사태가 결코 광주사태와 닮은꼴일 수는 없겠으나, 1980년 5월 초에 최규하 대통령이 처해 있던 상황을 설명하는데 참고가 된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은 물러나든가 운동권이 주동하는 봉기를 진압하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선택은 운동권이 주동하는 봉기에 굴복하여 물러나는 것이었다. 가두시위 구호가 ‘최규하 물러나라’라고 하여서 일국이 대통령과 내각이 동시에 퇴진하고, 김대중이 선거 절차 없이 스스로 집권하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그것은 국가전복을 의미하였으므로 수용이 불가능하였다.

현 2011년 6월 현재 리비아에서는 반군도 나토도 리비아 국가원수 암살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때 리비아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리비아의 미래를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때 투자 등의 경제활동도 중지되므로 그 경제고도 피부로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그 당시 한국사회에 준 충격에 비추어 1980년 5월 17일의 휴교령을 이해하여야 한다. 21세기 초엽인 오늘의 시점에도 만약 갑자기 대통령 유고 상황이 벌어지면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며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이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그럼에도 오히려 반정부 시위가 기승을 부려 정국이 몹시 불안하였다. 안정을 바라는 국민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지 못하였는데, 1980년 3월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씨에게 밀린 4월 초 김대중이 남민전 잔당 및 민청학련 출신 등 과격운동권과 손잡고 전국 규모의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2008년의 ‘광우의 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두시위가 직접민주주의라며 반정부 시위 선동하기에 앞서 광우병 유언비어가 먼저 퍼졌다. 이처럼 1980년 봄에도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앞서 김대중 세력이 ‘이원집정부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최규하 대통령이 이원집정부제를 하려 한다는 유언비어였는데, 김대중이 앞장서서 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니 당시 학생들은 쉽게 현혹되며 반정부 시위 선동에 휩쓸렸다.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수많은 성명서들도 실은 있지도 않은 ‘이원집정부제’ 반대 성명이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던가! 당시 대학가 성명서들은 학생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외곽단체에서 작성하여 학생회 명의 도용하여 벽보에 붙였던 것들인데, 명의도용한 유언비어 유포는 허위사실 유포였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명의도용한 허위사실 유포 문서들이 어째서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기록에 등재되어야 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있는가?

1980년 5월 13일 드디어 대규모 가두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국민이 느낀 불안감은 2008년의 ‘광우의 난’ 때의 그것보다 한층 더 심한 것이었다. 1979년 10월 대한민국이 한창 건국기에 있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으므로 1980년 우리나라는 여전히 아직 약소국이었다. 경제약소국 상태에 있을 때는 사회혼란이 훨씬 더 큰 부담이 된다. 그런 예를 우리는 2011년의 이집트에서도 본다. 지난 2월 세계 언론이 이집트의 민주화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불과 넉 달도 채 못되어 이집트의 경제위기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아직 한국의 경제 체질이 약했던 1980년 5월에도 국가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사회혼란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 시대에 계엄 하에서는 가두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질서마저 무너졌다. 그리고 의무전경제도는 1987년에 비로서 정착되었으므로 1980년 5월 중순에는 내무부 산하 경찰병력으로 대규모 가두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그런 사회혼란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그래서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휴교령이었으므로 모두들 김동길 교수의 누나 김옥길 문교부장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김옥길 장관도 휴교령을 내릴 의사를 밝혔으므로 내란 주동세력 편에서는 이 문제에 몹시 예민하였다. 김장관이 언제 휴교령을 내릴 것인가?

5월 17일 자정의 휴교령이 있기까지의 이런 배경을 아는 독자들은 위의 임낙평의 증언 중 “학생지도부의 연행으로 \'박관현의 지도력\'을 상실한다면……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운동권은 자기네가 정부 당국자라도 가두시위 확산을 막으려면 휴교령을 내리고 박관현을 연행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에너지 위기로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 중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귀국하기 전에는 휴교령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운동권은 정세 파악을 하고 있었으며, 내란 음모 주동자들은 따라서 그때가 내란 거사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동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돌연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여 김옥길 장관의 휴교령 안을 재가해 줄 줄은, 즉 5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교령이 발동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7일 자정과 18일 아침 사이에 광주운동권과 전남대 운동권은 모두 얼떨떨한 상태에서 각각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게 된다. 거사를 불과 하루 남겨두고 피신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거사 준비는 완료되었으니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이 결정은 운동권 당사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전남대 학생 운동권은 이런 갈등 끝에 피신으로 가닥을 잡았으며, 피신 쪽으로 선택이 기울어진 이상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피신시키는 것이 최우선순위의 과제가 되었다.

17일 저녁 박관현 일행과 더불어 식사와 술자리를 같이하고 그날 밤 광천동 윤상원 방에서 자다가 이튿날 18일 아침 그의 방에서 박관현을 만났기에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현장 증인인 임낙평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윤상원이 알고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구전남매일 앞 막걸리집에서 밤 12시가 되도록 술을 마시다 노준현 형과 나는 어렵사리 택시를 타고 광천동에 사는 윤상원 선배 집으로 갔다. 우리는 선배와 함께 상황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며, 나의 주도에 의해 진행되던 전남대 내의 \'노동문제학회\'를 어떻게 활성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상의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술에 취한 상태였고 선배 박 효선이 찾아와 그냥 자버렸다. 얼핏 보니 윤상원 형은 이날 따라 차분하게 무엇인가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했다.

5월 18일 윤상원 형의 호통 소리에 눈을 떴다. "야,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 모두 연행되었다"라고 했다. 윤상원 형은 아침 방송을 통해서 계엄확대의 뉴스를 듣고 즉시 주변 공중전화를 통해 선후배, 재야인사들의 연행 소식을 들은 다음 우리를 깨운 것이었다. 박효선 형은 그가 기획하고 있던 \'동리소극장\'의 개관과 개관기념공연이 무산될 것이고, 그 동안의 연습이 헛수고라며 계엄당국의 조치에 분노하며 먼저 집을 나섰다. 윤상원 형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과연 오늘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미 형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전화로 확인한 뒤였다 (임낙평 1988).

윤상원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던 후배들에게 “휴교령이 내려 모두 연행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학생운동권 수뇌부 박관현과 양강섭도 연행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때 박효선은 당시 광주운동권이던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이었는데, 광주운동권을 위한 소극장 개관기념공연을 전남대 운동권과 더불어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박관현 연행은 개관기념공연 무산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급히 YWCA 연습장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박관현은 아침식사 후에 윤상원 자취방을 찾아 왔으므로 박효선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임낙평은 그 이듬해 1989년의 그의 기고문 “윤상원 열사의 삶과 죽음”에서 아침식사 후 윤상원의 자취방에 박관현이 찾아온 사실을 증언한다. 이것을 1988년의 증언록과 연결해 읽으면 박효선은 “모두 연행되었다”는 윤상원의 호통에 깜짝 놀라 집을 나섰고, 박관현 일행은 아침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찾아왔다. 그 길로 박효선은 황석영의 극단 광대 연극연습장인 YWCA로 향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91, 215). 당시 광주운동권 문화패 「광대」 회장이었던 박효선은 헐레벌떡 연습장으로 달려오자마자 필시 단원들에게 박관현이 연행되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같은 시간에 남민전 전사 박석무의 동생 박석면과 가톨릭농민회에 가서 노금노씨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YWCA연습장으로 갔던 김윤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윽고 밖에서 \'와\'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광대는 공연 연습을 집어 치고 유언비어로 폭동을 선동하는 홍보에 발벗고 나섰다 (김윤기 1989).

이렇듯 박관현 사망설의 뿌리는 박관현 연행설이요, 어이없게도 박관현 연행설은 이처럼 박관현이 평소 기거하던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나왔다. 학생운동권 수뇌부 박관현과 양강섭도 연행되지 않았음에도 윤상원이 과장하여 “모두 연행되었다”고 말했고, 박효선은 당연히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연행되었다고 여겼다. 평소 박관현은 윤상원 자취방에서 잤다. 그러나 전날 밤 박관현이 무등산장과 대지호텔에서 투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박효선은 아침에 방에서 박관현이 안 보이는 이유가 연행되었기 때문이려니 여겼고, 광대 단원들도 박관현 방에서 달려온 박효선이 그렇게 말하니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관현은 연행되지 않았다. 박관현이 광주를 떠나기 전 윤상원과 주고 받은 마지막 대화를 임낙평은 이렇게 기록한다:

5월 18일 아침 라디오뉴스를 통해서 윤상원은 계엄 확대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즉시, 청년 운동가와 재야 인사 등에게 전화해 그들이 예비검속되거나 피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는 뜻밖에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를 피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처 빈 공터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협의했다.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 등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진행되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 해 가며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해어졌다. 박관현이 가장 신뢰하는 선배 윤상원.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어 버렸다.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과 지지를 받는 박관현 등이 연행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그는 투쟁 지도부, 시민 홍보, 투쟁 방법론도 없이 싸움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임냑평 1989, 97-98).

그러면 여기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의 민우(윤상원)와 진우(박관현)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영화에서 민우(윤상원)와 진우(박관현)의 5월 18일은 소풍 다니고, 신애(전옥주)와 연애하며 희희낙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가 아니다. 무엇이 역사인가? 1980년 5월 18일 아침은 ‘박관현 연행설’ 소동으로 시작되었다. 윤상원은 전남대생 중에서는 정동년이 연행되었다는 뜻으로 “모두 연행되었다”고 말했고, 박효선은 그 말을 “박관현이 연행되었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당시 김대중의 외곽단체였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학생회가 운동권 정치도구로 전락케 하는 일을 해왔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피신조차도 먼저 윤상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 만큼 그는 김대중 세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박관현뿐만 아니라 다른 광주운동권이 모두 피신을 선택하였을 때 광주사태를 주동하기로 결정한 유일한 인물이 윤상원이었다. 그런데 윤상원이 광주사태 주동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상부 지시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윤상원) 직업이 운전수이지만, 실제 역사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이었으며, 김대중의 측근이 운영하던 운동권 아지트 녹두서점에 출근하고 있었다. 녹두서점 여주인 정현애는 윤상원이 1980년 봄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파견근무 형식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윤상원씨는 80넌 3월부터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들불야햑에서 일하면서 국민연합이라는 비상기구의 실무자로 파견되어 있었다” (정현애 1991, 186). 그리고 영화 ‘화려한 휴가’의 줄거리처럼 그의 18일 일과가 소풍가고 영화구경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라, 전남대 정문 앞에 가서 정문 경비병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과격시위를 선동하였는데, 이때가 오전 10시경이었다. 윤상원이 국민연합 지시로 받고 18일 아침부터 봉기 선동에 착수하였음을 정현애는 이렇게 증언한다: “윤상원씨는 5월 18일 아침에 18-19일쯤 서울의 국민연합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도록 할테니 광주에서 며칠만 버티라는 얘기를 남기고는 전대앞 시위에 가담하였다” (정현애 1991, 187).

내란 거사를 불과 하루 앞두고 당국의 주동자 예비검속이 시작되었을 때 박관현 등 대다수의 운동권들이 혼비백산하였던데 비해 윤상원의 결정은 단호하였다. 내란 음모 거사를 날짜만 하루 앞당겨 예정대로 밀어붙인다. 사실 윤상원이 이렇게 과감할 수 있었던 데는 그는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다는 유리한 여건도 작용하였다. 떠오르는 샛별 운동권 윤상원이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에 투철한 직업적 혁명가였으나 수사당국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연행 경력이 있는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 대상이었으므로 연행 경력이 없는 윤상원에 대해서는 수사 당국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박관현이 주동한 대규모 불법 가두시위의 배후조종자는 윤상원이었다. 따라서, 실제 주동자는 윤상원이요, 박관현은 일거일동을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했었을 뿐이나,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수사당국은 사회에 공개된 운동권 박관현만 주시하고 있었다.

박관현 및 전남대 학생회 임원들은 박관현이 지금 피신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고 윤상원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박관현과 양강섭과 차명석이 그 문제를 의논하러18일 아침 9시경 찾아왔을 때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임낙평 1989, 97). 이것은 아주 어려운 요구였다. 폭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절대로 체포되지 말라, 그러나 폭동이 시작되면 선봉에 서서 지도하라. 그런데, 피신과 봉기 주동—어떻게 한 사람이 이 상반된 두 가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박관현이 가두시위 주동자였다는 광주운동권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윤상원의 이런 지시의 또 한가지 어폐는 그러면 박관현 없이 어떻게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는 가두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박관현더러 잠시 은신해 있으라는 이 말은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을 대표하는 윤상원이 앞으로는 박관현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전남대 학생들을 가두시위로 내몰겠다는 말이었다. 실로 그는 박관현이 은신의 길을 떠나기가 무섭게 전남대 정문 앞으로 달려가 정문에서 휴교령 안내를 하는 군인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박관현 연행설’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3. 고의로 조장하여 유포한 학생 사망 유언비어

그러면 도대체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는 누가 지어내 퍼뜨린 것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한가지 단서는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하기 3시간 앞서 ‘박관현 연행설’ 유언비어가 등장하였는 사실이다. 나의갑 기자는 그 유언비어 발생 초기에 그가 현장에서 들은 이 유언비어를 이런 기록으로 증언한다:

박관현 연행 설… 누가 퍼뜨린 것인가 5.18 첫날인 18일 오전 9시 20분께 전남대 정문 앞 거리.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주한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흥분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xx사단[필자주,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그래요? 총 학생회장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학생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어떤 학생\'의 이 목격담은 사실과 다르다. 연행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검거망을 피해 그날 저녁 여수 돌산 도에 도착,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풍문이 \'어떤 학생\'에 의해 발설되었을까. 이전 5.18을 \'사전 음모 설\' 쪽으로 몰고 가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음모 집단\'쪽이 만들어 내 퍼뜨린 고도의 전술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취재에 임했을 때 그 \'어떤 학생\' 의 이름자를 물어 보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그것은 \'중대한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몽의 10일\'이 태풍으로 지나간 뒤 광주 사람들은 박관현의 행방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필시 죽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등등 추측도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망명설\'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육하원칙을 갖추고 떠돌았다. 박관현은 5.18직후 돌산 섬을 떠나 대처인 서울로 갔다 (나의갑 1988, 105).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이 말이 유언비어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이 말의 한가지 팩트는 박관현이 그 날 아침 승용차에 승차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만 박관현을 연행해가는 승용차가 아니라, 박관현 일행이 무등산장에서 박관현 집, 즉 윤상원의 자취방을 향해 가던 승용차였다. 따라서 박관현이 승용차를 타고 있는 것을 본 목격자의 말 중에서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이 말은 무책임한 픽션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폭동의 불씨가 이런 거짓말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비지성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하는가?

차명석은 그날 자기가 박관현을 승용차에 태워 멀리 여천으로 피신시킨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5월 18일, 예전부터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문 앞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위험을 느껴 일단 피신하기로 하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가용을 빌려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박관현과 김영휴를 데리고 운전사와 함께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 씨는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광주를 빠져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소재 전남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 씨 집으로 피신했다. 이곳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사범대 교수인 정정희 씨의 도움을 받아 그곳을 피신했던 것이다 (차명석 1989).

이 증언대로라면 아침 일찍 윤상원을 만난 박관현 일행은 전남대 정문 앞에 왔다가 다시 광주 시내로 나온 후 곧장 광주를 빠져나갔다. 박관현을 먼저 피신시킨 후 자신은 광주에 남아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보기로 했던 양강섭에게 18일은 견딜 수 없는 갈등의 하루였다. 그는 훗날 광주사태라 불리는 엄청난 사건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18일 그 날이 자기에게 어떤 하루였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낮에 관현이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일 견디기 힘든 건 헬리콥터 소리였다. 계속되는 헬리콥터 소리는 총소리와도 흡사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처럼 들려 괴롭기 짝없었다. 애인 집에서 은신하였는데 그 부모님께서 시내상황을 계속 보고 오시면서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피신할 것을 권했다. 상원이 형이 전화로 화염병 제조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 주었다. 전화를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도청되었다면 내 거처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옮겨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양강섭 1989).

양강섭은 1978년 3월부터 운동권 세포교육을 받았으되, 직업적 운동권이 될 생각은 없었다. 친구 박관현이 1980년 4월 학생회장이 당선되었으니 7월까지만 총무부장직을 맡아준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전남대 운동권은 광주운동권의 통솔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광주운동권 동지였다. 원래 그는 19일부터 박관현과 더불어 민중봉기 리더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일 박관현을 피신시키고 홀로 남은 그가 시위 리더로 활동할 것이었는가? 겁에 질린 그는 집에도 못 가고 애인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도 교수님과 선배들도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얼른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민우로 등장하는 윤상원 형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윤상원의 목적은 학생혁명군을 조직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전남대 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에게 전화로 화염병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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