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짤방..
산이야기..
첫번째 사진 : 안산에서 바라본 서대문 형무소..그리고 멀리 남산~
두번째 사진 : 독립문에서 바라본 안산 과 인왕산~
독립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있는 듯 싶어 글좀 남겨 봅니다..^^;;
독립문의 정체
이완용의 편액이 걸린 독립문 과연 누구를 위한 개선문인가
\'3.1절\'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독립문이다.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은 1896년(건양1년)에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한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세웠다. 1979년 성산대로 확장 문제로 원 위치로부터 북서로 70m 이전, 서대문 역사관 근방에 복원하게 됐다.
서재필이 프랑스 에투알 개선문을 그대로 스케치한 것을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대공사였을 것이다. 게다가 전 국민을 상대로 직접 모금운동까지 벌여 공사비 97%를 국민 기부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문은 참으로 수상한 문이다. 알려진 바대로 이 문이 민족독립의 상징이었다면 어떻게 일제강점기 동안 왜 철거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1928년 경성부 토목과는 직접 보수공사까지 하며 정성스럽게 관리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니, 과연
독립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우리는 \'
독립문\'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독립문은 수많은 자리를 두고 하필 청나라 사신을 맞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지어졌다. 이는 누가 봐도 청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말이다. 만약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지어졌다면 일본과 연관된 건물이나 상징물을 헐지 영은문을 헐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독립문이 세워진 시기는 바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듬해다. 만약 청일전쟁 전이었다면 영은문을 철거하는 일은 할 수도 없었다.
독립협회에서 이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청일전쟁 강화조건에 \'청국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완전 폐기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조선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의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조항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생김새도 남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서재필은
독립문을 프랑스 에투알 개선문을 그대로 스케치해서 만들었다.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1세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렇다면 개선문의 디자인을 베낀
독립문 역시 누군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으며, 청국은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했다. 만약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이 세워졌다면 이 문의 정체는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개선문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바로
독립문의 편액. 이 편액은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다 알려진 대로 을사오적인 이완용이 썼다. 그 당시 이완용의 서체는 유명했다. 그는 명필 중 명필로 덕수궁 내 경소전과 숙목문의 현판사서관으로 임명받아 현판을 썼으며 창덕궁 함원전의 현판까지 썼다. 당대 최고의 명필로 각종 행사 때마다 일본 천황은 친히 그에게 글씨를 부탁할 정도였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 자격으로
독립문 편액을 쓴 것이다. 학자들은 독립협회는 고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단체며, 당시 이완용은 친러파로 친일행각의 하나로
독립문 편액을 쓴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찌됐건 결과는 국치(國恥)가 아닐 수 없다.
역사가 복원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철거되고 광화문이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민족열사가 잠든 서대문 역사관의 초입에 부끄럽게도 이완용 편액이 걸린 \'
독립문\'이 서 있다. 언제까지 일본을 위한 개선문을 세워둘 셈인지. 현재
독립문은 1979년 군사정권 당시 이전된 것이다. 차라리 철거하든가 원위치로 옮기는 게 수순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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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출처 : 일간스포츠 (2008-02-29)
사진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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