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GzWV5nUTjB8
군악대원으로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누빈지 어언 세 달,
여름과 함께 시작된 항해는
벌써 늦은 가을을 지나 겨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도착해 선상 리셉션 및 공연을 마친 후
다음 날은 프리타임이었고
프리타임에는 밖에 나가서 관광지를 돌거나
술을 마시거나 해도 상관 없었다
그 때 당시 한국에서는 비긴어게인 포르투갈 편이
히트를 좀 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친한 선후임 형들이 악기를 가져가서
리스본에서 버스킹을 하자고 했다
사실 우리 말고도
우리 배에는 너나할 것 없이 버스킹 호소인들이 많았다
온갖 직별 사람들이
자기들 중 조금이라도 노래가 되거나 기타를 칠 줄 알면
버스킹 팀을 만들어 나가려는 기세였다
아무튼 나도 통기타를 매고
형들과 리스본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마 그 날만해도
버스킹하는 동양인이 리스본에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길을 걸어다니는데
어떤 허름한 차를 타고 가던 백인 아재가
창문 밖으로 고갤 내미더니
유 뻐킹 차이니즈 보이밴드!! 엘렐렐렐레
이러면서 한 마디 하고 도망갔다
근데 다들 잡담하느라 바빠서
그걸 아무도 못듣고 나만 들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버스킹으로 유명한 거리가 있다
아니 사실 어느 유럽 대도시를 가도 최소 하나씩은 있다
어쨌든 거길 가보니
각종 이상한 재활용품들을 얼기설기 붙여만든 자작악기로
마잭 스무스 크리미널 등
유명한 고전 팝송들의 MR을 틀고 기깔나는 연주를 뽐내는 장인정신 넘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 절대로 기타, 키보드 등의 비로소 악기다운 악기는 없었다
우리같은 진짜 악기를 든 사람들이야말로 초짜였다
다들 실력이 상당했다
그래서 여기서 하면 쫄린다 싶어서
좀 더 골목으로 들어가 버스킹을 하기로 했었는데
골목의 구석에는 어떤 순박해보이는 아재가
양 손에 쥔 마라카스 한 쌍을 신나게 흔들며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아재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대충 반갑다며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코리아 라고 하니까
왓? 김정은?
이러더니 함께 버스킹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자기만의 버스킹 스팟이 있다며 따라오라고 했는데
그 아재 말하길
그 곳은 울림이 좋기 때문에
이 쪽 버스커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으니
절대 20분 이상은 공연을 못할거다
그러니 빨리 가서 하고 오자고 했다
근데 그 아재를 따라갈수록
번화가에서 멀어지며
칙칙하고 어두워졌다
참고로 리스본이란 도시는 원래부터가 칙칙한 곳이긴 하다
그냥 도시 전체가
재개발 이전의 마포 달동네를 무한대로 확장한 것 같이 생겼다
(인터넷에는 이런 잘 나온 리스본 이미지도 있긴 하나,
실제로 가보면
녹슨 건물들을 간신히 포장하는 허름한 빨간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소 칙칙한 풍경이다)
그 아재가 말한 곳을 도착하니
아재 말대로 울림이 좋을 수 밖에 없는,
길고 긴 터널이었고,
중간중간 뚫린 구멍으로 금빛 햇빛이 드는 근사한 곳이었다
먼발치에는
벽에 기대어 옷을 반쯤 풀어재낀채로 꼴아있는 노숙자들이
몇몇 보였다
마약에라도 절어있었나보다
형들은 이제야 짐을 풀고 한 숨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비록 근시임에도,
그 노숙자들의 초점 없는 눈동자들이
우리를 적대적으로 째려보고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그걸 보고나니
왜 여기서 20분 밖에 버스킹을 못한다는건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하기 싫어졌는데
형들은 더 이상 장소를 찾기엔 지친 눈치였고
그 아재의 권유를 거절하기에도 미안하고
그렇게 버스킹을 하기로 했다
https://youtu.be/HCjNJDNzw8Y
우리는 카밀라 카베요의 하바나,
존메 굿러브 등을 연주하며 불렀다
그 당시 하바나가 영미권에서 바이럴 노래였다
항구도시 리스본이라서 테마 비스무리하게 맞춰서
하바나를 한 것도 있었는데
그 아재는 그 정도 선곡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구도시에서 항구도시에 관한 노래를 불렀겠는가
내가 그 지역 사람이면 지겨울 법도 하다
다만 아재가 하바나 도입부에 내가 즉흥 오부리를 넣은 것을 보고
기타 잘친다며
몬스터!! 이러며 립서비스를 해주었다
근데 그냥 나 생긴게 괴물같다고 표현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계속 버스킹을 하는데
어떤 히피스러운 패션의 여자가 통기타와 카메라 스탠드를 든 채로 와서
우리에게 자릴 내준 아재에게 말을 건넸다
나 이거 다음타자로 여기서 뭐 좀 촬영하고 갈거다
얘네는 언제끝나는거임?
대충 이런 뉘앙스로 말하고 갔다
그래서 아재가 우리에게 한 곡만 더 하고 가자고 했다
(근데 적으면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 곳에 관중은 꼴아있는 노숙자들 뿐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엿듣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 멀리있던 노숙자 무리들 중
정말 쥐죽은 듯 누워있었던 남자 한명이 일어나
그의 매부리코에 간신히 걸쳐있었던
잠자리 선글라스를 고쳐쓰더니
떡진 곱슬머리를 회색 비니를 쓰는 것으로 감추며
옆에 있던 박살나기 일보직전의 자신의 통기타를 집고
우리에게 다가와 한 곡을 뽑았는데
https://youtu.be/g4_fBgGS9sk
건즈 앤 로지스의 Used To Love Her를
다 쉬어가는 멕아리없는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힘내라고 통기타로 오부리를 좀 쳐서 넣어줬는데
그는 세 소절 채 가지 못하고
노랠 급작스럽게 중단하더니
상당히 신경이 곤두선채로
우릴 소개해 준 아재에게 성토하는 것이었다
더는 음악 못하겠다
여기서 관두겠다
이제는 진짜 죽고 싶어졌다
막 그러며 우울해 하였다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다 초를 친 꼴이 되어 아무래도 미안했다
우릴 초대했던 아재는 이런 상황이 예삿일이었는지,
전혀 당황하지 않는 기색으로
그 노숙자를 위로하며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아무튼 분위기도 좀 기울었고, 시간도 많이 지나갔다
그래서였는지,
그 아재가 우리 쪽을 보더니
이제 우리 왓츠앱 계정이나 서로 공유할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황을 무마하고 슬슬 헤어지려는 듯 해 보였고
우린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근데 우리는 왓츠앱이 없었는데
그런거 없다고 대답하니까
화들짝 놀라며
뭐? 왓츠앱이 없다고?
농담 ㄴㄴ 폰 좀 보자
아니 진짜로 없네 빨리 까셈..
해서 신속히 왓츠앱을 다운 받고
왓츠앱 번호를 교환한 후 사진을 찍었다
당시 나는 그 아재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 전세계적으로 페메, 왓츠앱을 썼고
힙스터들은 인스타에 딸린 반쪽자리 메신저인 Dm을 썼고
우리나라에서만 카카오톡 단 하나만을
이상하리만치 독점적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무튼 그 아재 입장에서는
스마트폰 이용자가 왓츠앱이 없는 것이
좀 이상했을 수는 있었겠다
그렇게 아쉽사리 헤어지고
그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구멍가게 아이스크림 집에 가서
우리나랏돈으로 일이천원 정도 주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뿔테 안경을 낀, 회색 나시를 입고 있었던 주인장 여자가 이뻤다
마치 프린세스 다이어리에 나오는 앤 해서웨이를 연상케하는,
너드스러운 패션에 감춰진 수려한 외모였다
가게에서는 익숙치 않은 낯선 장르의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아이스크림 맛은 좋았는데
가게 생긴 폼이 딱 언럭키 베스킨 라빈스였다
암튼간에
낯선 외지인들에게 선뜻 자리를 마련해준
현지인 버스커 아재에게 뒤늦은 고마움을 표하며,
그 마약쟁이 아재의 정신건강도 지금쯤이면 온전하길 빌며,
썰을 마치겠다
조졌다 썰 쓴다고 시간 날려서 할거 밀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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