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원일기(社稷院日記) 소개] 구보(球普) 원년부터 모든 전투를 기록하였으나, 구보협회(球普協會)에서 정보가 소실되어 오늘날 전하는 것은 명성대왕 3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다. 다만, 사관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명성대왕 원년부터의 기록을 복원하였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로골대왕 3년] 전년도 전투 내내 애간장을 태우던 외인 애긴수(愛紧秀)와 결별하고 사도숙희(仕途淑喜)가 새로이 입단한다. 초반 조정훈과 횡령공이 이탈하니 어려움을 겪었다. 허나 사도숙희(仕途淑喜)가 활약하고, 이군(二軍)에서 재곤(宰坤)과 수완(洙完)이 승격하여 활약한다. 훗날, 족가고마(足假故魔)로 몰락하나 이때의 활약은 눈부셨다. 공격진의 활약은 개국 이래 최전성기를 달렸다. 흔이흔이(欣異欣異), 대호(大虎), 가루시아(可累施亞)가 무리를 결성하니, 홍대가(洪大家)라고 불리었다. 무역을 통해 민성을 내주고, 재균을 데려왔다. 기혁의 부상으로 문후차(文後遮)가 유격수로 등장하게 된 시기 또한 이때이다.
성대회(星大會)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자는 흔이흔이(欣異欣異)였고, 대장군에 등극했다.
최고의 활약을 보인 장수는 대호(大虎)다. 아홉 경기 연속 대포를 쏘았는데, 이는 세계최초(世界最初)이다. 공격수에게서 받을 수 있는 8개의 상 중 7개의 상을 쓸어담았다. 발이 느리기에 아쉽게 도루(盜壘)는 수상하지 못했다. 주찬이 도루(盜壘)에서 족지의 대형과 경쟁했으나 무관에 그쳤다.
가을잔치에서는 아수정(我壽政)을 공략하여 내리 두 판을 이겼다. 허나 삼차전에서 전발(全發)이 광고풍선(廣告風船)을 맞추는 사고로 참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모든 일이 꼬였다 하여
애두벌룬(哀頭伐嫩)이라 부른다. 이후로 급격히 흔들린 골대는 범두에게 준준결승에서 탈락한다. 두 판을 먼저 이겼음에도 세 판을 내리 진 것이다. 아군이라 여겨지던 아수정(我壽政)도 더 이상 골대의 편이 아니었다.
야구는 투수의 놀음이라는 말이 적중하였다. 특히 이해에는 전년에 활약했던 임 작가(林 作家)의 부진이 뼈아팠다.
[승호대왕 1년] 대권을 잡지 못한 로골대왕은 계약이 만료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고려학당에서 후학(後學)을 양성하던 양가 승호(梁承虎)가 즉위했다. 즉위 초반에는 전발(全發)을 삼루로, 흔이흔이(欣異欣異)를 좌익으로 기용하는 괴전술(怪戰術)을 펼쳐 고전했다. 양자 승화(承和)를 기용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승화(承和)는 크게 부진하여 오늘날 칩성의 곤(坤)과 모습이 유사했다. 이러한 괴전술로 민심이 흉흉하니 저자의 백성들은 왕을 양승호구(梁承虎口)라 불리었다. 날이 따뜻해지니 대왕은 정신을 차리었고, 성적 또한 급상승하였다. 7월 문후차(文後遮)가 대활약하니 문대호(文大虎)로 불리기도 했다.
대왕은 자신의 괴전술을 빠르게 반성하여 백성들은 양승호감(梁承好感)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후 2위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이는 단일지구에서 최고의 기록이었다.
성대회(星大會)에서는 대왕의 전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호(大虎)가 좌익수비(左翼守備)를 하였다.
구월 구일 전투에는 애새귀(哀崽鬼)의 금수(禽獸) 강민이 홀로 전투를 지배하여 골대의 병사를 학살했다.
가을잔치에서는 일사만루(一死滿壘)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아섭(兒葉)이 놓치면서 패했다. 아섭이 패를 자초했다 하여 손패배내(孫敗北來)라고 부른다. 애새귀(哀崽鬼)의 명장 성근과 초보 왕 중일이 있어서 대권을 노리기 적합하였으나 아쉽게 놓치었다.
골대의 도성 중 하나인 마산(馬山)이 접대(蝶隊)의 택진에게 함락되었다. [승호대왕 2년] 대호(大虎)가 일본 유학을 떠났다. 팔팔(八八)은 군역을 해결하러 경찰청에 입사한다. 전력에 약해졌으나 애새귀(哀崽鬼)에서 소승호(小承浩)와 증대(增大)를 영입해왔다. 반대급부로 임 작가(林 作家)가 인천으로 갔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임훈(林勳)이 잠시 골대에 머물렀으나 다시 애새귀로 복귀했다. 외인은 유만(有萬)이 새로이 영입되었다.
가을잔치에 초대받을 전력은 아니라는 평가가 절대적이었으나 초반부터 치고 올라갔다. 이군(二軍)에서 무결점전투(無缺點戰鬪)를 벌인 용간(勇干)이 본진에서도 맹활약하여 사월을 일위로 마감한다.
한때 육월까지 일위를 기록하였으나 잠시뿐이었고, 내내 이위를 유지했다. 골대의 백성은 호성적에 보답하듯, 성대회(星大會)의 동군(東軍)장수를 모두 골대의 장수로 채웠다.
염전(鹽田)과의 연속경기에서 무명의 장수 황정립(黃晶立)에게 일격을 맞아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극적으로 가을잔치에 진출했으나, 이년 연속으로 골대를 패퇴시킨 범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차전 초반,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자 승호대왕은 고등야구(高等野球)해서 죄송하다 읍소했다. 이후 홍삼(紅蔘)을 상대로 대타자(代打者) 준서가 동점포를 쏘아올렸다. 준서는 전투 후 이러한 말을 남겼다.
"야구(野球) 오래하고 볼 일이다" 준서의 자는 원래 남섭이었다. 백골포 원년, 골대로 건너와 뚜렷한 활약이 없었으나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이 되었다. 이에 감복한 백성들은 치포준서(志砲夋序)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차전에서는 동점 상황에서 홍삼(紅蔘)을 상대로 덕한(德韓)이 대포를 쏘아 승리했다. 덕한은 전투 후 이러한 말을 남겼다.
"무역(貿易)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덕한은 본래 범두의 포수였다. 골대에 지명받고 석소(石笑)를 지은 명성과 무역을 통해 골대로 왔다.
삼차전에서 패하자 이년 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러나, 사차전에서도 홍삼(紅蔘)을 공략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연장전에 접어들자 부록터(附錄攄)가 등장했다. 부록터(附錄攄)의 공을 받은 골의지(骨義智)가 도루를 저지하다 실책을 범하니, 준서가 맹렬히 진격해 적의 목을 베었다. 이 상황을 전하는 명재의 발언이 압권이었다.
"이제 인천(仁川)으로 가는..." 까지만 전해진다.
대권을 쥔 병철대왕 시기 이후 처음으로 준준결승에서 준결승으로 도약하였다.
준결승전에는 전년도에 패한 애새귀(哀崽鬼)였다. 두번의 승리를 주고받았으나, 오차전에서 풍기(風機)가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도성하는 자를 살려주어 실점한 것이었다. 계집이나 할 짓이라 하여
강중전(姜中殿)이라 불렀다. 이해 이후 골대가 준결승에 진출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승호대왕이 물러났다. 골대에 즉위하기 전 고려학당에서 입시비리(入試非理)에 연루된 삭탈관직되어 하옥되었기 때문이다. 폐서인 처분은 간신히 면했으나, 가을잔치에 초대받은 공적을 인정받아 승호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빙시진군 원년] 가을잔치에 단 한번도 초대받지 못한 왕, 빙시진군(氷始眞君)이 즉위했다. 접대(蝶隊)가 구보에 참여한 시기도 이 때이다. 이해 골대는 패한 전투보다 승리한 전투가 많았음에도 가을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동칙이 다른 국가에게 승을 헌납한 탓이었다. 백골포 시기의 골대와 같은 이치이다.
접대(蝶隊)와의 전투에서는 우위를 점했다. 그 중에서 일화가 하나 있으니 소개하고자 한다.
접대(蝶隊)와의 전투에서 지고 있던 중 전발(全發)이 포를 쏘았으나 불발에 그쳤다. 하지만 전발(全發)은 이를 대포로 오인하여 포를 던지는 바돈(㞎純)을 작렬했다. 이 광경을 보고 접대(蝶隊)의 장수들이 폭소하니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이 소식이 이역만리 무루부(武屢部)에도 진출하여 세계적인 망신을 샀다. 이에 골대의 백성들은
월두수타(越頭秀打)라는 칭호를 전발에게 하사했다.
[빙시진군 2년] 조정의 신하가 사사건건 왕의 집무에 방해하니 국가가 혼란스러웠다. 장수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자 하는 기관 시시희비(是是喜非)를 설치하자 장수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에 조정의 신하 하진과 문한이 파직되었다. 후임으로 암군 윤원과 창도숙희(倡道淑喜)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지고 빙시진군(氷始眞君)이 왕좌에서 물러났다.
아세아대회(亞細亞大會)에 선발된 아섭과 애두황(愛斗黃)은 군역을 면제받고, 전발(全發)은 입대했다. 군역을 해결하며, 전발(全發)은 안 선생과 교류했다.
더 나은 환경에서 전투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팔팔(八八) 또한 골대를 떠났다.
내용이 길어진 관계로 3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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