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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과연 전통건축의 구세주인가?
요즘 글을 거의 안쓰고 있는데, 경복궁 관련해서 말들이 많길래 경복궁을 중건한 인물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말해보려 함.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별 악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들은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음. [광화문과 북악산]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로지 문화재와 건축에 국한된 부분이지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재들이 지금 남아 있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음. 다만,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복궁을 중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함. [안동 호계서원, 산청 덕천서원, 안동 묵계서원, 밀양 칠탄서원. 사진 : 문화재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서원철폐령이었음. 서원은 조선시대에 지방권력을 틀어쥐고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어 지방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있었음. 특히나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해져 가고 있던 상황에, 서원의 악행은 묵과할 수 없던 부분이었음.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훼철시킴. 정책적 측면을 떠나 문화재적 가치로만 접근하자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에서 서원은 궁궐 다음으로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고, 또한 그 수도 많았기에 당시에 1000개소가 넘던 서원을 극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없앴다는 것은 조선 건축의 한 뿌리가 사라진 것과도 같음. 훼철 이후 여러 서원들이 재건되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입지나 배치가 훌륭한 곳들이 많아 대원군에 정책에는 수긍하면서도 50년만 더 버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함. 특히나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의 우저서원, 파산서원, 사충서원 등 남아있던 47곳 중에서도 소실된 것이 많은 점은 더욱 안타까움. [경복궁 흥례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복궁임.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된 이후 몇몇 왕들이 찾기는 했으나 270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음.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초기 궁궐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뜻함. 조선 초기는 경복궁-창덕궁 양궁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태종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주로 머물렀으나 세종 등의 경우에는 경복궁을 선호하였음. 따라서 경복궁에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음. 세종조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과학적 성과들의 흔적이 1865년까지 경복궁에 남아 있었는데, 옥루, 앙부일구 등이 설치되어 있던 흠경각과 일영대, 천문관측을 하는 장소였던 간의대 등이 남아 있었음. 그러나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며 이것들은 모조리 헐리고 말았음. 이를테면 간의대 옥석의 경우에는 근정전 뜰의 품계석으로 쓰였음.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전략)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과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기록에서 경복궁 터를 다녀온 호조판서 심이지가 보루각 터를 둘러보았으며 흠경각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다고 했는데, 이는 1794년의 기록임. 이 흠경각은 광해군 때인 1613년 재건한 것인데,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효종조 잠시 언급되었다가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음. 물론 정조 때에도 이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중건 시점이 이로부터 70년 뒤이니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경복궁 경회루] 흔히 조선 초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돌기둥에 용 조각이 있었음에 주목함. 성종조에 조각된 이 돌기둥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다가, 중건 시점에는 48개 중 3개만 서 있고 나머지는 무너져 있었다고 함. 중건 시점에서 용 조각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돌기둥들이 화재로 상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계체석으로 썼다고 적혀 있음. 아마도 경회루 기단의 돌들이 검게 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돌기둥들을 깎아 재사용한 것으로 보임. 물론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조각은 분명 남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른 용도로 재사용되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음. 현재의 돌기둥들은 삼청동과 송계별업 등지에서 새로 떼어 와 제작한 것들임. 가끔 가다 용 조각은 오래되서 지워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 한편, 경복궁을 재건하던 당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단과 월대는 다시 제작되었음. 당시 기록을 보면 외형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돌을 뜯어내니 안쪽은 물이 스민 흔적이 없이 완벽했다고 함. 기단 안쪽을 채우던 돌들은 그대로 사용했다고는 하나 월대와 기단은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흔적이 아님. [경희궁 흥화문과 숭정전. 사진 : e뮤지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바로 경희궁임. 경희궁은 비록 직전 왕들인 헌종-철종조(1834-1864)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헌종 이전의 순조를 비롯하여 인조, 숙종, 영조 등 많은 임금들이 애용하던 궁궐이었음.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남아있었다면 큰 역사적 가치를 가졌을 것임.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며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이 헐리게 되었음. 따라서 경희궁은 위 사진과 같이 5개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음. 막상 헐고 나니 상한 목재가 많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함. 경희궁은 이후 망국 이전까지 이따금 군사를 사열하는 등의 장소로 쓰이다가 망국 이후 남은 건물들은 모조리 팔려나가고 그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음.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오래 서 있었음. 흥화문은 1988년이 되어서야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옛 터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래 자리는 되찾지 못했음. 참고로 박석 갖고도 시끄러운 거 같은데, 내 추정으로는 임란 이전까지는 박석이 없었을 것으로 보임. 현재 경복궁 내에서 박석이 사용된 장소는 근정전 앞마당뿐임. 그런데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과 안현(안국동고개. 현재 광화문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길)에 깔려 있던 박석들을 싸그리 철거해서 들고 왔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에서 새로 떼어 왔다고 함. 애초에 박석은 바닥에 까는 돌이니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한들 굳이 철거한 후 다시 깔 필요는 없어 보임. 중건 이후 고종은 30년도 안되는 경복궁 생활 동안 멀쩡한 침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이후 또 다시 폐허가 되었음. 군주의 위상을 세우겠다고 엄포한 고종은 또 다시 궁궐 공사를 시작했고, 여기에 더불어 평양의 풍경궁이나 안동별궁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음. 경운궁은 완공된 지 1년만에 전소되어 중층 중화전 건물을 단층으로 재건하는 촌극을 벌였고, 풍경궁은 완공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 중 점거하여 돈낭비로 그쳤음. 언젠가 고종의 토목공사 욕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음.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벌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원군을 찬양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음. 더군다나 그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봤을 때,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시발점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19세기 조선에 그대로 대입하여 흥선대원군을 평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psp에 대해 알아보자
psp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플레이스테이션2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소니에서 2004년 말에 출시 된 게임기로 ps1 이상 ps2 이하의 포지션을 잡았었음이후에 공식 에뮬레이션으로 ps1이 지원되서 psp에서 ps1게임을 구매해서 플레이하는것도 가능했고 그리고 멀티미디어 기기 포지션을 잡았는데 umd 라는 dvd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소형 광디스크 매체를 사용해서 1.8기가 까지 활용이 가능했고 당시로선 거대하고 괜찮은 편이었던 272x480 해상도에 4.3 인치 디스플레이로 게임하면서 겸사겸사 영화도 보는 느낌으로 개발되었음하지만 1세대에 해당하는 1000번대 제품은 문제가 많았는데 일단 게임 라인업이 적었고 플라잉 디스크라고 불리는 umd가 날아가는 현상 그리고 280 그램이나 되는 상남자 시절인 당시에도 무거웠던 무게나 광디스크인 umd 특성상 게임의 로딩 시간이 많이 길었고 엄청나게 짧은 배터리 사용시간 떄문에 이땐 좀 애매한 제품이었음 실질적인 psp의 시작은 2007년에 발매된 2세대인 2천번대부터라고 볼수있는데무게가 189그램으로 큰폭으로 줄었고 tv연결 기능의 추가 플래시 메모리가 64mb로 증가하면서 umd의 로딩 속도가 단축되고 소비전력도 전세대 대비 감소 아날로그 스틱과 버튼의 내구성등이 큰폭으로 개선되면서 드디어 쓸만한 제품으로 탈바꿈 되었음그리고 이때 당시 거치형 콘솔은 ps2에서 다음세대로 넘어오게 됐는데 ps3이 발매 되는 상황이었음이때 일본의 게임회사들은 여러가지를 선택 해야했는데 레거시 기기가 된 ps2로 게임을 낼것인가 상대적으로 성능이 부족한 닌텐도 게임기인 wii nds로 게임을 낼것인가 아니면 보급대수가 적고 거실에 앉아서 크고 비싼 게임기로 실행해야하는 서양의 트리플a급 게임들이랑 경쟁해야되는 ps3으로 게임을 낼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psp로 게임을 내던가 일단 psp로 나온 대표적인 게임을 예로 들면 캡콤의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이야기 할 수 있음시작은 ps2였고 그뒤로도 몬스터헌터 g가 ps2/wii로 출시된 게임이었지만 psp로 출시되기 시작하면서 이 게임의 진가가 드러나게 됨 스마트폰이 윈도우 모바일로만 출시되던 시절 지인끼리 모여서 psp로 함께 근거리 통신으로 멀티플레이를 하는 경험게임성 자체는 거치형 시절부터 호평이었지만. 이런 특징 때문에 몬헌 포터블 시리즈는 나올때마다 판매량이 급증했고 포터블 최종작인 3rd는 490만장이 팔리면서 이후 3ds판으로 3ds판에서 월드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되어줌스퀘어에닉스도 파이널판타지로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파티단위로 운용하는 파이널판타지 영식 대전 액션 게임인 디시디아 파이널판타지현대적인 시스템을 적용한 파판7의 프리퀄 게임인 크라이시스 코어 파이널 판타지 등 거치형 게임기로 출시하려는 대형 게임에선 시도하기 힘든 요소들을 시도하게 됨 반다이남코도 가정용/아케이드용으로 출시되었던 철권 시리즈를 이식하거나 소울칼리버의 외전 작품등을 출시하고 아이마스도 살짝 출시 지금은 소울 시리즈로 유명한 프롬소프트웨어도 아머드코어나 따끈따끈 아이루 마을 같은 게임을 제작하면서 후속작을 만들기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음 당시 경쟁 제품이었던 ndsl 대비 판매량은 절반정도였지만 ps3 개발환경이 성숙해지고 ps4, 3ds이 출시되기전 일본게임회사들이 성장하기 위한 역할을 해줬다는 점에서 psp는 알아보고 가면 좋을거같다 이말이야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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