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이즈 7권의 표지. 등장인물 중 한명인 우즈메. 게이 만화인 주제에 여캐는 기깔나게 그렸다>
원래는 더 길게, 더 성의있게, 최대한 열심히 감상문을 쓰려고 했지만 포기했습니다. 머리에 든 게 조금 있어야 뭐라도 늘어놓으며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그래서 내가 느낀 만화의 주제는 이러이러하고,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주절댈 수 있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었다' 말고는 안 떠오르지 뭡니까. 대단한 감상문을 쓰기에는 깜냥이 모자라서 안되겠고, 그렇다고 참 재미있었다로 초등학교 일기마냥 날림으로 쓸수도 없으니, 최대한 머리를 굴려 조금 적어보려 합니다.
책 구매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사비를 털어 아가페이즈를 보내주신 키 X 갤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얼마나 아가페이즈에 진심이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재미있습니다. 패러디 만화의 한 장면으로만 보고 '와 죽인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냥 만화로서 순수 재미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청춘 스포츠물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0대들이 모여서 몇 번 없는 기회를 불사르며 운동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재미가 없지??
개성적이고 각자만의 스토리가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자극적인 소재인 풍수마구(솔직히 이게 무슨 비유인지 궁금했는데 진짜로 나와서 당황함). 동화 인어 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유리의 비극적인 스토리......재미를 느낄 구석은 참 많지만 저는 주제가 참 마음에 들더군요.
아가페이즈.
1권 마지막인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듯 순수한 사랑을 하는 사람(유리, 우즈메)가 모여 유리가 우리는 아가페이즈라고 자칭하죠. 괴상한 캐릭터가 나와서 실컷 떠들며 대충 아가페는 대단하고 숭고한 것이라고 떠들기는 하는데, 아가페는 뭘까요?
인터넷에 방금 쳐보니 '무조건적인 사랑' 이랍니다. 이 인터넷 검색 결과와 작중에서 다루는 아가페라는 말의 정의는 대충 일치합니다. 단어가 조금 다르긴 합니다. 작중에서는 아가페를 '보답 없어도 유지되는 사랑' 이고, 인터넷에서는 그걸 '무조건적인 사랑' 이라고 하죠.
말만 들어도 숭고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사실 이 아가페적인 사랑은 작중에서 마냥 호의적으로만 비춰지진 않습니다.
아직 아가페를 깨닫지 못한, 그러니까 평범한 욕심 많은 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아가페라는 이해하지 못할,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 모순되는 바보짓이기 때문입니다. 작중에서 처음으로 아가페를 실행하는 인물은 유리인데, 유리를 보는 주위 인물들의 시선은 따끔합니다. 사진으로 넣은 우즈메도 아마 '네가 뭘 받는데 자꾸 이러냐?' 라는 논지로 몇 번이고 태클을 걸 겁니다.
사실, 우즈메의 시선이 정상적인 겁니다. 당장 디씨를 보세요. 디씨 실베나 야갤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소'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일단 제쳐놓고서라도, 상대가 나를 눈치도 못채는데 열심히 노력한다. 등의 해바라기남의 연애담이 올라온다고 가정해봅시다. 아마 야갤이든 주갤이든 눈팅을 일주일만 해봤으면 '퐁퐁남'으로 댓글창이 도배되는건 어렵지 않게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지적이고 싶은 사람은 장문의 댓글을 쓰기도 하겠죠. '그게 무슨 사랑이냐? 너만 알고 상대는 모르는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양방향적인 교류다. 지금 네가 하고있는건 그냥 여자에게 스윗하게 대하는 나에게 취한 자기만족이다.' 뭐 이런 논지로.
자기만족이라는 단어는 작중에서도 등장합니다. 자신의 음악도 포기하고, 몸도 망쳐가면서 토라키를 위해 풍수마구를 던지는 유리를 향해 그러죠. 그건 자기만족이다. 조금 더 확장해서 보자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자기만족이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아가페이즈를 읽으며 이 부분이 참 성큼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렇죠. 유리는 토라키를 위해서 야구를 합니다. 그렇게 야구를 하게 된 이유는 유리가 게이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의 마음 속에 토라키와 같이 침대에 들어가 연인처럼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1권까지만 해도 확실히 그랬습니다. 나중에 갈수록 진정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진화하지만). 그런데 정작 유리는 자신이 토라키를 좋아해서, 토라키를 위해 야구를 하고 있다는 걸 밝히지 않습니다. 제 5의 풍수마구를 사용해 목소리를 잃기 직전에 가서도, 자신이 게이인 것까지는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토라키를 좋아한다는 건 결코 밝히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환생 팬만화로 다들 많이들 본 그 장면. 유리는 자신의 본심을 고백하지 않는다>
고상한 장면이긴 합니다. 얼마나 슬픕니까? 이미 팬만화를 통해 저 장면을 몇 번이고 봤는데도 저는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꾸준히 유리가 목소리를 잃을 거라는 떡밥이 속속들이 튀어나오는데 끝까지 본심을 숨기는 거 보세요. 마음이 찡하고 안 울리면 이건 사람이 아니라 기곕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쓸모가 있냐 이거죠. 뭐가 달라지는데? 저기서 본심을 숨겨서?
본심을 말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토라키가 저기서 본심을 말했다고 더러운 게이라고 말하면서 경기를 던질 위인도 아니고. 유리는 어찌됐든 최선을 다해 토라키를 도울 텐데, 그 과정에서 나 너 좋아한다. 정말로 열심히 할테니 날 좀 봐줘. 하고 말하는게 문제가 뭐가 된다는 겁니까???
위에서 말했듯이 이게 자기만족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냥 최대한 착한 자신을 연기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연기하고, 거기에 취해버린 자기만족이죠. 어째서 아가페여야 합니까? 왜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아가페이즈> 라고 짓고, 그토록 작품 9권에 걸쳐서 계속 아가페를 밀어주는 걸까요?
여기서부터는 개인 의견입니다만, 저는 작품의 주제가 아가페인 이유를 아가페가 '가장 순수한 노력'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욕심이 가득해서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노력도 노력이겠죠. 하지만 작중에서는 이미 '무욕'의 경지가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고, 욕심이 많은 것보단 욕심이 없는 게 훨씬 낫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언급을 통해 봤을 때, 아가페란 욕심 없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아가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다른 사랑을 위한 노력보다 훨씬 더 숭고합니다.
결말 부분에서 아가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전부 보상받습니다.
유리는 목소리를 잃었으나 다시 한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고시엔에 도전하며 목소리를 되찾을 기회를 얻습니다. 우즈메는 유리에게 처음으로 자진해서 키스를 받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생긴게 별로라 이름은 안 외웠는데, 그 풍수 컴퓨터를 달고다니는 꼬마 캐릭터도 마지막에 유메의 팬티를 포기함으로서 아가페를 실천하는데, 결국 유메와는 안 이어져도 새로운 사랑을 찾는 걸 암시합니다.
게이가 등장하고, 주인공은 결국 목소리를 잃고......까먹기 쉽지만, 아가페이즈는 소년만화입니다(아마).
소년 만화의 법칙 중 하나라면 역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온단 것이겠죠.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노력인 아가페를 위한 노력을 한 등장인물들에게는 모두 그만큼의 보상이 돌아옵니다. 크든 작든, 만족할 수 있는 형태와 양으로. 작중에서는 이걸 중국식 건물에 빗대 표현했었죠. 타인에게 배푼 선행이 나에게 돌아온다. 풍수로 끌어온 건 대회의 승리가 아닌 우리들의 인연이었다.......
아가페는 이제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자기만족이 되려고 한다면, 자신에게는 손해밖에 되지 않아야죠.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결과로 주인공들은 보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기만족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결말이 참 마음에 듭니다.
단순히 소년만화라서 아가페를 썼다! 노력을 많이하는 사랑이여야 결과가 좋으니까! 가 아니라, 작가의 작품관이 보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노력하는 사랑이 큰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호감이 듭니다. 순수한 동화를 보면 내용이 조금 억지여도, 전개가 이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처럼요. 마음이 훈훈해지는 훌륭한 로맨스 만화입니다.
아직까지 <아가페이즈>를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제가 올린 짤밖에 모른다면, 지금 당장 구매하세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숭고한 자기희생과, 진짜 진짜 게이, 그리고 자기희생하는 게이가 세상으로부터 보상받는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책을 보내주신 '키 X' 갤러님에게 고맙습니다. 덕분에 좋은 만화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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