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왜 거기에 있어?"
내가? 네가?
모니터 속 게임 캐릭터 선택 화면에 서있는 건 분명 다름 아닌 나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국인 남성의 모습.
내가 왜 거기 들어가 있냐고.
"너는 또 왜 여기 있고?"
거울 속에 비치는 미소녀의 모습은, 분명 어제까지 저 캐릭터 선택 화면에 서있던 게임 캐릭터의 모습이었다.
"이게 뭔데 대체?"
으아아악! 정신 나갈 것 같애!
*
이름, 한서준.
나이, 스물 넷 (만 23세).
재수 없는(재수를 안했다는 뜻)
평범한 3학년 공대생.
근데 이제, 거기에다가 군필을 곁들인.
나는 그야말로 열심히 사는 한국 남자(페미용어 아님)의 표본이었다.
인생 좌우명은 아 오늘도 자퇴하고 싶다.
후……, 너희는 전전과 절대 쳐다보지도 마라.
내가 대단한 연구를 해서 인류의 과학 수준을 진일보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없으면 절대 오지 말라고.
공대는 대체로 빡세다고 유명하지만, 전전과는 그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개빡세다.
하루에 실습과 이론 과제가 3개씩 쏟아지는 걸 보면 'F 맞고 재수강할까?'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나고,
열두 시간 걸려 납땜하고 프로그램 짰는데 작동 안한다고 최하점 맞았을 땐 자퇴가 아니라 자살을 하고 싶더라고.
새내기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전공 바꾸라고 어깨 잡고 흔들던 선배,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되게 좋은 사람이었다.
광인이 아니라 귀인이였다고! 그걸 그 때 알았어야 했는데!
만일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입학 전으로 돌아가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면서 당장 다른 과로 바꾸라고 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대체 무슨 대단한 영광을 누리겠다고 여기 왔는지.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기행을 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내 기행은 굉장히 얌전한 편이었다.
현실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하는 거기 때문이다.
나는 RPG 게임을 한다.
방금 대학이 그렇게 빡세다며 어떻게 시간 잡아먹는 괴물인 RPG를 하냐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라. 그래서 난 레벨은 안 올린다.
내가 즐기는 건 바로 PVP. 보정 컨텐츠기 때문에 레벨이 높을 필요는 없다.
PVP 필드 안에서는 고렙이건 저렙이건 능력치는 평등하거든.
필요한 건 오직 컨트롤 뿐. 그리고 그 부분에는 자신이 있다.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기행이 아니라 평범한 거 아니냐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개못하네 ㅋ]
[매너채팅합시다]
[개못하는 qt한테 왜 내가 매너를 지킴?]
[참고로 이 qt는 귀엽다는 뜻의 qt임]
[qt zz]
[꼬우면 이겨보시든가 ㅋ]
아, 이긴 뒤에 적을 조롱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긴다.
이 몸, 재능 넘치는 초고수기 때문에.
덕분에 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 사건사고게시판을 켜고 내 닉네임을 검색하면 박제된 글이 수십 개는 나온다.
그리고 댓글에는 꼭 한 마디씩 적혀있다.
[얘 원래 유명한 병신이에요 박제글 수십 개는 더 있음]
[상종 ㄴㄴ]
"아이 좋아."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스트레스는 나누면 없어지는 법.
내 빡침을 남에게 떠넘기고 나니까 정말이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흐뭇."
오늘은 기분 좋게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날 밤에 무슨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까 가슴이 엄청나게 답답했다.
무슨 혹이라도 생긴 듯이,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혹이?
"씨발 이게 뭐여?"
진짜 생겼네 혹?
목소리는 또 왜 이러고, 이 치렁대는 머리칼은 뭐며 앞머리는 언제 눈을 찌를 정도로 자랐다냐?
어마어마하게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방 풍경이 묘하게 전과는 다른 듯한…….
"누구세요?"
내 방에 있을 리 없는 화장대 위의 거울을 보며, 아니 이게 거울일 리 없잖아.
거울에는 내 모습이 비쳐야 하는데.
거울일 리 없는, 아니 현실을 보자, 아마 거울인 듯한 것에 비치는 내, 저게 정말 내 모습이 맞아?
백금발이 아니다, 자연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머리색, 분홍빛을 엷게 띈 은발.
가슴은 어마무시하게 크다. 씹돼지년 거르고, 마른 여자가 이런 가슴을 가진 건 태어나서 처음 봐.
눈동자의 색이 보라색? 이것도, 만화에나 나오는 색깔이 아니냐고.
근데 묘하게 익숙한 얼굴에 조형이다.
어디서 봤지?
"잠깐, 이거?"
그래, 여기에 딱 귀만 달고 꼬리만 달면 내 캐릭터야.
구미호를 모티브로 한 환영술사 캐릭터.
하필 쓰는 것도 트리키한 속임수 스킬들이라, PVP에서 상대할 때 제일 '짜증나기'로 유명한 캐릭터.
즉슨, 인성질을 하기에 최적화된 캐릭터란 거.
나는 그게 좋아서 그 캐릭터를 골랐었다.
"이게 무슨 현상인데 대체?"
하지만 난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면 씨팔 오늘은 존나 1교시였기 때문이다 니미.
"정신 나갈 거 같애."
다행히 학생증을 찾아보니 이 얼굴이 제대로 찍혀있었다.
[한초연]
[공과대학]
[학사과정]
[전기정보공학부]
"한초연이 누군데 씨발련아."
본인 이름은 한서준입니다만?
다행히 학부 그대로, 학번 그대로, 핸드폰 꺼내 시간표를 확인하니 역시 시간표도 그대로.
잠깐 시간표가 그대로?
"씨발 일단 나가야되네?"
본인,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관계로 1교시 수업 날은 정말 지각하지 않을 시간에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당장 준비하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이에요.
"으아악! 씨발!"
비명을 질러도 뭐가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
일단 곧바로 짐 챙겨서 출발해야한다!
*
다행히 지각하진 않았다.
근데 강의실에 오자마자 웬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새끼가 친한 척을 하면서 '초연이 오늘은 머리 안 감고 왔네?'라고 짓궂은 척을?
네 얼굴로 하면 짓궂은 게 아니라 주먹을 부르는 짓이니까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원래 복학생 은신도적이었다.
아무도 나를 못본 척해서, 아니 그거 진짜 못본 거였나?
하여튼 아는 척 하는 인간은 없었다 이 말이야.
극남초과라 비슷한 처지의 동지가 은근 있긴 했지만, 사내새끼들끼리 친해져봤자 별로 재밌을 것도 없고.
근데 왜 이 새끼들 갑자기 다 나 아는 척 함?
물론 내가 좀 많이 변하기는 했는데?
진짜 붙들고 물어보고 싶네. 님 저 아세요? 뭘 아는데요? 하고.
물론 그 망상은 망상에서 그쳤다.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 사회라는데 제 발로 나서서 학연을 조져놓을 필요는 없지.
내가 공부를 왜 열심히 하는데? 그냥 잘 살고 싶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래서 이 현상 대체 뭐임?'
이성적인 공학도로서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씨발.
이게 과학적으로 설명될 리 없잖아?
씨발 갑자기 없던 혹이 두 개 생겼는데, 수업에 집중이 될 리가 없잖아요.
뭐? 아래쪽 혹 두 개는 오히려 없어졌다고? 등가교환의 법칙이라고 하기에는 얻은 게 너무 커다란데?
이 얼굴은 또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자꾸 쿨타임 돈 것마냥 30초마다 핸드폰을 꺼내서 셀카모드로 살펴보게 돼.
교수님이 출석 부르다 나를 불렀는데, 그러니까 한초연이를 불렀는데 내 이름 부르는 줄 몰라서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시선이 존나게 뜨겁게 느껴지길래 앞을 보니까 교수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도장을 확실하게 찍히고 말았구나.
"한초연 학생?"
"네!"
"강의실에선 교수한테 집중해줬으면 좋겠네요."
"죄송합니다!"
"와하하하하."
아침부터 강의실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이렇게 주목 받고 싶지는 않은데 씨발.
몇 분 눈치를 보다가 교수님이 이쪽을 잘 안 보는 것 같길래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또 셀카모드.
"혹시, 세수도 못했어?"
싹바가지 없이 대놓고 머리 안 감았냐 물어본 씹새끼가 불안장애 걸린 개새끼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나한테 또 말을 걸었다.
자꾸 셀카모드를 켜고 보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넘겨짚은 모양.
아닌데? 그냥 존나 예뻐서 자꾸 보는 건데?
세수는 했어. 머리는 못 감은 거 맞지만.
길러본 적은 없어도 보는 순간 딱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걸 감으면 강의 무조건 지각이라고.
"근데 누구세요?"
"아하하하, 초연이 오늘 진짜 재밌네."
말투 뭔데, 목소리는 왜 까는데 이 씨발새끼야.
네 면상에 이런 SSS급 도내 최정상급 미소녀한테 작업을 거는 게 가당키나 하냐?
주제를 알거라 잡종.
"그래서 누구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20학번 정동현이라고 합니다."
녀석은 무슨 상황극인줄 아는지, 과장된 연기 톤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근데 뭐야 이 새끼? 아직 미필이네?
"근데 왜 반말이야? 너 선배가 아주 우습지?"
"삼수해서 너랑 동갑이잖아. 그것도 기억 안 나?"
이제서야 장난 아닌 걸 깨달았는지, 녀석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런 인간이 있었나 없었나, 사실 잘 모름.
"근데 너 나랑 친하냐?"
그럴 리가 없는데?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야?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것처럼?"
"혹시, 나 인싸야?"
그러면 안되는데.
그러면 좆되는데?
실험, 보고서, 과제, 딸딸이, 게임, 여기에 인간관계 관리하는 시간이 추가되면은 내 머리는 펑하고 터지고 말걸?
나는 이미 충분히 바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이 이상 스케줄을 늘리는 건 그만둬라.
"당연하지. 너 우리 학부 최고의 스타잖아."
"?"
제 대학생활이, 좆된 것 같습니다.
보통은 좋아할만한 일이긴 한데, 나는 INTP란 말이다.
뭐? 무슨 공대생이 MBTI를 믿냐고?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설문지에 써서 짜장면을 좋아하는 타입이란 결과를 받았는데 그걸 못 믿을 건 또 뭔데 병신들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아무튼 극한의 내향성 성격인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시련이었다.
아는 척 그만! 스탑! 노우!
'아 씨발, 여기 공대였지.'
내가 입학한 년도 우리 학부 신입생은 157명, 워낙 커다란 학부다 보니 어마어마한 학생수였지만 그 중에서 여자는 단! 15명! 이었다.
근데 그 중에서 이런 괴물, 나쁜 의미가 아니라 개쩐다는 의미의 괴물이 끼어있으면?
여자에 굶주린 발정난 수컷들의 구애행위가 물밀듯이 이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
이건 씨발, 진짜 좆됐구나!
*
수업이 끝난 후,
"너 수업에 집중 못한 거 같아서, 필기한 파일 톡으로 보내줄게."
"고마워!"
생각보단 나쁘지 않을지도?
스타트 ㄱ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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