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인 도시는 쓸쓸하다.
차갑고 감정 없는 눈송이는 도시 곳곳에 쌓여 냉기를 더했고 싸늘한 바람은 지나가는 이들의 열기를 앗아갔다.
군데군데 불을 피운 사람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 차가운 계절에는 모자랐다.
몸을 웅크린 사람들을 지나 도심 공원 한 구역에 있는 건 붉은 머리 여자였다.
붉은 모습의 여자는 아름다웠다.
도도한 콧날과 역 팔(八) 자를 그린 눈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움츠러들게 하기 충분했고 붉은색 정장에 굽 없는 구두는 여자의 직업을 종잡을 수 없게 했다.
하아.
여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겨울에 내쉬어진 숨은 하얀 김을 만들었지만 여자는 추위를 타지 않았다.
여자의 이름은 헤르마니아.
거대한 해상 도시의 주인이자 최강의 무기라 불리는 의천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날에는 용의 비늘을 형상화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수 십명의 랭커들이 노리고 있는 의천검은 방금 헤르마니아가 차지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 곳에 가장 먼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네.”
중얼거린 헤르마니아가 의천검을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티잉.
찌르르하고 울리는 검명은 누가 보아도 명검이라 할 만한 무기였지만 헤르마니아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고작 이런 게 보상일 줄 알았으면 이번 의뢰는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헤르마니아는 의천검이 들어있던 석탑에 앉아 두 다리를 까닥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고 곧 기다리던 무리들이 찾아왔다.
“봐! 저깄다!”
무리중 누군가가 손을 뻗어 의천검을 가리켰지만 누구도 이 이상 입을 열지 못 했다.
붉은 정장의 헤르마니아.
거대한 도시의 주인이자 이 땅 위에 누구나 알고 있는 강자다.
무리가 주춤 거리는 사이 헤르마니아가 석탑에서 내려왔다. 껑충 뛰어내린 헤르마니아는 의천검을 바닥에 꽂았다.
퍼석.
“너희들 이거 갖고 싶어서 찾아온 거냐.”
내뱉는 말이 거칠었지만 누구도 그 발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무리의 눈동자는 바닥에 꽂힌 의천검을 향했다.
지금 이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있었지만 이들 역시 어디 내놓아도 빠질 곳 없는 강자였다.
무리 중 천둥의 레가르는 생각했다.
헤르마니아가 강하다지만 이 정도 인원으로 이기지 못 할까.
하물며 싸우는 사이 무엇이든 베어낸다는 의천검을 손에 넣으면 헤르마니아 또한 단칼에 베일거다.
무리의 머리 속이 치열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그녀가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가져가고 싶은 녀석은 앞으로 나와라.”
“젠장… 망할 마녀 자식.”
“오, 너 한번 해볼 거냐.”
시선이 향하는 것만으로 잡음이 멎었고 남성은 주늑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농담이야 이 자식들아. 사내놈이라면 당당하게 싸워서 가져가라. 그리고 싸워야 할 대상은 나다.”
마녀의 선언에 무리들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레가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순간 의천검만 손에 넣는다면 재수 없는 마녀를 베어내고 세계 제일의 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세를 낮춘 레가르는 뒷걸음질 치며 무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헤르마니아의 정면에 한 검수가 뛰어든다.
곧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주먹이 검수의 턱을 날렸고 검수는 2미터쯤 날아올라 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덮치면 되리라 생각한 이가 돌려차기에 맞아 쓰러지고 무리는 엉망진창으로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황소 한 마리가 들개 무리를 뒤집어 놓는 꼴이었다.
아비귀환의 장면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레가르가 발을 움직였다.
바닥에 의천검을 향해 혼신의 슬라이딩을 하는 순간 단단한 무언가가 자신의 뒷발목을 잡았다.
“도둑 고양이짓은 안 돼지.”
밝은 표정을 한 헤르마니아의 얼굴이 보이고 레가르는 자신이 잘못 들어왔음을 알았다.
“우라질… 저 검만 있었더라면.”
“너 그거 진심이냐.”
“그래, 진심이다. 저 의천검만 있었더라면 너 같은 마녀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단 말이지.”
헤르마니아는 레가르의 발에서 손을 놓고 의천검으로 손을 뻗었다.
용비늘 무늬의 검이 뽑히고 검 손잡이가 레가르 앞에 드리워졌다.
“잡아.”
“응…? 이걸 내게 준단 말이냐.”
“네가 그거 들면 이긴다며.”
“그렇지… 그렇긴 한데.”
의천검을 쥔 헤르모니아의 표정이 장난아니게 구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악귀나찰이라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는데 레가르는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의천검이 있어도 너는 이기지 못할 거 같군.”
“그래? 그래야지, 귀여운 자식 엉덩이를 차주랴.”
“아니, 아니 괜찮다… 난 이 전투에서 빠지겠다.”
레가르가 슬그머니 물러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무리들도 하나 둘 씩 전의를 상실하였는 지 저들끼리 모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여있던 랭커들이 모두 흩어지고 헤르모니아가 의천검을 역수로 잡아들었다.
“나참, 이렇게들 깡이 없어서야.”
현존 최강이라 불리는 의천검을 놓고 다투는 자리였지만 평소처럼 끝나고 말았다.
시시하단 표정을 지은 헤르모니아는 의천검을 붕붕 돌리며 작은 축하를 벌였다.
“시시한 자식들. 이건 녹여서 악세사리나 만들까.”
의천검을 노리고 있던 랭커들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발언이지만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의뢰인의 손에 들려줘야한다.
이번 일을 의뢰한 건 저 높은 곳에 사는 한 노괴의 의뢰였다.
“아, 망할 영감 드럽게 귀찮게 한다니깐.”
헤르마니아는 애증이 섞인 뒷담을 흘리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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