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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한대] 속보) 아줌마당 패배, 여초딩당의 여초딩혼인법 통과모바일에서 작성

든든허스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4.02 21: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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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여름 햇살이 교실 창문을 두드리는 오후. 하지만 교실 안은 이미 한낮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열두 살, 김유나의 세상은 방금 전 뉴스를 통해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꺄아아아아아───!!!”

“봤어? 봤냐고! 진짜 통과됐대!”

“대박! 우리 이제 결혼할 수 있는 거야? 진짜로?!”


아이들의 환호성이 귀청을 때렸다. 유나는 펄쩍펄쩍 뛰며 옆자리 친구 민지와 부둥켜안았다. 분홍색 리본으로 양 갈래 머리를 묶은 유나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민지야! 이제 우리도 정식으로…! 정식으로…! 으아아앙!”

“유나야! 나… 나 벌써 프로포즈 받은 기분이야! 어떡해!”


아이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최애 오빠’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바꾸거나, '결혼 신고서 작성 연습’이라며 노트에 볼펜으로 꾸물꾸물 글씨를 써 내려갔다. 교실 벽에는 ‘여초딩 숙원 사업 성취!’, ‘오빠♡결혼 임박!’ 같은 급조된 플래카드가 너덜너덜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축제 전야제 같았다.


유나는 가방에서 몰래 숨겨둔, 하트 모양 스티커가 잔뜩 붙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맨 앞장에는 동네 태권도 학원 사범님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스물세 살, 유나의 ‘미래 남편’ 후보 1순위였다.


‘사범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유나가 멋진 신부가 되어서 갈게요!’


다이어리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유나는 다시 친구들과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마치 온 세상이 자신들의 승리를 축복하는 듯,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복도 너머까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한편, 같은 시간, 서울 강남의 한 마케팅 회사 사무실.

서른두 살, 박미진 대리는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뜬 인터넷 뉴스 팝업창 제목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속보] ‘초등학생 혼인 허가법’, 국회 본회의 통과… 사회적 파장 예상


“……하.”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미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옆자리 동기인 정은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미진 씨… 저 뉴스 봤어요? 진짜… 이게 말이 되나?”

“……말이 되니까 통과됐겠지.”


미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건조했다. 손가락으로 마우스 휠을 내리자, 관련 기사 댓글 창이 눈에 들어왔다.


ID: 초딩여신 꺄아아아아~ 오빠들 딱 기다려! 우리가 간다! ♡▽♡ID: 법치수호 미친 거 아니야? 나라 망했네 진짜.ID: 연애포기자 ㅋㅋㅋ 어차피 난 상관없음. 이미 글렀어…ID: 유나공주님 사범님~ 보고 계시죠? 저 시집가요~ >_<ID: 한숨푹푹 … 내 세금… 저런 법안 통과시키라고 낸 게 아닌데……


미진은 댓글 창을 닫아버렸다. 속이 메슥거렸다. 점심으로 먹은 냉면이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유나공주님’이라는 아이디가 유독 거슬렸다. 꼭 저런 애들이 제일 먼저 채갈 거라며, 경쟁자가 더 늘었다며 옆자리 김 대리가 한탄하던 소리가 떠올랐다.


탕비실로 향하는 미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웠다. 싸구려 믹스 커피 봉지를 뜯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부으며 생각했다.


‘결혼… 이제 정말 남의 얘기가 되는 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남들 다 하는 연애, 결혼.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하다 하다 이제는 초등학생들하고 경쟁해야 하는 신세라니. 미진은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입천장이 데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쓰린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 숲은 여전히 빽빽하고 숨 막혔다.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서, 까르르 웃고 있을 어린 소녀들의 얼굴이 떠올라 미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건… 그냥 반칙이잖아. 희망과 절망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듯한 기묘한 오후였다.




<뉴스 속보: 여초딩당 vs 아줌마당, 희비 교차 인터뷰>


번쩍! 번쩍! 스튜디오의 조명이 터져 나왔다. 방금 국회 본회의장을 통과한 '초등학생 혼인 허가법’의 주역, 여초딩당 당수 '한솔이’가 카메라 앞에 섰다.


열세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표정. 트레이드 마크인 하늘색 세일러복 위에 반짝이는 큐빅 브로치를 달고, 머리에는 커다란 리본 핀을 꽂았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발그레한 두 뺨은 승리의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네! 한솔이 당수님! 먼저 역사적인 법안 통과, 축하드립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앳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건네자, 솔이는 방긋 웃으며 마이크를 거의 입에 댈 듯 가까이 가져갔다.


“꺄아~! >ㅁ< 너무너무 기뻐요! 이건 우리 여초딩 모두의 승리라고 생각해요! 이제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오빠들한테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건 혁명이에요, 혁명!”


솔이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발랄하게 외쳤다. 목소리는 살짝 떨렸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스튜디오 배경에는 ‘♡축! 여초딩 숙원 성취♡’, ‘오빠 is 뭔들! 결혼길만 걷자!’ 같은 문구가 핑크색 글씨로 반짝이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허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나운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솔이는 잠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이내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음~ 그건 사랑을 모르는 어른들의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에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중요한 건 진심!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죠! 우리 여초딩들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오빠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구요! 아, 그리고! 오빠들도 저희처럼 귀엽고 깜찍한 신부를 원할걸요? 헤헷!”


솔이는 윙크까지 날리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화면에는 솔이의 팬클럽 회원들이 보낸 축하 메시지가 실시간 자막으로 흘러갔다. 솔이땅♡최고!, 오빠들 긴장해랏!ㅋㅋ, 솔이가 미래다!


화면이 바뀌었다.


방금 전의 화사한 스튜디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 조명은 어둡고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화면 중앙에는 '아줌마당(비공식 명칭: 노처녀 연합)'의 대표, 강지현 씨가 앉아 있었다. 서른여섯, 대기업 과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평소라면 단정했을 검은색 정장 재킷은 구겨져 있었고, 급하게 나왔는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려 있었다.


“강지현 대표님. 오늘 법안 결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마이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지만, 지현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움찔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녀의 등 뒤로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회색 벽뿐이었다.


“…….”


침묵이 길어졌다. 기자가 재차 질문하려던 찰나, 지현이 겨우 마른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참담합니다.”


단 한마디.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분노, 좌절, 허탈함,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체념까지도.


“이번 법안 통과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저희 세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겁니다. 이건 단순한 법안 하나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우리를… 더 이상 여성으로서 매력이 없다고, 결혼 시장에서 퇴출당해야 할 존재로 낙인찍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말을 이어가는 지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지겠죠. 이미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힘겨워하는 여성들에게… 이제는 넘을 수 없는 세대 차이라는 거대한 장벽까지 세워버린 겁니다. 저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카메라는 지현의 떨리는 손끝을 잠시 비추었다.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인터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고, 화면은 다급하게 다른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같은 시각, 박미진 대리는 탕비실 구석에서 스마트폰으로 강지현 대표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면 속 지현의 모습은 마치 몇 년 뒤 자신의 모습인 것만 같아 숨이 턱 막혔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아파트 입구까지 오는 길은 평소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졌다. 구두굽이 아스팔트에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귓전을 맴돌았다. 박미진 대리는 어깨에 맨 가방끈을 고쳐 맸다. 가죽 가방 안에는 오늘 결재받아야 했지만 결국 사인받지 못한 서류 뭉치가 납덩이처럼 들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납덩이처럼 느껴지는 건 서류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일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 숨 막혔다. 1층 로비 벽에 붙은 아파트 소식 게시판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주민 화합 등반대회’ 같은 뻔한 공지들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누군가 급하게 매직으로 휘갈겨 쓴 듯한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경축] 여초딩 혼인법 통과! 우리 아파트에도 봄날이?!

7동 302호 오빠! 이제 합법! 저랑 사겨요♡ - 쁘띠유나

※ 미성년자에게 과도한 선물 공세 금지 (feat. 아줌마들 긴장 좀?) ※


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쁘띠유나’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유치함이 이제는 법적인 효력까지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현실이었다. 띵- 소리와 함께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좁은 공간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피곤에 절어 푸석한 피부, 신경질적으로 굳은 미간, 생기를 잃은 눈빛. 서른두 살. 아직 창창하다는 말을 위안 삼아 버텨왔는데, 이제는 정말 끝물 취급을 당하는 걸까.


7층.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익숙한 복도. 집까지는 불과 몇 걸음 남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집 바로 옆집, 그러니까… ‘저지능’ 씨네 집 앞에서 뜻밖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빠아───!”


앙칼지면서도 최대한 애교를 짜내려는 듯한,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복도 벽 쪽으로 몸을 살짝 숨겼다.


옆집 남자, ‘저지능’. 본명은 따로 있겠지만, 미진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딘가 좀 어수룩하고 행동이 굼뜬 그에게 너무나도 절묘하게 어울리는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아파트 시설관리팀에서 일하는 그는, 가끔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건네곤 했다. 비록 세상 물정에는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맡은 일은 묵묵히 하는 모습에 미진은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남자라도 성실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저지능 씨 앞에 웬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분홍색 후드티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이였다. 아이는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는, 반짝이는 포장지로 싼 작은 상자를 저지능 씨에게 내밀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저지능 씨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작업복 차림의 그는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마 퇴근길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붙잡힌 모양이었다.


“선물이요! 오빠! 저 오늘 뉴스 봤어요! 이제 우리 결혼할 수 있대요!”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해맑고 확신에 차 있는지, 미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상자는 딱 봐도 조악했다. 울퉁불퉁하게 포장된 모양새나, 어설프게 붙인 리본이나. 하지만 그 안에는 아이 나름의 '정성’이 가득 담겨 있으리라.


“저, 오빠 진짜진짜 좋아하거든요? 맨날 우리 집 고장 나면 와서 고쳐주고, 무거운 거 있으면 들어주고! 완전 멋있어요!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주세요!”


“어, 어허… 꼬, 꼬마 아가씨가… 크흠.”


저지능 씨는 상자를 받아들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당혹감과… 그리고 미진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종류의 감정, 바로 '은근한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의 어수룩한 표정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거리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고… 고맙긴 한데… 이건 좀…”


말끝을 흐리는 저지능 씨의 모습에 미진은 속에서부터 차가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마저도. 변변찮다고, 조금 모자란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저 남자마저도 저런 어린 여자애의 '프로포즈’에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나, 박미진은?

멀쩡하게 회사 다니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나름 꾸미고 다니는데. 나한테는 왜 저런 순수한 (혹은 어이없는) 고백조차 없는 걸까. 오히려 이제는 저런 어린애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건가.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에이~ 오빠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법으로도 된다니까요? 여기! 제 마음이에요! 꼭 받아주세요!”


아이는 기어코 저지능 씨의 손에 상자를 쥐여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사는 집 쪽으로 통통 뛰어갔다. “오빠! 대답 기다릴게요───!” 하는 외침을 남기고.


복도에는 저지능 씨와,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있는 미진만이 남았다. 저지능 씨는 손에 들린 분홍색 상자와 아이가 사라진 복도 끝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왜 그렇게 미진의 신경을 거스르는지.


그는 고개를 돌리다가,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미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박미진 씨?”


저지능 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방금 전의 그 미묘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어색하고 쭈뼛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황급히 선물 상자를 등 뒤로 숨기려 애썼다.


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축하해요, 어린 신붓감 얻으셔서?’ 아니면 ‘꼴 좋네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저지능 씨의 옆을 지나,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섰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는 손이 떨렸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겨우 열쇠 구멍에 키를 꽂아 돌렸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복도에 울렸다.


뒤에서 저지능 씨가 뭔가 말을 건네려다 마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미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미진의 모든 희망을 단절시키는 마지막 음절처럼 들렸다. 등 뒤로 차가운 금속 문이 닿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미진은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


암흑. 불을 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현관은 완벽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바깥세상의 소음은 두꺼운 방화문에 막혀 희미하게 웅얼거릴 뿐, 오직 그녀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차가운 타일 바닥의 냉기가 얇은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를 뚫고 스며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바닥에 납땜이라도 된 것처럼 무거웠다.


왜.

어째서.


머릿속에서 조금 전 복도에서 봤던 장면이 떠나질 않았다. 분홍색 후드티를 입은,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듯한 여자아이의 발랄한 목소리. “오빠! 저랑 결혼해주세요!” 그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도, 입꼬리가 어쩔 수 없이 실룩거리던 옆집 남자, 저지능의 얼굴. 그가 등 뒤로 황급히 숨기던, 조악한 포장지의 분홍색 선물 상자.


그 표정. 그래, 그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싫지 않은, 오히려 기분 좋은 듯한 그 미묘한 표정! 미진 자신이 한때, 아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속으로 ‘좀 모자란 사람’ 취급했던, 그래서 아주 약간의 동정심과 우월감을 동시에 느꼈던 그 남자가!


“흐윽…”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겁고 뻑뻑한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흐느낌이었다.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의 둑은 걷잡을 수 없었다.


“흐어어엉… 흐끅…!”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안으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막을 새도 없었다. 막고 싶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처절하게 울었다. 소리 내어 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서럽고 비참하게 울어본 것은 처음일지도 몰랐다. 목이 메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끅끅거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처량하고 날것 그대로였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 턱 끝에 매달렸다가, 뚝뚝, 그녀의 무릎 위로, 그리고 차가운 현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장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뭐가 잘못된 걸까.

머릿속에서는 지나간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스물네 살, 대학 선배가 소개해준 남자. 키가 좀 작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었다. “최소 180은 돼야 하지 않겠어? 내 힐 높이도 생각해야지.” 친구들에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물일곱 살, 대기업에 다니던 동갑내기. 안정적이긴 했지만, 뭔가 좀 재미없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두 번 만나고 연락을 끊었다. “주말에 등산 가자는 남자? 아, 진짜 아저씨 같아!” 깔깔거리며 동기들과 흉보던 기억.


스물아홉 살, 연하의 남자. 외모는 반반했지만, 직업이 변변찮다는 이유로 망설였다. “나보다 돈도 못 버는 남자 만나서 뭐 해? 내가 먹여 살릴 일 있어?” 현실적인 척했지만, 실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박미진이니까. 나름 괜찮은 대학 나왔고, 번듯한 회사 다니고, 외모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더 좋은 남자, 더 완벽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결혼하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나는 좀 더 신중하게 고를 거야’라며 애써 여유로운 척했다. 부모님의 은근한 압박에도 '아직 괜찮다’며, '때가 되면 알아서 간다’며 큰소리쳤다.


콧대가 높았다. 그래, 인정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자존심. 그것이 지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질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내가 미쳤었지… 흐끅… 내가 얼마나… 얼마나 오만했는지…”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떠나간 남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는 하다못해 저런 어린애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옆집 저지능 씨’ 같은, 예전의 자신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남자를 두고!


“으아아아아───!”


미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더 크게 울부짖었다. 온몸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서러움, 분노, 후회, 자괴감, 절망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속을 헤집었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듯한 고통이었다.


옆집에서 들려올지 모르는 저지능 씨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가 그 분홍색 상자를 열어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을까. 목이 완전히 쉬어 더 이상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물샘이 마른 듯 눈물도 멎었다. 하지만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미진은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보았다. 오만하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과,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현재의 자신을.


바닥의 냉기는 이제 익숙해졌다. 아니, 차라리 이 냉기가 자신의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와 심장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미진은 축 늘어진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텅 빈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자조적인 미소 같은 것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세상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이제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속도에 맞춰 달릴 수도, 그렇다고 멈춰 설 수도 없는 자신은 그저 길 잃은 낙오자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미진은 숨 막히는 절망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저 가만히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가운 현관 바닥의 냉기가 엉덩이와 등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온몸은 축축한 솜처럼 무겁고, 머릿속은 텅 빈 잿더미 같았다. 미진은 엉망으로 구겨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어둠 속을 더듬어 방으로 향했다. 불을 켤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얼굴 옆으로 떨어진 스마트폰 화면이, 바닥에 부딪히며 저 혼자 희미한 빛을 발했다.


“…하.”


마른 한숨과 함께, 미진은 홀린 듯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엄지손가락이 저절로 익숙한 아이콘을 향해 움직였다. 인스타그램. 현실 도피처이자, 동시에 가장 잔인한 현실을 확인하는 창구.


화면 가득 펼쳐지는 세상은 그녀가 방금 빠져나왔던 절망과는 너무나도 다른 색깔이었다.


#럽스타그램 #오빠랑 #결혼허가기념 #나만의_왕자님♡


뽀샤시한 필터가 잔뜩 먹여진 사진 속, 교복을 입은 듯한 여자아이가 스무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 위에는 '품절 임박!'이라는 스티커가 깜찍하게 붙어 있었다.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지만, 아이의 행복감은 화면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미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영상] 초딩 신부의 사랑 가득 도시락♥ (feat. 미래남편 감동의 눈물 ㅠㅠ)


어설픈 솜씨로 만든, 모양이 제각각인 유부초밥과 문어 모양 비엔나소시지가 담긴 도시락 영상. 배경 음악으로는 아이돌 그룹의 달콤한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고, 댓글 창에는 ‘언니 너무 부러워요!’, ‘오빠 완전 계 탔네!’, ‘저도 빨리 오빠한테 해줘야징~’ 같은 말들이 가득했다.


역겨움이 치밀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또 다른 사진. 이번엔 초등학교 운동회 날인 듯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배경 아래, 운동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목마를 태운 여자아이와 함께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아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에 알록달록한 실핀을 잔뜩 꽂아 놓았고, 남자는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7살차이 #도둑놈아님 #합법임 #꼬우면_니들도_결혼허가받든가 #풉ㅋ


해시태그가 비수처럼 미진의 가슴에 꽂혔다. ‘풉ㅋ’ 이라니. 저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 '오빠’라는 존재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현실인지 알기나 할까.


아니, 모를 것이다. 저들은 지금 그저 동화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동화가 이제 법적으로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진짜 어른 여자’들은 그 동화의 악역, 혹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저렇게 쉽게… 행복해 보이는구나…’


자신만 빼고.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반짝이는 것 같은데, 오직 자신의 방만이 이렇게 캄캄하고 차가운 것 같았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심장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꺼버릴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 행복 과잉의, 기만적인 세상을.

하지만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학이라도 하듯, 그녀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화면을 내렸다.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그때였다.


띠링-


화면 상단에 익숙하지 않은 알림 아이콘이 떴다.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 수신 알림이었다. 평소라면 광고나 스팸이겠거니 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날아든 작은 불빛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혹시…? 하는 아주 작은, 말도 안 되는 기대감. 아니, 어쩌면 그저 이 지긋지긋한 피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알림을 눌렀다.


메시지를 보낸 계정의 프로필 사진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날카롭게 갈라진 하트 모양이었다. 아이디는 @bke_sisterhood. 그리고 그 아래 적힌 이름은…


[벼랑 끝 언니들 (B.K.E)]


“…벼랑 끝 언니들?”


미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 한번 기가 막히네.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이름이 이상하게도 지금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에, 웃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메시지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B.K.E]: 박미진 씨. 당신의 분노, 당신의 절망, 우리가 압니다. 혼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고 싶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의_자리는_우리가_지킨다


“…”


미진은 숨을 죽인 채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스팸이 아니었다. 장난도 아닌 것 같았다. 메시지에서는 차갑지만 단호한, 어딘가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나를… 어떻게 알았지?’


온라인 활동을 활발히 하는 편도 아니었고, 자신의 절망감을 어디에 토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소름이 살짝 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호기심,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동아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벼랑 끝 언니들.

그래, 지금 자신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떨어질 곳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메시지가 구원일까, 아니면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끄는 유혹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어둠 속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 어린것들이 행복에 겨워 깔깔대는 소리를 들으며 비참하게 늙어갈 수는 없었다.


미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주 천천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만나면 될까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 사이 세상은 ‘여초딩 혼인 허가법’ 통과 이후의 광풍에 더욱 세차게 휩쓸리는 듯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연일 어린 소녀들의 ‘오빠 쟁탈전’ 무용담과 '아줌마’들을 향한 조롱 섞인 글로 들끓었다. 박미진은 그 시간 동안 거의 좀비처럼 회사와 집만 오갔다. 텅 빈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맛을 느끼지 못한 채 점심을 삼키고, 어두운 방에 돌아와서는 의미 없이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약속된 장소 앞에 서 있었다.


낡은 상가 건물 3층.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을 오르자 복도 끝에 '햇살 가득 독서 모임’이라는 어색한 이름표가 붙은 문이 보였다. 여기가 맞나? 미진은 DM으로 받은 약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초인종 옆에는 작은 카메라 렌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망설이다 벨을 눌렀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찾아왔나? 돌아서려는데, 끼익- 하고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안에는 어두컴컴했다.


“박미진 씨?”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맞는데요.”

“들어오세요.”


미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이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닫혔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지만, 형광등 몇 개만 켜져 있어 전체적으로 어둑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소파와 플라스틱 의자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커피포트와 종이컵, 싸구려 믹스커피와 티백 상자가 보였다. 공기 중에는 희미하게 먼지 냄새와, 누군가 방금 피운 듯한 담배 냄새, 그리고 싸구려 커피 향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와 있었다. 대부분 미진과 비슷한 또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였다. 퇴근길에 바로 온 듯 정장 차림인 사람도 있었고,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미진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이내 자기들끼리의 낮은 대화로 돌아갔다. 시선에는 경계심보다는 동질감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어려 있는 듯했다. 미진은 어색하게 구석진 플라스틱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잠시 흘렀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미묘한 긴장감. 그때, 안쪽 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고, 평범한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배우처럼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눈빛이 깊고 차분했으며,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들 오셨군요. 박미진 씨,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있었다.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는 미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늘 처음 오신 분도 계시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은 ‘벼랑 끝 언니들’, B.K.E.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나이라는 숫자로 그어놓은 잔인한 선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하는 이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방 안의 모든 소음이 그의 목소리 아래로 가라앉았다.


“세상은 말합니다. 여자는 어릴수록 좋다고. 젊음이 최고의 가치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입니다. 여성의 가치는 나이에 따라 시드는 꽃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깊어지는 향기와 지혜, 경험에서 오는 단단함. 그것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움입니다.”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누군가 옆에서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통과된 그 말도 안 되는 법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가치를 표피적인 것에만 두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우리의 존재를 저당 잡히지 않겠다고. 우리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설령 세상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더라도, 우리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방 안의 여성들 한 명 한 명에게 머물렀다. 그 눈빛에는 비난이나 동정이 아닌, 깊은 이해와 존중이 담겨 있었다. 미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간,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서러움과 분노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기,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등을 토닥여줄 동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되찾고, 빼앗긴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남자의 연설이 끝나자,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모든 여성이 박수를 쳤다. 열광적인 환호는 아니었지만,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공감과 결의가 담긴 박수 소리였다.


미진 역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묘한 해방감과 소속감이 차올랐다.


잠시 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진에게도 두 명의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 명은 미진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비슷한 또래의, 조금은 지쳐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미진 씨랬죠? 저는 김수현이에요. 여기 온 지 한 달 됐어요.”

“저는 최유경. 저번 주에 처음 왔어요. 하… 진짜 요즘 같으면 살 맛 안 나죠?”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금세 서로의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도 회사에서 어린것들이 ‘대리님~ 이제 시집 다 가셨네요~?’ 하는데 진짜… 하…”

“맞아요! 소개팅 앱도 완전 초딩들한테 점령당해서 뭘 할 수가 없다니까요?”

“옆집 꼬맹이가 저보고 ‘아줌마는 이제 오빠들한테 인기 없어요?’ 하는데, 어찌나 얄밉던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미진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끙끙 앓던 이야기들. 여기서 이렇게 터놓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서로의 처지를 비웃거나 동정하는 대신, 그들은 서로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실없는 농담으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싸구려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의 미지근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미진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둡고 낡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절망이나 패배감이 아니었다. 상처받았지만, 여전히 싸울 의지를 가진 여성들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연대감. 그리고 그 중심에서 따뜻한 미소로 그들을 지켜보는 젊은 남자.


‘벼랑 끝 언니들.’


그래,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미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이전과는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 진짜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니까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겠어요.”


김수현 씨와 최유경 씨는 서로에게서 힘을 얻은 듯,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았다. 박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끙끙 앓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종이컵에 남은 미지근한 커피를 단숨에 비웠다. 씁쓸한 맛 뒤에 남는 묘한 개운함.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남자가 한쪽 벽에 기대선 채 조용히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그의 차분한 눈빛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 모인 여성들의 상처와 분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다.


미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막막한 현실에서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에게, 이 공간을 마련해 준 사람에게 최소한의 감사는 표해야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살짝 긴장으로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까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때와는 달랐다. 발걸음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남자는 미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벽에서 등을 뗐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저…”


막상 앞에 서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왔다.


“아까… 하신 말씀들…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의 턱 근처를 맴돌았다.


남자는 미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재촉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눈빛. 그저 깊은 이해가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미진의 고막을 부드럽게 감쌌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박미진 씨. 당신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지금 느끼는 분노와 절망은, 당신이 얼마나 강하게 싸워왔는지에 대한 반증일 뿐입니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그 손은 크고 투박했지만, 어딘가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미진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그의 손에 겹쳤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예상치 못한 온기에 살짝 놀랐다.


그가 미진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그의 시선이 미진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



“모 하비배달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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