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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ㅇㄱ) 소련으로 팔려간 어느 코끼리의 인생
1920년대, 인도에서 잡힌 1살짜리 어린 코끼리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소련에 판매되었다. 아기 코끼리는 화물열차를 타고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원래는 아르메니아 예레반에 새로 지어질 동물원에 수용되어야 했으나 공사가 늦어졌고, 그나마 소련에서 코끼리를 다룰 줄 아는 단체인 우크라이나 서부의 어느 서커스 극단에 맡겨졌다.코끼리는 거기서 보바(Вова)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커스 극단에서 일하게 됐다. 보바는 다른 코끼리들에 비해 조금 멍청해서 사람말을 못 알아들었고 공연은 커녕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야가다 업무만 맡았다. 핮디만 조련사 이반 셰르반(Иван Щербань)은 보바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줬다. 심지어 경영진이 쓸모없다며 다른 국가에 팔아버리자고 하는 걸 설득하여 계속 키우게 했다.그러다가 1941년, 전쟁이 일어났다. 나치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했고 사람들은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다른 동물들은 트럭이나 수레에 실려 갔지만 보바를 태울만한 운송수단은 없었다. 화물열차는 애초에 전방으로 징발되었다. 이반은 그날부터 보바를 데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아르메니아 예레반까지 수천km를 걸어갔다. 인도코끼리는 당연히 큰 이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전쟁통에 먹을 것도 부족해서 보바는 항상 굶주려야 했다. 하지만 이반은 어떻게든 항상 먹을것을 구해 먹이며 보바를 데리고 동쪽으로 걸어갔다. 한번은 독일군 비행기가 보바를 전차로 착각하고 기관총 세례를 퍼붇고 갔다. 그 때 보바는 이반을 자신의 배 아래로 숨겨주며 다치지 않게 보호해줬다.1941년 가을, 이반과 보바는 스텝초원과 돈 강을 건너고 카프카스 산맥을 넘고 넘어 드디어 예레반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에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진 않았지만 이곳은 모든게 열악했다. 보바가 지낼 동물원 우리는 전쟁 때문에 물자부족으로 완공이 미뤄지고 있었다. 보바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평일에는 동물원 건축현장에서 자재를 옮기는 일을 맡게 됐다. 잠은 그냥 아무데서나 잤다. 보바는 이반과 함께 아침마다 예레반 시내를 걸어서 공사현장으로 출근했다. 예레반은 고산지대에 지어진 도시라서 언덕길이 매우 많았는데, 가끔씩 소련제 자동차들은 이 언덕을 오르다 퍼지는 일이 생겼다. 보바는 그때마다 자동차를 머리로 받치고 뒤에서 밀어주었다. 예레반 시민들은 보바를 좋아했다. 코끼리가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무서워한다는 이반의 말에 예레반의 모든 운전수들은 규정속도보다 한참 느린 속력으로 운전을 했다. 보바는 주말에는 이반의 두 딸들을 등에 태우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동물원은 1950년이 되어서야 완공됐다.하지만 동물원은 오히려 보바에게 감옥이 되어버렸다. 이제 보바는 매일 예레반 시내를 거닐 수 없게 됐다. 공산주의식 관료주의 행정착오로 인해 보바의 우리는 아성체일 때의 몸집을 기준으로 지어져서 보바에게 너무 비좁았다. 거기다 동물들에게도 배급이 적용되어 보바는 일일 최소 칼로리에 한참 못 미치는 식사를 해야했다. 이반은 여기서도 보바를 최선을 다해 돌봐줬다. 보바는 매일같이 굶주리고 피곤했지만 이반 덕분에 꽤 장수했다. 짝을 지어주기 위해 인도에서 들여 온 암컷 코끼리와도 잘 지냈지만 그 암컷은 10년도 못 살고 죽어버렸다.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하지만 배고픔은 어쩔 수 없었는지 한번은 축사 뒤편의 벽을 부수고 목초지로 나가서 풀을 뜯어먹게 됐다. 그걸 본 이반과 동물원 측은 아예 그 벽을 보바가 나갈 수 있게 일부러 조금만 보수했다. 보바는 매일마다 배가 고프면 벽을 넘어가서 풀을 뜯다가 돌아왔다.1970년 6월 27일, 보바가 풀을 뜯으러 나가서 밤 늦게서야 돌아왔다. 하필 당직이었떤 다른 조련사들은 보바를 제대로 돌보지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보드카만 마시고 있었다. 보바는 심지어 매일 오던 길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관람객용 출구로 들어왔다. 이반은 보바를 다시 우리에 집어넣느라 진땀을 뺐다. 조련사들은 보바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증언에 의하면 보바는 가로등을 껴안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다음날 이반은 과로로 몸살이 나서 병가를 냈다.6월 28일, 보바는 조련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조련사들은 보바의 다리에 쇠사슬을 채우로 물탱크 수송용 트럭을 동원하여 보바를 다시 우리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보바는 쇠사슬을 끊어버린 뒤 우리를 탈출하여 동물원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거의 20년만에 나온 예레반 시내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특히 자동차들이 더 많아졌다. 수많은 소음에 흥분한 보바는 길가의 상점들을 박살내며 돌아다녔다. 예레반 시민들은 그 착한 코끼리가 왜 저러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보바는 언덕길에서 내려오던 노면전차를 만나자 고장난줄 알고 옛날처럼 머리로 밀어주었다. 하지만 노면전차는 탈선하였고 언덕아래로 굴러가버렸다.경찰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군중들을 대피 시키기만 했다.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들이 왔지만 이들도 역시 어쩔 방법이 없었다. 보바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이반은 집에 누워있느라 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소련군은 보바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무언가를 보면 겁을 먹고 우리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하여, 근처 공사장에서 트랙터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던 T-34/85를 빌려왔다. 하지만 보바는 오히려 T-34와 싸우려고 했고, 500마력의 전차엔진으로도 코끼리는 밀리지가 않았다. 궤도에 앞발이 밟혀서 다쳤을 뿐이다.동물원 측과 예레반 시청, 그리고 소련군은 보바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보바는 예레반에서 매우 유명인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스크바에서 보바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이반은 급하게 달려와서 총을 쏘려는 소련군들을 제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동물원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독일제 맹수 마취총을 줄테니 이걸 써서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사정했으나 소련군들은 당의 명령이니 사살해야 된다고 거절했다. AK-47 탄환이 보바의 머리에 몇발 명중했다. 하지만 보바는 피를 흘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이번에는 전차가 다가오자 뒷걸음질쳤다. 보바는 동물원 입구까지 몰렸다. 하지만 보바는 다시는 우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또다시 끈질기게 버텼다. 하지만 아까 다친 다리 때문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보바는 전차에 밀려서 벽에 부딪혔고 짖눌렸다. 코끼리는 괴성을 지르며 피를 흘렸고 이윽고 쓰러졌다. 그 후로 몇시간 동안 보바는 살아있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련인민들을 기쁘게 해줬던 인도 코끼리는 카프카스 산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다음날 아르메니아 중앙신문을 비롯하여 소련 각국의 신문에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코끼리가 다시 우리로 돌아갔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사가 실렸다. 코끼리가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예레반 시민들은 항의를 해댔지만, 신문사들은 당의 명령이라고만 반복할 뿐이었다. 소련 전역에 보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그 후로 2개월 뒤였다. 보바를 자식처럼 아꼈던 이반은 그 후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1974년 사망했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극혐) 이슬람의 약 1400 명 영국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
Rotherham child sexual exploitation scandal '로더럼 집단 성폭행' 가해자, 법정에서 "알라는 위대하다" 외쳐 https://www.sedaily.com/NewsVIew/1OBY8O585T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1997년부터 16년간 무슬림 이민자들이 1,400명의 영국 소녀들을 반복적으로 성폭행한 사실이 밝혀진 후 시작된 주요 판결은 이날 선고로 막을 내렸다. 판사 사라 라이트는 6명의 가해자에게 각각 10년에서 20년 형을 선고했다. 가해자 6명 중 2명은 이날 피고석에서 끌려 나가며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라고 크게 소리쳤다. 방청석의 일부 지지자들이 이들을 따라 외쳤고 피해자 측은 “정의는 실현됐다”고 외치며 맞받았다. 이들 가해자 중 한 명은 12살에 불과한 소녀를 강간해 임신시킨 혐의를 가지고 있다. 판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소녀의 어린 시절은 모두 사라졌다”면서 ‘망설임 없이’ 형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2010년, 파키스탄인 5명이 12세 소녀를 지속적으로 집단 성폭행한 사실이 영국 전역에 알려졌다. 성적 학대는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것이었으며, 이미 주 의회는 2002년부터 여러 차례 사건보고를 받았다. 사우스요크셔주 경찰 및 의회는 이때문에 강하게 비판받았다. 결국 2013년에 알렉시스 제이 교수가 이끄는 독립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알렉시스 교수가 2014년 8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성적 착취는 이전까지 알려진 내용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로더럼 전체 인구의 1%가 넘는 소녀 1400명이 범죄에 노출되었고, 그러한 범죄가 16년 동안이나 이어진 것이다. 피해자들은 범죄조직 아래에서 툭 하면 얻어맞고, 고문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했다. 피의자들은 11세 소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끔찍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입 다물고 있지 않으면 다음 차례는 너.'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역 경찰은 사태를 방관했고, 실질적인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 소녀들은 그런 성적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로더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겪어야만 하는 성장통'이라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상이 밝혀지자 사건은 곧바로 공론화되어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현대 영국에서 일어났다고 도저히 믿기 힘든 사건이었다. 단지 몇명의 가해자만이 이 범죄에 가담했을까? 이 사건의 피해 아동의 부모들과 그 부모를 돕는 교사 등이 이슬람 공동체에게 호소하고, 이슬람 성직자에게까지 도와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외면을 받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서 택시기사, 상점주인 등이 조직적으로 이들 피해아동이 언론이나 경찰 등에 신고내지 제보를 할까봐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협박을 했다. 문제는 여기에 영국 정치인들도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 영국 정치인들과 진보계열 측에서는 이 사건이 언론등에 보도되면 이슬람, 이민자나 난민에 대한 안좋은 여론이 생길까봐 경찰을 압박하고, 제보자들을 묵살하면서 10년 가까이 은폐했다. (ㅇㄱㄸ 아니다 영국이야기다) 비뚤어진 인권의식 덕분에 피해 기간이 10년이나 지속되었고, 피해자가 1000명 이상에 육박한 것이다. 로더럼 아동 성매매 사건이 더 복잡해지는 것은 가해자들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으로 8000명 정도 되는 파키스탄 커뮤니티 소속 남자들이 대부분의 사건을 주도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상을 물색한 후 돈이나 거처를 제공하겠다며 접근했다. 그리고 돈, 담배, 술, 마약으로 소녀들을 종속시킨 후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생자를 끌어들이게 했다. 택시 운전사로 많이 일하는 파키스탄 커뮤니티의 특수성도 로더럼 아동 성매매 사건에 크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소녀들을 물색하거나 희생자가 된 소녀들을 성매매 장소로 옮기는 일들을 주로 택시기사들이 맡아서 했으니 범죄의 운반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역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 점점 늘어가는 무슬림 커뮤니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사실을 묵인해 문제를 키웠고, 관계 당국은 자칫하면 인종차별로 비화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이를 방관하고 손대기를 꺼렸다. 알렉시스 제이 교수의 보고서가 발표되자 로더럼 카운슬 의장은 즉각 사퇴했고 당국자들과 지도자들이 비난과 압박을 받았다. 2003년 이후 세 차례나 유사한 보고서가 나왔음에도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당국과 경찰에 비난이 쏟아졌다. 이사벨이란 피해 여성은 "지금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바뀔 것은 없다. 이미 너무 늦었고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했어야 했다"며 절규했다. 역설적이지만 이 사건이 공론화되고 나서야 영국인들은 그동안 정치적 올바름을 빙자한 언더도그마 현상의 부작용을 깨달았다. 이 사건이 장기간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공권력의 방관적인 태도 및 개인주의 사회 구성원들이 제3세계 출신 이민자들의 연고주의에 대한 몰이해이다. 닫힌 무슬림 사회 출신 이민자들의 성범죄 패턴에 영국사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파키스탄을 비롯해서 제3세계 사회에서는 대개 개인의 행실보다는 혈연과 지연이 훨씬 더 중요시되는 문화가 있고 따라서 성범죄자를 처벌하려고 하면 해당 범죄자의 가족들이 나서서 이를 적극 은폐하기 때문에, 개인주의 사회 구성원들이 얼핏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던 것. 이를테면 11세 소녀가 파키스탄인 5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경찰은 피의자 2명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처벌을 끝냈다. 경찰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창녀'로 매도했으며, 피해자가 저소득층 출신에 마약과 술을 했고, 가정 환경이 비정상적이라는 이유로 평범한 비행 청소년의 일탈로 치부했다. 파키스탄 갱들은 백인 소녀들을 '하얀 쓰레기들'이라 불렀고, 노동당계 정치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찍히기 싫어 조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로더럼의 이슬람 공동체는 이 사건을 연고주의를 바탕으로 은폐한 방관자였고,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이 짓거리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지만 자정 노력 또한 기울이지 않았다. 로더럼의 성범죄자들은 대부분 30~40대로 10대 시절부터 범죄를 시작해 이어져 온 자들이 대부분이며 이전부터 사회의 쓰레기로 평가받던 자들로 영국 사회의 갱단, 조직범죄자들과 유사점이 많있다. 그러나 현지 이슬람 공동체는 무슬림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들을 싸고 돌았으며, 해당 범죄자들은 자신들은 무죄라면서 법원에서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말을 크게 외치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 '이민 노동자'들은 사회적인 약자였고,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서 본다면 무조건적으로 보호받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바로 그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고통받아야만 했던 것은 실제로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이민자가 아닌 토박이 백인 소녀들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무슬림 전체 문제가 아니라 로더럼 지역의 파키스탄 무슬림 공동체 중에 악질 공동체가 있다는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즈 샤 노동당 하원의원은 "다양성을 위해 피해자들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트윗을 리트윗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범인들은 징역 10년에서 30년 정도를 선고받는 등 나름 처벌을 받았으나, 무슬림 공동체 자체는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인신매매 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무슬림은 아니지만 아동 인신매매를 주도한 갱단 범죄자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어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부 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10년이나 걸려서 언론에 보도되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어린이 성범죄-그것도 조직적인 성범죄 같은 일이 벌어져도 영국정부가 EU의 제약때문에 저 집단적인 성범죄자들을 적절히 제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EU 탈퇴여론이 일었고, 그 결과 브렉시트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요약 영국의 파키스탄 이민자 무슬림들이 집단적, 조직적으로 16년 동안 영국의 어린 백인 소녀들에게 n번방 그루밍범죄를 저지름 1997년부터 시작된 범죄에 그 피해자의 규모가 무려 1400명, 로더럼 전체 인구의 1퍼센트를 넘는 수준 이 조직적인 범죄는 무슬림 이민자 사회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영국의 공권력에 발각되지 않았고 영국 내 좌파, 소위 PC라고 하는 집단들은 나중에 이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을때도 무슬림 실드를 치겠다고 사건을 은폐하거나, 심지어 도움과 구조를 요청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비난하기 바빴음 그런데... 이 씨발럼이 니네 나라나 잘 단속해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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