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공인중개사들이 각 업소 출입문에 붙인 안내문 일부

“시세 왜곡이나 가격 담합은 동부이촌동 모든 소유자, 임차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기만행위이며 수요와 공급으로 이뤄지는 시장가격 형성의 원리원칙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공인중개사들이 최근 각 업소 출입문에 이같은 내용의 노란색 안내문을 붙였다. 정부 당국은 최근 집값급등 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공인중개사들이 매도호가를 높이도록 부추겼다고 보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것이다.

■공인중개소가 저가매물 진원지?

6일 인근 공인중개소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해 말부터 동부이촌동 주민들로 이뤄진 한 커뮤니티에 지역 공인중개소를 비판하는 게시물이 다수 올라왔다. 대개 내용은 동부이촌동 아파트 시세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으며, 이는 빠른 매매를 위해 집값을 일정 수준으로 묶어놓은 공인중개사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때 이 커뮤니티 초기화면에는 ‘아파트 적정매매가’라며 25평 11억~12억원대, 33평 14억~15억원대라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보면 이들이 제시한 적정매매가는 지난달 신고된 거래금액보다 2억원 가량 높은 수준이었다. 계약 후 잔금을 치를 때까지 약 두달간 매매가격이 몇 억씩 오르는 일이 벌어지다보니 호가를 최대한 올리려는 것이다. 최근 집값이 급등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인 셈이다.

하지만 매도자와 매수자 사이에서 적정 가격을 조율해야 하는 공인중개사는 호가를 마냥 올릴 수 없는 처지다. 동부이촌동 ㄱ공인중개사는 “호가는 그때그때 거래될 수 있는 금액 중 가장 좋은 조건이지, ‘부르는 게 값’은 아니다”며 “당장 실거래가보다 1억원 이상 높게 호가를 제시하는 것은 시장교란 행위로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호가를 높이라는 요구에 공인중개소들이 응하지 않자, 해당 커뮤니티에는 공인중개소를 ‘혐오시설’ ‘적폐세력’ ‘돈 먹는 하마’ 등이라고 폄훼하는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네이버에 올린 매매광고도 이들이 보기에 적정 금액이 아니면 허위매물로 신고해 외부 노출이 되지 않도록 했다는 게 인근 공인중개사들의 주장이다. 이에 동부이촌동 공인중개사들은 네이버 광고 게재를 일제히 중단했다. 또 커뮤니티에서 가격 담합 및 비판 여론을 이끌고 있는 아이디 17개를 업무방해 및 명예훼손, 모욕 등의 혐의로 지난 5일 서울서부지검에 고소했다. 동부이촌동 공인중개사연합회 소속 50개 공인중개소 중 49개가 고소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동부이촌동 공인중개사들의 법률대리를 맡은 류연재 변호사는 “공인중개사들은 자칫 지역주민들과의 갈등으로 비춰질까봐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특정 세력의 공격이 격화되면서 중개영업에까지 지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인중개사들은 한 동네 이웃이라는 마음으로 중개업무를 해왔던 자신들이 한순간 시세 조작을 위한 하수인으로 취급받는 것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 곳 공인중개사들은 대부분 동부이촌동에서만 15~20년 영업을 해온 ‘붙박이들’이다. 특히 집주인이 매물을 여러 중개업소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특정 중개사에게만 맡기는 ‘전속중개’가 자리잡은 지역이다. 단순히 집을 사고 파는 개념이 아니라 한 고객의 자산을 관리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ㄴ공인중개사는 “외국인에게 월세를 주는 곳들이 많은데, 우리는 계약 이후에도 도배나 청소·수리 등을 관리하는 토탈서비스를 한다”며 “평소에도 세무 및 상속·증여 관련 문의를 하는 고객이 있을 만큼 그간 주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고 말했다.

■집값 급등기마다 ‘호가 놀이’ 기승

경기 판교와 광교, 서울 잠실 등에서도 주민들이 원하는 가격에 매물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근 공인중개소에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가에 거래한 중개소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공유하거나 직접 찾아가 앞으로는 매물을 주지 않겠다고 압력을 가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교의 한 공인중개사는 “요즘처럼 집값이 치솟는 시장에서는 매도자에게 ‘얼마까지 거래됐는데, 얼마를 원하세요?’라고 묻는다”고 말했다. 잠실의 한 공인중개사는 “유리창에 붙인 시세만 가지고도 ‘너희가 뭔데 우리 단지 가격을 이렇게 낮추냐’고 소리 지르는 주민들이 꽤 있다”며 “그러면 나는 ‘원하는 대로 호가를 올려줄테니 주변 12개 중개업소를 다 없애고 독과점을 달라’고 한다. 혼자 가격을 조장하는 게 가능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들 지역의 특징은 근래 집값이 급등했지만 주변과 비교하면 그간 상승폭이 크지 않았던 곳들이다. 동부이촌동은 전통적인 부촌이지만 강 건너 서초구 반포동보다 집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달부터 한가람아파트 등 5개 단지가 통합 리모델링을 추진하면서 집값이 들썩이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용산역세권 국제업무단지, 용산공원, 한남뉴타운 등 개발 호재도 많다. 주민 손모씨는 “동부이촌동 주민 중 사실상 반포가 생활권인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두 지역간 집값이 계속 벌어지는 것을 보니 억울할 수 밖에 없다”며 “가격 담합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제대로 평가받으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담합 시도는 집값 상승기마다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6년 강남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담합을 단속했지만 적발 사례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공정거래법상 담합 행위 주체를 사업체로 규정하고 있는데, 호가를 높이는 행위는 아파트 부녀회나 지역 주민 커뮤니티 등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호가를 높이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단지 엘리베이터 등에 ‘우리 재산은 우리가 지킵시다. O억원 이하로는 내놓지 마세요’라는 유인물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최근에는 매물이 나온 해당 층수 가구의 우편함에만 관련 유인물을 꽂아두기도 한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이를 ‘꽃꽂이’라고 부른다”며 “예전보다 상당히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여론 형성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법률근거가 없다며 뒷짐을 지고 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주민 몇몇의 여론 형성이 집값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도 불분명해 현행법상 단속·처벌하기는 어렵다”며 “담합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중개업소를 압박하는 수준이 과도할 때는 대응방안을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이에 동부이촌동 ㄷ공인중개사는 “정부가 집값 안정 대책으로 허위매물이나 과장광고를 하면 중개업소의 등록 취소 등을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집주인들의 ‘호가놀이’는 사실상 방관하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