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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억까당한 흑인 복서 이야기
흑인 스포츠 스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2020년대를 사는 우리는 그 이름들을 꽤 많이 읊어댈 수 있을 것이다. 르브론 제임스, 마이클 조던... 또 뭐시기 저시기... 이름을 읊는 것 만으로도 글 하나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많다.물론 그런 스포츠 스타들도 사회 곳곳에서 마이크로 레이시즘을 겪었다. 흑인 핏줄을 타고 나서 성공하는 인사들 대부분이 특정 종목 스포츠에 몰려있는 것도 문제적이다. 허나 일단 성공하고 나면 대우를 받는데 큰 문제는 없다. 헬리콥터는 못 타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하여간 다행스러운 시대다.그렇지 않던 시대로 가보자. 그러니까 한, 한 백 오십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조선과 청조가 가냘프게 숨을 들이쉬고, 제국 일본이 비상을 앞둔 시대. 파리에서는 황제가 사라지고 런던과 베를린에서는 왕이 황제를 칭할 무렵.텍사스의 작은 항구도시, 갤버스턴에서 한 소년이 태어난다. 아버지는 학교 경비원. 어머니는 세탁부. 그들은 흑인이었고, 따라서 당연하게도 노예였었다. 링컨의 세례를 받아 자유민이 되기는 했지만 그뿐. 40에이커와 노새는 공허한 약속이었으며, 소년은 여덟 형제자매와 함께 도시 빈민의 삶을 살아야 했다.그러나 도시 빈민으로서의 삶이 꼭 불운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대부분의 흑인들은 남부의 농촌에서 살았다. 그들은 노예제가 끝났음에도 노예제 시대의 윤리를 체화해야 했다. 백인에게는 늘 경어를 써야 했고,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도 금기시 될 일이었다. 인종분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고.허나 도시 빈민이라면? 그렇지 않았다. 백인과 흑인은 가난함으로 하나되었다.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예로는 1892년의 뉴올리언스 총파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긴 노동시간에 대하여 흑인 노조와 백인 노조 모두가 들고 일어났었다. 고용주들은 백인 노조에게만 협상을 제시했고, 고용주들의 돈을 받은 신문들은 흑인 노조를 비난하는 뉴스를 뿌려댔다. 그러나 백인 노조는 이 딥사우스적 갈라치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 노조도 동등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협상을 거부하고 파업을 이어나가겠다고 했었다.그리하여, 뉴올리언스의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은 동등하고 개선된 조건 하에서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지.... 마는 이는 역시 너무 큰 이야기다. 우리는 한 소년의 삶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에 걸맞게, 사회적으로 의미 있다기보단 좀 소박한 이야기들을 하도록 하자.어릴때부터 건장한 체구를 가졌던 소년은 백인 소년들로 구성된 소년 갱의 일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 흑인 소년은 백인 소년들과 어울려 놀았으며, 그들과 함께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집에서 자기도 하고, 그들의 어머니에게서 쿠키를 받기도 했다. 대단한 것이 차려지지는 못했겠지만,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피부색과 관계없이, 그들은 친구였다. 다 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내일 끼니 걱정이나 하는 처지기에 평등했다.이런 환경에서 자란 소년은, 대부분의 흑인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며 흑인은 언제나 눈을 내리 깔아야한다는 것을 체득하지 못한 채로 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21세기의 한국인이라면 여드름 까슬까슬하게 난 채로 학교에 쳐박힐 나이지만, 소년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빈민이었다. 학교는 사치였으며,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호텔이나 도박장의 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제빵소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소도시인 갤버스턴을 벗어나, 댈러스에서 마차를 칠하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 모두가 뼈빠지게 일 하지만 손에 쥐는 것은 별로 없는 잡일거리들.이대로 잡일만 하다 죽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사나 싶었는데, 그의 고용주 중 하나가 그의 건장한 체격에 주목했다.대략 184cm 정도의 키. 상당한 체구. 아마도 헤비급.고용주는 이 소년... 아니 청년, 잭 존슨에게 권투를 소개했다. 하여 그는 권투에 입문했고, 자신이 주먹질에 꽤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내기 복싱이었다. 부두 노동자와 싸워서 이기고 배당금 몇푼을 받아가는 것. 그러나 판은 점점 커져갔다. 종내는 프로 선수와도 복싱을 하게 되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4라운드까지 버티기는 했고, 훗날 '자신이 가장 힘들게 번 돈'이라고 회고하게 되는 25달러를 벌게 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한, 1000달러 정도. 그러나 그게 소도시 갤버스턴에서 권투로 벌 수 있는 돈의 한계였다. 존슨은 좀 더 기회가 많은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북부로. 그게 189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대부분의 남부 흑인들은 191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남부를 탈출하기 시작하니, 존슨은 탈남부의 측면에서도 선구자로 부를 수 있겠다. 물론 선구자라고 해서 취급이 대단했던건 아니다. 돈 몇푼만 가지고 상경한 남부 촌놈 존슨은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부랑자 1로 전락한다. 이 동네에서 권투를 하려면 백인 매니저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걸 찾을수가 없었으니. 해서 그는 스프링필드로 이주한다. 심슨 가족 있는데 말고,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로. 여기서는 권투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제라면, 썩 기분좋은 형식의 권투가 아니었다는 것. 흔히 배틀로얄이라고 부르는 경기였는데, 눈을 가린 흑인 선수들을 링 위에 여럿 올리고, 하나만 살아남을 때 까지 죽도록 싸우게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관객은 백인이고. 심지어 상금도 자신의 백인 매니저에게 건네야 했다.파업을 참을 수 없는 노동조건이나, 북부 복싱계에 입문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존슨은 잘 싸웠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에 눈독을 들이는 백인이 몇 나타났고, 제대로 된 일대일 복싱 경기도 주선되었다. 동시대에 활동한 네임드 흑인 선수들은 다 이겨버리고, 심지어는 그와 맞붙기로 한 백인 선수들도 이겼다. 다만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는 흑백 분리의 시기. 경찰들은 존슨과 백인 선수가 맞붙는 것을 볼때마다 백인 선수가 흑인과 같은 링에 올라서는 안된다고 딱딱대며 체포하거나 제지해댔고, 또 어느정도 네임드가 있는 작자들은 '흑인과 겸상 안함 ㅎ'를 기본 마인드셋으로 깔고 있었으니. 특히 헤비급 타이틀은 흑인이 범접할 수 없는 성역으로 여겨져, 존슨은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흑백분리 규율보다 더 센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본이었다. 20세기 극초반의 미국 복싱계는 침체기였다. 공식적으로 단 한번도 다운된 적이 없어 불패의 챔피언으로 불리던 제임스 제프리스가 '어휴 상대가 없네염 하산함 ㅂㅂ'하자, 그의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빈 자리를 채워야 할 백인 복서들은 제프리스만큼 압도적이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팬들은 당대의 규범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재미를 추구했다. 복싱 관계자들은 돈을 추구했고. 하여, 헤비급 챔피언들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저기 좀 치는 깜둥이 선수가 있는데, 붙어보라고. 마침 당대 WBC 타이틀 소유자는 토미 번즈. 캐나다인으로, '일단 백인 선수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나, 피부색을 초월해서도 싸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전대 챔피언들이 유색인종과는 붙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생각하면 꽤 대단한 진보였다. 그러나 진짜 진보는 번즈가 존슨과의 대결을 수락한 뒤에 일어났다. 존슨이 번즈를 일방적으로 이기고 타이틀을 따내버린 것이었다. 당대에 널리 퍼진 골상학적으로 보자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흑인들은 환호했다. 다만 백인들은 아직까지는 침착한 반응을 유지했다. 그들에게 있어 존슨은 제프리스 은퇴 이후 무주공산이 된 복싱계에서 날뛰는 ^물로켓빈집털이^ 였으니까. 허나 존슨은 자신이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임을 끝없이 입증했다. 다른 백인 타이틀 도전자들도 여럿 때려눕히고, 종국엔 백인의 희망으로 불리던 기린아들마저도 패배시켰으니까. 백인들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제프리스가 복귀해야한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복싱 관계자들도 비슷하게 움직였다. 챔피언 GOAT(과거형)과 챔피언 GOAT(현재형)이 붙는 경기? 돈이 안될리가 없지 않나? 은퇴해있던 제프리스에게 다방면으로 압력이 가해졌다. 결국 제프리스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라는 말을 남기고 경기를 수락했다. 다만 이 당시 제프리스는 은퇴 생활을 너무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었기에 근육은 많이 빠졌고, 살도 150kg를 넘긴 상태였다는 것. 이 시대에도 계체량이 있었으니 일단 헤비급 몸무게 안에 들어와야 했고, 따라서 경기에 나서기 전 55kg를 빼야 했다. 5년동안 권투도 안했고, 거기에 또 살을 55kg나 빼고, 나이도 더 많고... 경기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뽕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잭 런던은 제프리스를 '위대한 백인의 희망, 백인종의 선택받은 대표자'으로 부르며 승리를 기원했다. 주류 언론들도 마찬가지. 이를테면 뉴욕 타임스는 '존슨이 이기면, 흑인들은 이 승리가 단순히 신체적으로 흑백이 평등함을 넘어, 그보다 더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사설을 써댔다. 하나같이 존슨의 패배를 기원했으며,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기를 기대했다. 심지어 결투 날짜도 정치적으로 노골적이었다. 1910년, 이기에 앞서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 당연히 제프리스가 이길 것이니까 건국일을 겸하여 백인이 흑인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 미국의 정신을 확고히 하자 - 따위의 메세지를 품은 날짜 선정이었다. 배당도 10대 7이었는데, 제프리스가 10으로 정배쪽이었다. 경기 관람권도 마구 질러댔다. 단 한 석을 빼면 경기장 전체가 백인으로 가득했다. 전후사정을 다 알고 보는 후대인들 입장에서는 흑우새끼들이 따로 없지만, 이 시대의 백인들은 진지하게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 백인종의 우월함을 증명할 것이라고 믿었다. 흑인 쪽의 반응은 어떤가 하면... 억압받는 자들은 늘 현상을 경기장에서나마 깨버리는 스포츠 영웅들에게 환호하지 않던가.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일본 선수들을 앞지르는 엄복동을 보며 환호했다. 패전으로 풀이 죽어 있던 일본인들은 역도산이 미국 선수들을 링 위에서 박살내는 것에 (그가 자이니치라는 것을 모른 채) 열광했다. 이 시기의 흑인들도 그러해서, 아주 열렬하게 존슨을 응원했다. 비싼 관람권은 사지 못했지만, 그래도 존슨의 모습 한번 보겠다고 경기장인 네바다 주 레노로 무작정 몰려드는 사람이 수천수만. 경기장에 가지 못하는 자들은 도박장에서 제 재산을 존슨에게 걸었다. 심지어 복싱같은 난투극과 거리가 좀 있어보이는 흑인 교회의 목사들도 존슨을 위해 기도할 것을 청했다. 라디오도, TV도 없는 시대다보니, 경과는 신문사 뉴스 게시대 앞에서 볼 수 있었다. 라운드별 결과를 게시판에 붙여주는 식. 흑인들은 게시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존슨의 승리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존슨은 동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제프리스를 이겼다. 그것도 꽤나 압도적으로. 여태 단 한번도 다운된 적이 없던 제프리스는 이 경기에서는 두번이나 다운되었다. 은퇴한지 5년되었고 몇주 전까지는 150kg가 넘는 뚱뚱보였다가 개같이 고생해서 50kg 넘게 감량한 아저씨가, 전성기를 달리는 세살 연하 챔피언을 상대로 지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일이었으나, 이 시대는 그게 아니었다. 골상학적으로, 인종학적으로. 흑인은 복부가 약했다. 겁이 많았다. 두개골은 두껍지만 대신 뇌가 작아 멍청했다. 박치기가 반칙으로 여겨지는 이상, 깜둥이들이 가아아암히 백인 챔피언을 때려눕히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존슨은 이겨버렸다. 당대 최강으로 여겨지던 제프리스마저 이겼다. 백인 승승장구 스위치를 꺼버린 셈이다. 백인들의 반응은 격렬했으며, 2020년의 BLM 시위나 2025년의 LA의 반 ICE 시위에서 유색인종이 보였다는 그 폭력성을 거리낌 없이 배출해보였다. 존슨의 승리를 축하하는 흑인들을 습격해 린칭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흑인 거주구역에 대한 방화나 투석 행위도 있었다. 존슨의 승리 이틀만에 6개 주에서 1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잭 존슨처럼 화려한 차를 몰고 다닌다고 총에 맞아 죽은 흑인도 있었더랬다. 흑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떤 청년은 음식점에 들어가 "잭 존슨만큼 강한 커피 한잔" 과 "짐 제프리스처럼 다져진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직후 총 5발을 맞고 죽었다) 뉴욕에선 어느 백인이 존슨을 욕한 것을 계기로 인종간 군중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그러나 제아무리 백인들이 발작한들, 존슨이 챔피언이라는 사실은 뒤집어질 수 없었다. 존슨은 이 경기로만 6만 5천 달러를 벌었고, 이는 오늘날의 가치로 치면 대략 220만 달러에 해당한다. 제프리스가 없는 무주공산을 휩쓸었을 뿐이라는 백인 평론가들의 다소 구차한 변명도 날려버렸다. 바야흐로 절정기였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는 내리막이란 것이다. 요즘 스포츠 스타는 노화로 인한 기량 저하나 마약/약물 복용, 승부조작 따위로 내리막을 걷곤 한다. 하지만 존슨은 백인 여성을 건드렸기에 내리막을 걸어야 했다. 일단 백인 사회는 존슨에게 여러모로 '긁혀'있는 상태였다. 백인 챔피언들을 때려눕힌 것도 때려눕힌 것이지만... 보통 흑인 선수들은 백인 매니저를 끼고 백인 선수들과 경기를 치뤘고, 하꼬 시절의 존슨 역시 그러했으나 성공하고 나선 백인 매니저 따위는 패싱. 백인 선수들에게 직접 흑인 거주 구역으로 와서 싸인할 것을 요구했다. 흑인 주제에 너무 건방졌다. 그런데 여기에 백인 여성과의 교제라고? 이 시기의 미국은 절반 이상, 29개의 주에서 인종간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시기였다. 21세기에는 그저 같잖은 개소리로 들리는 것이 상식이고 법이었다. 주류 언론과 백인 사회는 존슨을 마구 씹어댔다. 존슨에게 그나마 호의적인 편이던 상업 신문들도 그가 '관용적인 백인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설을 써댔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19살 매춘부 루실 카메론과의 연애였다. 루실 카메론은 어쨌건 성인이었으며, 한차례 결혼에서 실패한 이혼녀이기도 했다. 나이차가 좀 나긴 해도 둘이 좋다면 문제가 없는 일이었는데, 여기에 카메론의 모친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흑인 사위를 둘 생각이 없었고, 딸을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정신이상자로 경찰에 신고했다. 성인 간의 합의된 관계라는 진실은, 좀 모자란 소녀를 흑인 남자가 낚아채가려 했다... 라는 범죄담으로 세탁되었다. 이 당시 미국에는 만 법이라고, 주 간 경계를 넘어 여자를 이송해 매춘에 종사케 하면 처벌하게 하는 법이 있었는데, 존슨은 이 법의 위반, 그리고 납치죄로 법정에 서야 했다. 이쯤이면 흑인 펜대들이 편을 들어줘야 할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W.E.B 듀보이스나 부커 T. 워싱턴 같은 당대의 흑인 스피커들은 애당초 존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먹질하는 야만적인 경기에서 좀 이겨서 뭐 하냐 이거다. 백인 주류 사회에 진입하려면, 그럴듯한 기술을 배우고 백인 사회의 윤리를 체화하여, 피부만 까만색인 백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쌈박질 좀 잘하는 인간이 돈 좀 만졌다고 비싼 집과 차 사서 방탕하게 생활하는거? 좋게 보일리가 있나. 그 양반이 흑인들의 영웅이자 모델이 되는 것? 눈 뒤집을 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존슨과 선을 그었다. 인종 간 결혼이 범죄적이라고도 했다. 자신들은 미국의 불문율(=인종차별)을 지키며, 2등 시민의 지위에 순응하며, 저 악한 존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존슨에 대한 비난도 마구 이어졌다. 존슨은 정신적으로 허약하다, 화이트 트래시들보다 더한 비행을 저지른다, 지 꼴리는대로만 했지 흑인 사회가 어떤 일을 당할지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소수의 흑인 지식인들이 존슨을 옹호하기는 했다. 저 흑인 스피커, 잘나신 분들도 최대한 피부색이 하얀 아내를 찾는 주제에 존슨을 욕할 자격이나 있냐, 애당초 인종간 결혼이 안될 일이냐,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마이너의 마이너 아닌가. 영향력이야 보잘것 없다. 법정에서의 싸움? 여론전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이었다. 자신과 존슨의 관계가 자발적이었다고 진술해야 할 카메론은 형무소에 감금되어 사실상 입이 막힌 채로 진행되었더랬다. 허용된 증인들은 존슨의 형제와 전 고용인들이었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존슨과 사이가 나빴다. 웃긴 것은, 저렇게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되었음에도 존슨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처분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해피 엔딩이냐 하면, 그럴리가 있나. 법무부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들었다. 벨 슈라이버라고, 존슨과 연애했다 안좋게 깨진 매춘부가 있었다. 그녀는 존슨과 깨진 후에도 매춘업에 종사했으며, 존슨과 함께 주간 경계를 넘었으며, 존슨에 앙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즉, 만 법으로 존슨을 얽어넣을 완벽한 요소가 갖춰진 것이었다. 존슨은 또 기소되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존슨은 애인과 주의 경계를 넘은 것이었지, 타 주로 매춘부를 배달한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법정은 (백인)피해자의 눈물을 곧 증거로 여길 생각으로 가득했다. 따지고 보자면 만 법 제정 전에 존슨과 슈라이버의 연애가 있었던지라, 혐의가 사실이라 쳐도 이는 법의 소급적용이었는데, 이조차 무시되었다. 결국 존슨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1000달러의 벌금과 1년간의 징역형.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는 했다. 항소도 했다. 하지만 딱히 정의 실현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시 당국이 자신이 차린 술집을 폐쇄하는 것을 보고 완전히 희망을 잃은 존슨은 캐나다를 거쳐 1913년, 프랑스 파리로 이사한다. 그의 곁에는 얼마 전 결혼한 카메론도 있었다. 파리는 정치적 망명자들의 성지로 여겨진다. 또 프랑스는 미국처럼 꽉 막힌 인종 분리 정책도 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만큼 존슨에게는 좋은 곳이어야 했지만... 자, 다시 한번 연도를 보자. 1913년. 1년 뒤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들 알고 있으리라. ... 젊은 남자는 싹 긁어다 대포사료로 던져넣는 시대에 복싱이 설 자리가 있을리가. 존슨은 단 2경기만을 치른 채 유럽에서의 복싱 커리어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후 유럽도 떠나 중남미를 전전했다. 경제적으로 곤궁해졌던 그는 쿠바에서 열린 복싱 경기에서 백인 선수에게 패하며 전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친 그는 192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멕시코 국경에서 자수하는 형식이었으며, 이후 그는 7년 전 선고받은 1년 형을 그대로 치러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잃은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을 것을 희망했으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이도 마흔을 넘긴 시점이라, 희망도 없었다. 이 와중 불륜을 저질러 아내와 이혼하기도 하고, 죽을 때 까지 해로하게 되는 새 여자를 찾아 또 결혼하기도 하다, 1946년에 사망한다. 사망 경위는 어처구니 없는 편이다. 차를 타고 가다 식당을 방문했는데, 여기가 인종 분리 식당이라, 흑인인 존슨과 그의 동승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길 거부한 것이었다. 분노한 그는 난폭 운전을 했고, 전신주에 박았다. 동승자는 살았는데, 본인은 결국 사망. 이후 존슨은 잊혀졌다. 그냥 한물 간 복서 아닌가. 민권운동이 벌어지는 50~60년대에도 재발굴되지는 않았다. 비폭력주의를 내세웠던 민권운동가에 사생활이 난잡하고 또 난폭하기도 했던 존슨은 모델로 삼을 수 없던 인물이었던지라. 킹 목사도 사생활은 개더러웠다고? 그... 거는 뭐 공개적인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결국 존슨이 재발굴되기는 한다. 혹, '나비처럼 날아서 벌 처럼 쏜다'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그 말의 출전인 무하마드 알리가 존슨을 재발굴해냈다. 그는 당대까지 남아있던 인종적 질서를 거부했다. 공손한 흑인이 되기도 거부했다. 베트남에 개처럼 끌려나가 죽기도 거부했다. 설령 징역형을 받고 커리어가 끊겨도 굴복하길 거부했다. 그러니까, 존슨처럼 되고 싶었다. 알리는 '파파 잭'이라고 존슨을 부르며,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냈다. 존슨에 대한 영화가 나오기도 하고, 책이 나오기도 하고.그의 고향에 동상이 세워지기도 한다.존슨을 기리는 의미에서 성을 바꾼 프로레슬러도 있었는데,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더 락, 드웨인 '존슨' 이다. 그에 대한 사면 운동도 있었는데, 테드 케네디나 존 매케인같은 초거물 정치인들도 동참했다. 이 운동은 아들 부시 시절엔 상원을 통과하지 못해 좌초되었고, 오바마때는 '흑인 대통령이 흑인 복서 사면해주는거 모양 개좋은데?' 하며 사면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는데, 오바마가 씹었다. 존슨을 사면해준 것은 결국 동종업계 종사자였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존슨의 후손, WBC 관계자, 트럼프 본인에게 사면을 청원했던 람보 등을 모아, 존슨 사면서에 사인을 남겼다. 이로서, 유죄 판결 105년만에 존슨은 무죄가 되었다. 그의 삶이 무결한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소년 갱 짓을 하며 자랐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무식하고 난폭했다. 불륜을 저질러 아내 하나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또 가정폭력으로 아내 하나의 자살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흑인 청소년을 위해 체육관 좀 지어달라는 요청에 술집을 짓는 것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흑인 선수랑 붙는건 돈이 안된다며 백인 선수들과 붙기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존슨이 문제적인 인간인가? 라는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ㅇㅇ'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백인이었다면, 어처구니 없이 징역형을 선고받아 커리어가 박살나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를 경멸했으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환멸하게 된 부커 T. 워싱턴의 말을 인용하자면 :"존슨이나 그의 인종이 프라이즈 파이팅(복싱의 원형)을 만든 것도, 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전국적 증오가 범람하는 것일까? 그것은 존슨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의 성격이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 문제가 한 백인 복서와 운동 선수, 심지어 정치가를 이처럼 추락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증오는 바로 용서받을 수 없는 흑인으로서의 존재를 향한 것 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출처영웅에서 악한으로: 잭 존슨(Jack Johnson)과 흑인 사회, 1908-1913, 김정욱 저https://www.pbs.org/kenburns/unforgivable-blackness/https://pix11.com/news/the-final-fight-why-a-pardon-for-jack-johnson-is-problematic-but-essential/https://en.wikipedia.org/wiki/Jack_Johnson_(boxer)
작성자 : Ashige_good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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