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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피폭건물순례행기 - 혼카와 초등학교 평화자료관
히로시마 피폭건물순례행기 - 혼카와 초등학교 평화자료관(広島被爆建物巡禮行記本川小学校平和資料館)천년도 더 전에 일본의 승려 엔닌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배우고 와서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썼고, 이 위대한 기행문에 감동받은 보닌쟝은 히로시마에서 피폭건물을 보고 와서 히로시마 피폭건물순례행기를 쓰기로 했다.오늘의 피폭건물은 혼카와 초등학교 평화자료관ㅖㅏ Honkawa Elementary School Peace Museum · 1 Chome-5-39 Honkawacho, Naka Ward, Hiroshima, 730-0802 일본★★★★★ · 역사 박물관maps.app.goo.gl입장료 무료히로시마 전철 혼카와쵸역 도보3분원폭 돔 도보10분날씨딱죠타~~여기가 바로 히로시마 시립 혼카와 초등학교폭심지에서 겨우 350미터 떨어진 피폭건물임을 알리는 붉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평화자료관은 정문이 아닌 북문으로 가야 한다골목길로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단층짜리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혼카와 초등학교 평화자료관뒤를 돌아보면 강 건너 원폭 돔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오늘 순례행기의 주인공이 바로 여기 혼카와 초등학교 평화자료관!뒤쪽 신교사는 당연히(?) 피폭건물은 아니고 평화자료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교사가 피폭건물이다평화자료관은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교 부지 내에 있기 때문에 북문의 인터폰을 눌러 직원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한다그리고 평화자료관 외 교내 다른 곳은 못간다 화장실도 못가니 화장실은 근처 공원을 이용하도록 하자근데 학교에 야자나무가 왜있노?입구의 원폭 위령비를 지나평화자료관 안으로 들어오면 날 것 그대로의 콘크리트와 말 못 할 분위기가 반겨준다개인적으로는 바깥의 환한 풍경과 달리 조금 어둡고 거친 안의 풍경에 조금 충격받았음2층으로 가는 계단물론 1층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했기에 올라가 볼 수는 없다왼쪽 아래는 피폭 직후인 1945년 11월에 찍은 같은 계단의 사진히로시마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바라는 종이학이 가득하다피폭 전 혼카와 초등학교 구교사의 모형과 1층 평면도왼쪽 아래의 붉은 부분이 지금의 평화자료관이다↑ 피폭 전 원폭 돔 방향에서 바라 본 혼카와 초등학교 구교사↑ 이건 피폭 후 같은 방향에서 바라 본 구교사, 왼쪽의 무너진 철골은 강당의 잔해구교사는 1928년 히로시마 시내 공립 초등학교로서는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ㄱ자 형태의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이었으며, 원폭 투하 당시 학생 400여명과 선생님 10여명이 있었는데 살아남은 건 학생 1명과 선생 1명 단 2명이었다고 한다피폭 후 1946년 2월부터는 수업이 다시 시작됐으며 구교사를 고쳐 쓰다가 1988년이 돼서야 피폭된 구교사를 철거하고 신교사를 지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근데 정문 비석에는 폭심지에서 350미터라고 했는데 왜 여기는 폭심지에서 410미터노??분전반 잔해고열에 변형된 철과 유리입구 근처의 전시물을 간단히 둘러보고 지하로 내려간다지하의 분위기는 지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과거 평화기념관에서 전시했던 원폭 투하 직후의 히로시마 시내 모형평화기념관에 새 모형이 들어오고 오래된 모형은 이곳 평화자료관으로 옮겨왔다사진의 정중앙이 원폭 돔, T자 모양의 아이오시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역 ㄱ자 건물이 혼카와 초등학교히로시마 시내 중심부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살아남았다, 물론 그 안에 든 사람들까지 살아남았단건 아님이쪽은 강바닥을 준설하면서 건져올린 원폭 돔의 일부1층으로 가는 계단인데 이쪽으로 올라갈 수는 없고 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피폭 직후에 찍은 지하 1층사진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불에 탄 나무 문틀이나 기계들이 그대로 있어서 조금 섬뜩한 느낌도 들었음다시 1층으로 올라오면 원폭으로 변형된 다양한 물건들을 볼 수 있다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열에 녹아버린 유리병이었는데 잠깐이나마 원폭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음변형된 총과 철모혼카와 초등학교는 만화 "맨발의 겐"에 나오는 모토카와 초등학교(元川小学校)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다음으로는 다양한 사진 자료를 볼 수 있다같은 곳에서 찍은 폭발 전후의 모습부터폭발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오이 다리와 혼카와 초등학교동쪽에서 바라본 혼카와 초등학교폭발의 후폭풍으로 철근 콘크리트제 벽이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이건 폭발로 무너진 강당의 기초1946년 2월부터는 최소한의 수리만 한 채 아무것도 없는 교사에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혼카와 초등학교에서 바라본 원폭 돔1988년 고쳐 쓰던 피폭된 구교사를 철거하는 모습사진의 건물 1층이 지금의 평화자료관 부분이다근데 핵맞은 건물을 40년동안 고쳐 쓰는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노;;원폭의 무서움을 느끼며 지금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교정을 바라보며 마무리끗
작성자 : 김파토고정닉
일본 모두를 울린 교토 치매 노인 살해 사건...jpg
교토간호살인사건 (京都介護殺人事件) 하면 오래 전 일본의 기계적인 관료주의와 노인 복지에 대한 경종을 울렸던 2006년 2월 1일, 교토시 후시미(伏見)구에 가츠라가와(桂川)의 보도에서 무직인 54세의 가타기리 야스하루(片桐康晴) 가 치매를 앓고 있던 86세의 자기 어머니를 목졸라 살해 후, 자신도 자살을 시도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야. 사건 내용 자체는 단순히 치매 노인의 간병에 지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흔한 내용이 아니라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려고 온갖 애를 쓰지만 일본의 사회는 이를 지극히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기계적인 대응을 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많은 반성의 여론이 있었던 사건이지. 주인공인 가타기리의 아버지가 1995년 80세의 나이로 사망 후, 어머니가 치매를 일으켰어. 사건으로부터 약 11년 전의 일이야. 어머니의 치매는 2005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해서 삼각 김밥의 포장지를 먹거나, 여우가 뛰어다닌다며 천장을 두드려 대거나 한 밤중에 외출을 하다가 경찰들의 보호를 받아 집에 돌아오기 일수인 나날이었지. 물론 벽에 똥칠하는 건 기본. 당연히 한 밤중에 15분 마다 깨는 나날을 보내던 가타기리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며 심하게 지쳐갔지. 지친 그는 결국 간호보험(介護保険) 을 신청하고, 아파트 근처에 있는 데이케어서비스를 받기도 했지만, 밤낮이 역전된 상황에서 나아진 것은 없었고, 그럼에도 가타기리틑 헌신적으로 간호를 하다, 결국 7월 경에 휴직을 하게 되었지.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를 않고, 결국 9월 경에 다시 공장일을 재개했지만, 일과 치매걸린 어머니의 간호를 동시에 하는데에 한계를 느끼고 결국 사직을 하고, 집에서 간호를 하는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어. 하지만 구청의 직원들도 가타기리를 제대로 상대해주지를 않았어. "형편이 좀 나아질 때까지라도 생활보호를 받을 수 없을까요?" 라고 매달리는 가타기리를 구청 공무원들은 "당신은 아직 일할 수 있으니까요" 라고 냉혹하게 거절했어. 이 부분에 대해 가타기리가 재판 도중에 상당히 강조해서 분노를 표출했다고 해. 카드빚도 이미 25만엔 의 한도를 넘은 상태였고, 식사도 점점 곤란해졌지. 결국 가타기리는 자신의 식사는 2일에 한 끼로 줄이고도 어머니의 식사를 우선시하며 살아갔어. 그리고 2006년 1월 31일, 그 때까지 갚지 못했던 집세 3만엔을 도저히 갚지 못하겠다는 뜻을 담은 유서를 두고 마지막 남은 현금 7천엔을 가지고 어머니와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이 때 가타기리는 집 안을 깨끗히 청소하며 어머니에게 "내일이면 끝날 거에요." 라는 말을 했다고 해. 마지막 식사는 편의점에서 사온 빵과 쥬스가 전부였지. 그리고 집 안의 차단기를 내린 뒤에 로프, 식칼, 잭나이프 등을 챙겨서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고 집을 나썼지. 가타기리가 어머니에게 "어디에 가고 싶어요?" 라고 묻자 "사람이 많은 곳이 좋구나." 라고 대답했다고 해. 일인당 300엔의 전차비를 들여,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지. 그러다가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같이 식사를 했던 식당을 발견하고는 추억에 젖어 들어가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거의 남지 않아서 그마저도 포기했지. 그리고 운명의 후시미(伏見) 에 도착했지. 이제는 더이상 돌아갈 일이 없을, 아파트 근처의 개울 가에. 이것도 어머니에게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집 가까운데로 가고 싶다" 라고 해서 간 것이라고 해. 2월 1일, 아직 추운 날씨에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에게 방한용 옷을 걸쳐 주고는 몇 시간을 그렇게 묵묵히 있었어. "이제 돈이 없어요. 더 살 수가 없어요. 이걸로 끝이에요." 이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그러냐, 이제 안 되겠구나, 함께란다, 너와 함께란다."- 이리오렴, 이리오렴- 가타기리가 가까이 가자 어머니는 "너는 내 아이다, 내 아이야. (네가 나를 죽이게 할 바엔) 내가 하마." 이 말을 듣고 가타기리는 살해를 결심했어. 우선 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한 뒤에, 혹시라도 살아서 괴로움을 받을가봐 나이프로 목을 찌르고, 시체를 모포로 감싼 뒤에, 자신의 목, 배, 손목을 긋고, 준비해 온 로프로 확실하게 죽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어. 그리고 4월 19일 교토 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어. 3차 공판에서 재판관이 비슷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건 왜 그런가 라는 물음에 대해 -오늘,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일어설 기회를, 생각할 시간을, 그리고 돈을 주십시오- 라고 진술했다고 해. 정작 필요할 때 규정만을 앞세워 자신을 돕지 않았던 관료들에 대한 항변이었지. 그리고 재판관은 -결과는 중대하지만, 피해자(모친)은 결코 원한을 품지 않고, 피고가 행복한 인생을 걸어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 추찰된다- 라고 운을 떼지. "본 건으로 심판받아야할 것은 피고인 만이 아니며, 간호보험이나 생활보험 행정의 본연의 자세도 묻고 있다 이렇게 사건으로 발전한 이상은, 어떻게 대응했어야 할 것인가를 행정 관게자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다." 라고 판결문에 명시하여, 이 사건에 있어서 일본 공무원들의 안일한 태도에도 경종을 울렸지. 결국 가타기리는 징역 2년 6월, 집행 유예 3년이라는 파격적인 판결을 받았어. 판결 후에 -절대로 스스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한다- 는 주문이 있었다고 하지. 이 사건 이후로 일본에서는 복지 시스템에 대한 고찰은 물론, 공무원들의 자세에 대해 많은 반성이 있었어.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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