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썬'은 누군가의 등을 한참 들여다보고 쓸어내리고 끌어안는 '이해'의 이야기다. 극중 그 주체는 '소피'라는 여성이고, 객체는 지금의 소피 또래 정도로 보이는 과거의 젊은 아빠 '캘럼'이다. 성인이 된 소피는 캠코더 기록을 통해 20년 전 11살 무렵에 아빠와 함께 했던 튀르키예에서의 여름을 찬찬히 소환해낸다. 그리고 그 기록 너머 당시엔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아빠'라는 구전을 꺼내, 당시의 그와 접속하고자 한다.
천진한 딸과 아빠의 대화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점차 그들 각각에게 존재했던 기록 너머의 시간들을 건져올린다. 사랑하는 딸과의 행복한 여행이지만, '캘럼'은 어째서인지 사뭇 우울해보인다. 영화는 과거와 미래가 소거된 기록 속에서 그 우울의 근원을 소상히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끊임없이 침잠하는 아빠의 등을 비출 뿐이다. 한편, 이 시기는 딸 소피에게도 복합적인 고민을 안겨 준 시기다. 섹슈얼한 행위에 호기심을 내비치기도 하고, 동성 커플의 키스를 유심히 바라보는 소피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 아빠의 이상한 행동과 공허한 눈빛 속 의미를 가늠하기에는 낯선 세계에 더 마음이 동하는 어린 딸과 스스로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워 딸의 과도기적 단계를 감지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아빠는 때로 마찰을 겪기도 한다. 영화는 그렇게 캠코더에 기록된 무탈한 일상에 담기지 못한, 당시의 아빠와 '나'의 사연에 대해 그때의 캘럼과 비슷한 나이가 된 소피의 시각에서 재구성해낸다.
캠코더에 담긴 파편적인 기록과 분절적인 이미지에서 발생하는 과거의 공백을 메꾸는 건, 어디까지나 소피의 관점에서 재생 및 틈입되는 기억들과 파생되는 상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과 기억, 상상도 결코 그때의 모든 정서와 상황을 가감없이 복원해내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건 필연적인 오독에 대한 한계가 아닌, 그 불온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그리하여 의미를 아로새기려는 능동적인 시도에 대한 가치다. 성인이 된 소피는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캘럼의 등을 계속해서 연상해낸다.(소피는 경험치 못했을 캘럼의 모습을 주인 없는 시선 안에 담아낸 것이라 볼 여지도 있지만, 필자는 소피의 상상 혹은 연상에 무게를 두는 쪽이다.) 이에 맞추어 영화는 캘럼의 불안과 방황, 우울 등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의 집적을 정면이 아닌 등으로 형상화해낸다. 예컨대 소피가 잠든 뒤 홀로 남은 캘럼이 담배를 물고 흐느적거리는 동작이라거나, 칠흑의 바다 속으로 소멸하는 시퀀스, 다시 방으로 돌아와 흐느끼는 시퀀스 모두에 부각되는 건 캘럼의 등이다.
이는 꽤나 모순적인 함의로 읽힌다. 그때는 살피지 못했던 아빠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 소피는 어쩌면 그 근원에 대해 나름의 가닥을 잡아간 듯도 하다. 그러나 한편 위태롭고 축 쳐진 등이 축소되고 확장되고, 정적인 채로 동적인 채로 잡히는 동안, 소피는 그의 명료한 얼굴을 그려내지 못한다. 이는 결국 기록과 기억에 상상까지 접목한다 할지라도 그의 심연 속 견고한 문은 비좁은 틈만 내줄뿐 끝내 '이해'의 좌절을 안겨줄 것임을 암시한다. 그 외에도 극중 캘럼은 유독 정면보다는 측면이나 후면에서 비춰지곤 하는데, 그의 얼굴이 정면을 향해 클로즈업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찰나는 후반부 섬광으로 가득한 광란의 현장에서 어른이 된 소피가 과거의 아빠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이때 캘럼의 얼굴은 다시 가까워졌다 점차 멀어지고 이내 소실된다. 이는 결국 근경에 이르러서도 가닿을 수 없는 그 심연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극중 소피는 캘럼과 함께 부르려했던 노래를 혼자 무대에 올라 독창한다. 현실적인 무게가 담긴 때묻은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소녀 소피는 무해하게 가사를 읊는다. 한편 20년 후 동성 연인과 자녀를 둔 채, 단란한 가정을 꾸린 현재의 소피는 광란의 춤사위 속에서 'Under Pressure'에 흐르는 리듬에 맞춰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아빠를 멈춰 세우고 끌어안는다. 인생의 한계에 대한 절규어린 노래를 천진하게 읊던 소녀는 이제 그 의미를 읽어내고, 그 안에 놓인 캘럼이라는 인간을 본다. 여행의 마지막 순간, 캘럼의 데인 어깨를 진흙으로 덮어주었던 그때처럼, 소피는 고독의 문이 봉쇄되기 직전, 어쩌면 한동안 혹은 영영 접속할 수 없을, 그를 마지막으로 힘껏 끌어안는다. 샬롯 웰스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 기반한 창작물임에도, 종국에 밀려오는 파고에 젖어드는 감흥을 쉬이 지울 수 없는 데는 큰 시차를 두고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 담보하는 향수와 위안이라는 물결 그리고 패배감이라는 잔여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경험으로 가장 보편적인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흔치 않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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