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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클래식 음악들의 역사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15.137) 2014.01.16 18: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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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음악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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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명곡해설

클래식 음악과 역사

클래식이라는 말은 음악의 전문 용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말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클래식의 어원은 계급이나 반을 의미하는 클래스와 관계가 있는 모양이어서, 기원전 6세기의 고대 로마에서는 군인의 최고위를 가리키는 말에도 전용되었다. 즉, 이 말에는 어느 사이엔가 제1급이라든지 최고급이라고 하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제1급일 것

그러므로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당연히 제1급의 걸작을 가리켜서 타작(駝作)은 처음부터 이 말을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이 걸작은 후세의 모범으로 오래도록 전해가며 또한 진정한 명작은 역사와 시간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입증된다. 그리하여 클래식 음악에는 오래된 작품이 차지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우리들이 이러한 음악과 접하는 경우에도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즐거움보다는 정신적인 양식으로서 교양을 깊이 하는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점이 일상의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세속적 음악과는 자연히 성격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가 지나 중세 말부터 르네상스에 걸친 무렵에는 클래식의 의미도 구체적으로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클래식이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예술을 총칭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럽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고대 문화∙예술이 모범으로 삼기에 족할 만큼의 영속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클래식’이라고 할 때는 오늘날에도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우리들이 한국어로 고전(古典)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외경심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의 운동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클래식’에서 이상을 구하고, 그것을 재생∙부흥시키려 하는 운동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래된 음악은 남지 않았다.

당연히 음악에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클래식’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즉 고대 그리스∙로마의 음악을 재생, 부흥시키려고 하는 음악에서의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래된 음악은 이미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음악가들은 여기서 의외의 곤란에 부딪쳐야 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은 문서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독특한 문자로 적힌 그리스의 악보는 겨우 몇 곡의 단편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으며, 그것도 근대에 들어온 뒤에 발견된 것뿐이다. 그런 이유로 빛나는 ‘클래식’의 부흥이어야 할 르네상스도 유독 음악에 관해서는 뜻밖에 부진했다. 

그보다 모범으로 삼아야 할 ‘클래식’을 알지 못했던 음악은, 문학이나 미술과는 스스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에 음악의 정점에 선 대가들인 빌라르트∙오를란도 디 라소∙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의 이름이 레오나르도∙라파엘로∙미켈란젤로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음악조차 보존이 안 된 상태인데, 그들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고대 오리엔트의 나라들―메소포타미아∙이스라엘∙이집트―의 음악이 전해져 있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이들 나라의 음악은 상당히 발달했고 악기도 정비되었으며 직업적인 음악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는 있지만, 어쨌든 음악의 실체는 음이어서 공중에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다. 

완비된 기보법이 없었던 고대의 음악은, 극히 일부분의 자료만이 지구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럽의 음악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음악을 고전으로서 우러러 볼 수 없었고, 과연 그것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그 결과로 그들의 역사와 감성에 바탕을 둔 방법으로 음악의 고전적 기초를 쌓아 올려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클래식 음악의 역사이다.

독일 음악 만능주의

독일 음악 만능주의와 같은 특수한 사정도 얽혀, 클래식 음악의 의미를 엄밀히 정의하려면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곧 베토벤(독일)의 이름이 꼽힌다. 그만큼 베토벤(독일)은 대음악가였지만, 동시에 클래식 음악에 심각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인상을 준 장본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오스트리아), 존경할 선배인 모차르트(오스트리아)를 함께 하여 이 3명을 ‘빈 고전파’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클래식 음악의 대표로 치는 생각은 상식적이며 타당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3명의 음악가가 저마다의 개성적인 매력을 지니면서도 공통된 스타일 위에 서서, 빈이라는 한 도시를 초월해 세계적인 영향을 음악사의 발전에 주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베토벤(독일)은 선배들의 업적을 이어받아 완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베를리오즈(프랑스)나 바그너(독일)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미래를 앞서가는 종합성을 갖고 있었다. 인간 정신의 이상을 베토벤(독일)만큼 강렬하고 높은 수준의 음악으로 노래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전무후무한 대음악을 음악사의 최고봉으로 치는 데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확실히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고 하겠다. 

베토벤(독일)을 클래식 음악의 최고봉으로 치면 J. S. 바흐(독일)에서 하이든(오스트리아)∙모차르트(오스트리아)를 거쳐 베토벤(독일)에 도달하고, 나아가 바그너(독일)∙브람스(독일)로 연결되는 독일 음악의 계보가 음악사의 주류로서 클로즈업된다. 또한 독일(오스트리아)음악이 아니면 최고의 음악이 아니며, 클래식 음악사는 대(大)바흐(독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열광적인 독일 음악 만능주의마저 생겨난다. 바로 한 시대 전까지는 이러한 사고 방식이 지배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아직 뿌리가 깊다.

확대된 레퍼토리와 혼란

그러나 프랑스 음악에는 프랑스 음악 특유의 장점이 있으며, 빛나는 역사와 프랑스 음악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명작도 많다. 이탈리아 음악에도, 러시아 음악에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베토벤(독일)은 위대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독일 음악이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사나 음악학의 연구 성과도 있어서, 지금까지는 별로 중시되지 않았던 바흐(독일) 이전의 음악도 연구하여 부활 연주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극히 일부의 애호가에게만 알려져 있었던 비발디(이탈리아)의 「사계」가 지금은 레코드의 베스트 셀러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는 현대의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까지는 실험적인 시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전자 음악이 축전 음악으로 쓰이는 시대이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의 레퍼토리는 급속히 확대되어 있지만, 반면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감각도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매스컴이 이 경향을 조장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어서 클래식 음악도 정보 과잉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독일 음악 만능주의는 배제해야 하겠지만, 이 혼란도 또한 클래식 음악의 풍부한 즐거움을 해치게 된다. 혼란이란 무릇 클래식이 아닌 관념인데, 이와 같은 이유로 클래식 음악이 걸어온 독특한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다볼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음악의 중요한 발전 단계를 중점적으로 파악하여 개괄적인 음악사의 지도를 머리 속에 그려 두면 혼란 속에 망설일 필요도, 혼란이 두려워 좁은 레퍼토리에 틀어박힐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또한 클래식 음악의 본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다만, 음악을 듣는 데 지식은 불필요하다는 설도 있다. 이런 설은 이미 진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든가, 혹은 클래식 음악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의 견해일 것이다. 올바른 이론적인 지식은 클래식 음악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중세는 암흑 시대가 아니었다.

고대 음악의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중세에서부터 연구해 나가야 한다. 르네상스가 빛나는 문예 부흥기임에 비해 중세는 암흑 시대라고 하는 설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교회나 승려의 타락과 부패, 이단자의 박해와 어용 철학의 융성, 과학과 사상의 자유의 탄압, 검은 사신(死神) 페스트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검은 그림자는 중세 특유의 것일까? 변화된 모습으로 현대 생활에도 따라다니는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와 중세 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이 시대를 싸고 있던 암흑의 베일이 벗겨짐에 따라 중세 암흑 시대설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중세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밝고 빛나는 시대라고 하는 설마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어떻든, 막연한 중세라고 하는 시대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중세의 사상, 학문, 예술, 더 나가서는 인간의 모든 생활이 교회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신을 향해 질서가 잡혀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만 말하면 중세는 명백히 암흑 시대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도와 결부된 노래는 이를테면 중세의 특권적인 예술이었다. 고전 고대의 ‘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음악은 교회 속에서 커다란 애정에 감싸여 무럭무럭 자라갔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가 성가를 집대성한 것은 유럽의 음악에 보편적인(카톨릭이라는 말에는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없다) 기초를 준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일 사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유럽 음악의 훌륭한 발전은 생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오르간의 급속한 발달과 기보법의 발명도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종이 위에 음표를 기록함으로써 이미 음악의 순간성(일회성)이 완전히 보완되었으며, 음악을 ‘적어간다’고 하는 근대적인 작곡법도 악보의 발달과 완성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속 음악

한편, 교회 음악 이외에도 세속 음악이 있었는데, ‘트루바두르’ 이전의 것이 거의 기록되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 12세기의 기사도가 화려했던 무렵, 세속 음악의 주류는 음유 시인이라고 불리는 기사들의 손에 맡겨졌다.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troubadour)’와 북프랑스의 ‘트루베르(trouvère)’는 이들 방랑의 기사들에게 주어진 이름인데, 그들의 음악은 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연가를 포함하여 연애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음유 시인의 풍습이 독일에 전해지면 ‘미네젱어(Minnesänger)’ 즉 귀부인에의 봉사를 첫째의 사명으로 하는 게르만의 연애가인이 탄생한다. 13세기초, 제일류의 ‘미네젱어’들이 발트부르크의 성에 모여 노래 경연을 벌였는데, 바그너(독일)의 오페라 「탄호이저」(오페라)는 이때의 정경을 멋지게 재현하고 있다. 

14세기에 들어와 시민 정신이 대두하자 세속 음악의 담당자도 기사 계급에서 시민 계급으로 옮겨지고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 즉 장인(匠人)들의 명가수가 패권을 다투게 된다. 바그너(독일)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오페라)에서 이들 명가수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오페라로도 알 수 있듯이 뉘른베르크의 구두 제조업자의 우두머리 한스 작스는 가장 알려진 마이스터징어였다. 그들의 노래는 이윽고 독일 민요와 융합하면서, 동시에 역사의 걸음도 중세에서 급속히 르네상스로 옮겨 간다.

폴리포니의 발달

세속 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했으나, 중세 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역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성 음악, 즉 폴리포니(polyphony)의 발달이다. 9세기말까지의 교회 음악은 모두 단선율 음악으로 한 개의 선율을 부르는 음악이었으며, 또한 음유 시인들의 음악도 단선율 음악이었다. 그러나 9세기가 끝날 무렵, 교회의 음악가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에 대해 한 개 내지 그 이상의 대성부(對聲部)를 더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초기의 다성 음악은 ‘오르가눔’이라고 불렀으며,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 노트르담 사원의 부속 음악 학교 ‘스콜라 칸토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가들에 의해 크게 발달하였다.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성악곡)로 유명한 ‘모테트 형식’도 13세기의 다성부 성악곡 ‘모테투스’에 유래한 것으로서, 모테투스는 오르가눔에 비해 각 성부가 자유로이 독립된, 즉 보다 폴리포닉한 형식이었다. 이와 같이 폴리포니의 발생과 발달에 의해 유럽의 음악은 역사적인 대전환을 했으며, 이윽고 화려한 폴리포니의 시대가 시작된다.

아르스 노바(Ars Nova)

14세기에 들어서면 다성 음악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 음악에도 침투하기 시작하여 ‘마드리걸’이나 ‘론도’ 등 새로운 형식의 노래를 탄생시켰다. 이것들은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발전되는데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 특히 화려한 도시 피렌체였다. 여성의 매력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마드리걸’에서는 이미 르네상스의 활기에 찬 생명력조차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위에 이들 새로운 가곡을 화려하게 반주하는 악기의 교묘한 사용법은, 다가오는 기악 시대의 전조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아르스 노바’는 알프스를 넘어 북상하여 파리의 대작곡가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에게 전해져서 두각을 나타내고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은 이미 ‘아르스 안티콰(낡은 예술)’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쇼의 이름과 함께 유럽의 음악사도 드디어 우리들 곁으로 가까이 오게 된다.

르네상스의 음악가들

르네상스는 고대 문화의 재생, 즉 ‘클래식’의 부흥을 이상으로 하는 운동이었으며,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클래식’의 음악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고대 그리스·로마의 음악 자체가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즉 개성이나 인간적 감정의 눈뜸이라든가 명쾌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 동의 반영을 음악에서 찾아내려 한다면, 이미 ‘아르스 노바’에서 음악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지역적인 차이가 있는데, 대략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친 음악의 대표적인 담당자는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400?~1474)를 중심으로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에서 활약한 ‘부르고뉴 악파’와, 이어 이 악파의 영향을 받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번영한 이른바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이었다. 이 두 파의 음악가들은 주로 교회 음악으로, 특히 그 최고의 형식인 ‘미사곡’의 예술적 완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플랑드르 악파’의 대음악가 조스캥 데 프레 (Josquin des Préz, 1450?~1521)는 교회 음악이 간과하고 있었던 인간의 감정을 되찾은 최초의 작곡가였으며, 고전적인 폴리포니 양식을 완성하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틴 루터가 데프레를 격찬한 것도 까닭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 1490?~1562)도 이 악파의 중심적인 음악가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윽고 베네치아로 옮기고 후에 바로크 음악과 결부되어 가는 독특한 스타일을 정립하였다. 앞서 악보 인쇄와 출판을 행한 베네치아는 당시의 선진적인 음악문화 도시로서, 이곳으로 옮겨간 빌라르트의 악풍은 이윽고 현란한 색채와 힘찬 극적 효과를 갖게 되었다. 그가 창시한 기악의 ‘리체르카레(Ricercare)’ 형식은 후에 ‘교회 소나타’나 ‘푸가(독주곡)’로 발전하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플랑드르 악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음악가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 1532?~1594)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답게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이었으나 이탈리아와 영국을 여행하고 1556년 이후는 뮌헨에서 살았다.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의 양면에서 바로크 음악의 선구라고 할 만한 신선하고 대담한 악풍을 정립하여 국제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00곡이 넘는 곡을 썼다고 하며, 세속 음악으로는 독일어의 리트, 프랑스어의 샹송, 이탈리아어의 마드리걸 등 각국 특유의 성악곡을 쓰고 그 다채로운 재능을 나타냈다. 

이처럼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은 온 유럽에서 활약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사를 추진했는데, 라소와 동시대 인물인 로마의 대음악가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가 걸은 길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16세기의 음악의 중심은 베네치아와 로마로서, ‘베네치아 악파’가 진보적이었음에 비해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악파’는, 같은 ‘플랑드르 악파’의 대위법적인 기법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오로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 음악 완성에 힘쓰고 있었다. 교회 음악의 타락이 자주 지적되었던 르네상스의 시대에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는 무반주의 ‘아 카펠라(a cappella: 사원풍)’ 스타일에 의해 교회 합창 음악에 최고의 종교적 표현을 주는 데 성공한 음악가였다. 그의 걸작 「교황 마르첼스의 미사곡」은 오늘날 예술 음악으로 감상되고 있다.

독일과 영국의 신음악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의 주류는 교회 음악은 물론, 세속 음악에 있어서도 합창곡이었으며, 기악곡은 아직 미미한 정도였다. 폴리포니 기법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합창곡이었고, 합창곡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인간 정신을 구가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음악이었던 것이리라. 이탈리아의 ‘마드리걸’과 프랑스의 클레망 잔캥(Clément Janequin, 1485?~1560?)의 아름다운 ‘샹송’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탈리아에서 미술이나 문학과 함께 음악이 화려한 결실을 거두고 있던 무렵, 독일이나 영국의 음악도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나타내고 있었다. 독일은 이윽고 클래식 음악의 주류가 되는 나라였지만, 독일 음악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나란히 음악사의 표면에 나타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전반에는 민요를 소재로 해서 ‘플랑드르 악파’의 대위법으로 작곡된 다성의 가곡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들 가곡은 ‘마드리걸’이나 ‘샹송’과는 다른, 독일풍의 동경과 감상(感傷)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으로, 후에 독일 ‘리트’의 싹틈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독일 음악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현상은 루터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음악, 특히 ‘코랄’의 탄생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하며 힘차고 새로운 이 종교가는 처음에 단선율의 유니즌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윽고 플랑드르의 대위법과 결부되고, 다시 그것을 단순화함으로써 진보적이며 현실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남김없이 전하면서, 마침내 J. S. 바흐(독일)에 이르러 최고의 예술적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 16세기의 영국은 엘리자베스 왕조의 황금 시대에 해당하고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15세기의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70?~1453)은 ‘부르고뉴 악파’보다 먼저 착수한 대작곡가였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의 최대의 음악가인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543?~1623)의 업적도 음악 발전에 있어서 그에 비견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는 교회·세속 음악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악곡이며 특히 버지널을 위한 작품이었다.

바이올린의 발달

버지널은 당시 영국에서 유행한 건반 악기로서 쳄발로(하프시코드, 클라브생이라고도 불린다)의 일종이며, 18세기 후반에 피아노가 나타날 때까지 쳄발로는 오르간과 함께 건반 악기의 왕자라고 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악기이다. 바이올린족, 즉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일족의 발달은 16세기의 음악사에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찰현 악기(현을 문질러서 음을 내는 악기)는 바이올린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비올족이었다. 비올은 발현 악기(줄을 뚱겨서 음을 내는 악기)인 류트 등과 함께 궁정에 있어서의 기악 합주의 중심적인 악기로서 우아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갖고 있었지만, 음량이 작고 표현 능력도 제한된 단점이 있었다. 

15세기의 후반에 들어오면 시민 계급의 대두가 특히 심했던 베네치아에는 많은 극장이 세워지고, 연극이나 연주회를 시민에게 공개하게 되는데, 넓은 공간에서의 비올족의 음량과 표현 능력은 너무 부족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새로운 찰현 악기 바이올린족은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급속히 발달하게 된다. 그 이래 명악기 제작자인 아마티와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일가의 노력에 의해 18세기 초 오늘날의 바이올린족이 완성된다. 이들 명장(名匠)들은 중세 이래의 장인의 전통에 따라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나 브레시아 시의 좁은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바이올린족의 악기는 이를테면 시민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실현되어 갔는데, 음악의 역사도 1600년을 경계로 하여 신흥 시민 계급의 활발하고 의욕적인 정신을 반영하여 획기적인 대변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오페라의 탄생

‘클래식’의 부흥을 이상으로 하는, 르네상스다운 시도가 음악까지도 말려들게 한 것은 16세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대음악가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와 라소가 잇따라 세상을 떠난 1594년,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 집에 모인 문화인들은 그리스 연극을 부활 상연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교양 있는 귀족·화가·시인·음악가들의 이 모임은 ‘카메라타’(동료라는 의미)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 의욕적인 시도에는 거의 절망적인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 연극에서 주역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은 코로스, 즉 코러스였기 때문이다. 코로스가 빠진 그리스 연극은 생각할 수 없었는데, 가장 중요한 그리스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카메라타’의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였는데,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드라마 페르 무지카’ 즉 음악극의 일종이며, 1597년에 상연된 「다프네」는 그 제1탄이었던 셈이다. 

‘드라마 페르 무지카’가 어떤 것이었는지 유감스럽게도 그 자료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있지 않으며, 음악극의 구성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중세 교회에 있어서도 12~13세기경의 전례극이나 14~16세기의 신비극은 종교극이기는 했지만 음악극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16세기의 궁정에는 발레와 가면극이 성행하였는데, 여기서 음악은 불가결한 요소였다. 또한 연극의 막간에 상연된 ‘인테르메초’나 마드리걸풍의 ‘마드리걸 코메디’도 음악극의 일종이었다.

‘드라마 페르 무지카’가 이들 전통적인 음악극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종래의 폴리포니의 음악을 사용치 않고 새로운 모노디 양식의 음악을 사용한 점이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을 기초로 하여 언어와 선율을 완전히 일치시켜, 말의 자연스럽고 바른 억양을 잃지 않고 내용을 명확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독창을 중심으로 하는 모노디 양식에 의해야 한다.―‘카메라타’의 사람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것은 확실히 클래식한 결론이었다. 독창이나 독주되는 단일 선율에 화성의 반주를 붙인 모노디의 음악에서 얼마 후에는 기능 화성의 원리가 나오게 된다. 기능 화성은 바로 최근까지 전 세계의 예술 음악을 떠받치고 있었던 기본 원리이며 클래식 음악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바로크의 음악과 숫자표 저음

17세기에서 18세기의 중엽에 걸친 유럽을 이른바 바로크의 시대라 부르는데,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비발디(이탈리아)나 J. S. 바흐(독일), 헨델(독일) 등의 음악에 의해 친해지고 있지만 원래 바로크란 미술사의 용어였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의미의 스페인어가 어원인 듯하며, 이 시대에 유행했던 장식이 과다한 대규모의 건축이나 회화에 대해 균형과 조화를 중히 여긴 18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자들이 내뱉은 모멸의 말이었다. ‘일그러진’, ‘찌그러진’, ‘과장된’ 혹은 ‘어울리지 않는’이라고 하는, 요컨대 ‘악취미’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나쁜 의미의 단어는, 렘브란트나 루벤스로 대표되는 동감이 풍부하고 감정 표출이 심한 회화를 가리켜 일컫고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우리들과 친숙한 음악가의 이름이 잇따라 나타난다. 다만, 바로크 음악이라는 명칭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아니, 바로크뿐만 아니라 고딕이나 로코코 등이라고 하는 미술사의 양식을 그대로 음악에 유용하는 데는 언제나 문제가 있다. “도대체 음악의 어디가 바로크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비발디(이탈리아)의 「사계」를 상기하면 곧 알 수 있듯이 모노디의 음악을 주류로 하고 있었다. 모노디의 특징은 매력적인 선율인데, 잘 들어보면 반주의 화성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성은 언제나 저음(베이스)을 기초로 해서, 그것에 화음을 포개어 쌓아가면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저음부를 연주해 주는 악기가 있으면 매우 편리하다. 이것이 숫자표 저음인데 보통 쳄발로가 담당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이 숫자표 저음이 커다란 특징이었는데,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은 낮은 음 외에는 화음을 나타내는 숫자나 기호뿐이고, 나머지는 연주자의 즉흥에 맡겨지고 있었다.

오페라의 발달

모노디 음악은 폴리포니 음악과는 스스로 다른 표현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훨씬 극적인 표현을 가능케 한다. ‘카메라타’의 정신을 이어받은 몬테베르디는 1607년에 만토바에서 초연된 오페라 「오르페오」(오페라)로 이 사실을 유감없이 실증했던 것이다. (오페라)의 성공을 계기로 오페라는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마를 거쳐 나폴리까지 퍼지고 온 이탈리아를 오페라 열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기초는 이렇게 해서 다져진 것이었다. 다만, 오페라가 유행함에 따라 ‘카메라타’의 예술적 이상이 차츰 희미해지고 스타주의와 치부주의(致富主義)가 만연해졌다. 또한 공개된 오페라 극장은 예술 감상의 장소라기보다는 잡다한 사람이 모이는 사교장으로, 먹고 마신 끝에 싸움을 한다거나 도박판을 벌이는 일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타주의와 결부되고는 있었지만 A. 스카를라티 무렵에는 매력적인 ‘다 카포 아리아’의 형식, 즉 A-B-A 의 세도막 형식의 아리아가 정비되었으며, 그 후에도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위세를 떨쳤다. 한편, 오페라의 줄거리를 전개하는 ‘대사’의 주고 받음은 대화풍인 ‘레치타티보’의 형식으로 처리하게 된다. 

오페라가 직접, 간접으로 악기에 준 영향도 크다. 관현악이 ‘오케스트라’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때까지는 관현악은 가수들의 뒤에서 연주되었으나 오페라가 점점 음악적으로 발전되자 관현악단과 가수가 다같이 객석을 향하고 있어서는 상호간의 연락을 잘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현악은 오늘날처럼 무대 앞 자리에 놓이게 되는데, 이 자리는 그리스의 극장에서 ‘오케스트라’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오페라라는 명칭 자체가 우연의 산물이었다. 정식 명칭은 이미 적었듯이 ‘드라마 페르 무지카’였지만, 이윽고 단지 ‘오페라 인 무지카’ 즉 ‘음악의 작품’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다시 ‘오페라(작품)’로 단축되어 갔다. 즉, ‘작품’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선 오페라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오페라가 당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17세기말부터 18세기의 전반에 걸쳐 나폴리에는 A. 스카를라티를 중심으로 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모여 이탈리아의 바로크 오페라의 전형을 엮어 갔다. 이 무렵이 되면 아무리 ‘클래식’이라고는 하나, 답답하고 또 틀에 박힌 비극만으로는 청중은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연극 막간의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던 ‘인테르메초’가 그대로 독립하고, 진지한 ‘오페라 세리아’와 반대되는 ‘오페라 부파’로서 유행하기 시작한다.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마님이 된 하녀」(오페라)는 초기의 오페라 부파의 걸작으로 오늘날에도 종종 상연되는 가장 오래 된 오페라의 하나이다.

베르사유의 음악가들

이탈리아 오페라는 17세기 중엽, 명재상 마잘랭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일행을 파리에 초청함으로써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의 프랑스는 절대주의의 왕정 밑에서 이미 고전주의적인 취미의 통일이 행해지려 하고 있었다. 전유럽적인 바로크의 시대에 이미 고전주의가 강행되고 태양왕 루이 14세의 친정하에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그 황금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다만,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그 자체가 귀족과 상류 시민 계급과의 순간의 타협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취미를 반영한 프랑스 고전주의의 황금 시대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극의 라신, 희극의 몰리에르, 시인이자 비평가인 보봐르 등의 문인들에게 공통되어 있었던 ‘클래식’의 찬미, 이성과 양식, 질서와 조화, 간결과 명쾌의 존중은, 장려한 베르사유 궁전의 위용과 함께 그 후의 고전주의 운동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베르사유에서 가장 중심적인 활동을 한 음악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음악적 재능과 함께 처세에도 뛰어났던 륄리(프랑스)인데, 륄리(프랑스) 한 사람에 의해서 음악이 주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파리에서의 오페라 상연 독점권을 루이 14세로부터 승인 받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귀화한 륄리(프랑스)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맞서는 프랑스 오페라의 창작이 가장 큰 염원이었다. 이 염원은 당시 크게 고양된 프랑스 국민 의식과(비록 상층 계급에 한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루이 14세의 취미에 충분히 맞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륄리(프랑스)가 고안한 ‘프랑스풍 서곡’이 전통적인 ‘이탈리아풍 서곡’과 함께 기악의 발달에도 영향을 준 점은 주목해야 한다. 

륄리(프랑스)에서 쿠프랭(프랑스)에 이르는 베르사유의 음악은 그 후 프랑스 음악의 발전의 기초가 된 고전이며, 프랑스 음악의 ‘클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이기는 했지만, 고전주의를 예시(預示)하는 요소는 의외로 적다. 단지 라모(프랑스)의 화성 이론이 고전주의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음악은 아직도 성장기에 있었으며 준비기에 있었다. 베토벤(독일)이 태어나기까지 아직도 1세기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기악의 발달

오페라만이 바로크 음악의 주류는 아니다. 클래식 음악에 있어서 기악의 발달은 역사적으로 더욱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17세기까지의 음악은 주로 성악곡 일변도이고, 기악이라고 해야 극히 간단한 춤곡 정도였다. 바야흐로 소나타·협주곡·모음곡 등 새로운 기악 형식이 성악곡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으나 기악곡의 대부분은 성악곡을 악기로 연주하게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울린다’는 의미의 Sonare에서 파생한 소나타는 원래 ‘악기로 연주되는 노래’ 즉 초기의 기악곡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이 점에서, ‘노래한다’는 의미의 cantare에서 파생한 칸타타가 성악곡 일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나타도 이윽고 세분되고 발전하면서 고유의 기악곡 형식을 낳게 된다. 그중 대위법과 건반 악기, 즉 오르간이나 쳄발로와 결부되어 모방과 응답의 원리를 완전히 구사한 ‘푸가’는 폴리포니 정신의 최고 표현이며, 이윽고 J. S. 바흐(독일)에 의해 고도의 완성을 보게 된다. 
한편, 기악 합주와 결부된 소나타는 주로 교회에서 발달하여 느림-빠름-느림-빠름의 이른바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의 정형을 낳아 갔다. 이에 대해 귀족이나 왕후의 궁전에서 연주되는 것은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라 불렸는데, 이것은 갖가지 춤곡을 연결한 것으로 ‘모음곡’의 일종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두 종류의 소나타는 서로 영향을 끼치고, 이윽고 고전 소나타로 통일된다.

‘협주곡’은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현악기의 개량과 발달이 가져온 기악 형식인데, 오늘날처럼 독주 악기와 관현악의 협주에 의한 형식은 다소 뒤늦게 발생한 것이다. 초기의 협주곡은 이른바 합주 협주곡 즉 ‘콘체르토 그로소’이며, 코렐리에 의해 그 정형이 정립되었다. 근대적인 독주 협주곡은 명인의 발생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명인 그 자체도 악기와 기악곡, 그리고 주법의 개량과 발달의 산물이었다. ‘리토르넬로’ 형식을 주체로 한 바로크풍의 독주 협주곡은 이윽고 비발디(이탈리아)에 의해 완성되며, 「사계」는 그 대표적인 걸작이다.
명인기적인 요소는 독주곡의 탄생까지도 촉구하였다. 「악마의 트릴」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와 베라치니(Francesco Maria Veracini, 1690~1768)는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많이 썼으며. D. 스카를라티에게는 매력적인 쳄발로 소나타가 많고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같은 건반 악기의 독주곡이라도 프랑스에서는 ‘모음곡’ 형식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쿠프랭(프랑스)의 클라브생 모음곡은 그 가장 빛나는 성과이다.

바로크의 교회 음악

바로크의 물결은 전통적인 교회 음악에도 변모를 가져왔다. 기악과 세속 음악은 교회에 침투하여 새로운 교회 음악의 스타일을 정립해 갔는데, 그것이 주로 독일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 후반 독일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완전히 황폐해졌으며, 그 때문에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이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커다란 성장이다. 이 황폐의 와중에서 활약하고 ‘독일 음악가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쉬츠(독일)도 프로테스탄트의 음악가였다. 그의 국제적인 활약에 의해 독일의 음악은 드디어 음악사의 전면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쉬츠(독일)는 다른 독일의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탈리아의 세속 성악곡이었던 ‘칸타타’는 그에 의해 독일의 교회에 도입되어 ‘교회 칸타타’의 형식이 태어났다. 오라토리오나 수난곡 등 규모가 큰 종교 음악극의 형식도 그에 의해 비약적으로 충실해져 갔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전통적인 ‘코랄’로부터는 오르간의 전주부가 독립해서 새로운 기악 형식 ‘코랄 전주곡’이 파생한다. 이 형식은 사무엘 샤이트(Samuel Scheidt, 1587~1654)로 비롯되어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를 거쳐 J. S. 바흐(독일)에 이르는, 독일 오르간 음악의 중요한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크 음악도 독일 음악의 눈부신 융성과 바흐(독일), 헨델(독일)의 출현으로 빛나는 단락을 맞이하게 된다. 바흐(독일)는 평생 독일에서 생활했으며 헨델(독일)은 이탈리아, 영국에서 활약하고 마지막은 영국에 귀화한다. 영국은 일찌기 던스터블이나 버드의 활약에 의해 유럽 음악의 선구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17세기에 들어오면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에 의해 그 황금 시대를 구축해 갔다. 그러나 일찍 근대적 시민 사회가 찾아온 영국은 음악의 생산지라기보다는 소비지였다. 그 왕성한 연주 활동에 비해 퍼셀 이후의 영국인 음악가에 의한 창작 활동은 뜻밖에 부진해서 마침내 ‘음악이 없는 나라’라는 낙인이 찍히고 약 2세기 동안 음악사의 전면에서 멀어지게 된다.

전고전파의 음악

두 사람의 거장에 의해 바로크 음악이 빛나는 완성을 보여 주었던 18세기 중엽에는, 유럽 제국의 절대주의 왕정의 확립에 수반하여 문화의 중심은 교회에서 궁정이나 귀족의 살롱으로 옮겨 갔다. 베르사유 궁전의 장려한 외양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각국 군주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각지에 베르사유를 본뜬 궁전이 세워지고 왕후 귀족들은 다투어 프랑스 문화를 도입했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모국어 이상으로 프랑스어에 뛰어난 군주조차 나타나게 된다. 베르사유의 음악가들의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양식(혹은 갤런트 양식)은 소박하고 향토적인 독일의 음악가들에게조차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각지의 궁정에는 궁정 관현악단이 설치되고 궁정 음악사가 고용되어 왕후를 위한 작곡이나 연주를 맡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우수한 관현악단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은 카를 테오도어(Carl Theodor) 후작의 만하임 궁정이었다. 만하임의 궁정 음악사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는 이 관현악단을 구사하여 유럽 각지에 명성을 넓혀 갔다. 그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종합적인 음악 형식인 교향곡의 확립이며, 그것에 수반하여 근대적이고 다이내믹한 관현악 연주법을 고안한 일이었다. 이윽고 슈타미츠의 교향곡은 프랑스나 영국에서도 즐겨 연주되고 많은 작곡가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다만, 교향곡의 형식은 슈타미츠 한사람의 창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A. 스카를라티가 고안한 빠름-느림-빠름의 ‘이탈리아풍 서곡’이 이윽고 3악장 형식의 기악곡, 즉 넓은 의미의 소나타로서 독립하고, 다시 ‘모음곡’으로부터의 미뉴에트 춤곡이 제3악장으로 더해져 4악장의 교향곡 형식으로 발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일은 교향곡이나 소나타, 특히 그 제1악장의 구성 원리로서 ‘소나타 형식’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한 일이다. ‘소나타 형식’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설명하게 되지만, 전통적인 무곡 형식과, 아리아의 다 카포 형식(A-B-A의 세도막 형식), 콘체르토 그로소의 리토르넬로 형식(주제의 반복·재현), 그리고 신포니아라고도 불렸던 이탈리아풍 서곡 등의 구성 원리를 종합하여 통일감 있게 구성한 것이라 생각되며, 오늘날도 많은 음악가들의 형식 감각을 떠받치고 있다. 

‘소나타 형식’은 이윽고 하이든(오스트리아)에 의해 고전적인 완성을 보게 되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음악사였던 C. P. E.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를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음악가들의 작품도 하이든(오스트리아)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에마누엘 바흐는 J. S. 바흐(독일)의 차남이었지만 이미 구식이 된 아버지의 폴리포닉한 양식에 싫증을 내고, 호모포니 양식에 극히 풍부한 감정 표현의 능력을 주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이 북독일의 양식은 그 때문에 종종 ‘감정과다 양식(Empfindsamper Stil)’이라 불리는 수도 있다. 

지금 호모포니 양식이라고 썼는데, 숫자표 저음을 수반한 모노디 양식은 18세기에 들어서자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쇠퇴한 것은 모노디 양식이었지, 그 바탕이 된 화성의 사고 방식은 쇠퇴하기는 커녕 점점 그 지배 영역을 넓혀 갔다. 라모(프랑스)의 『화성론』(1715)의 출현은 이 경향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숫자표 저음은 화성인 점에 변함은 없지만, 역시 선율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반주의 역할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숫자표 저음이 쇠퇴하는 것과는 반대로, 화성법은 음악가의 사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것이다. 음악가들은 언제나 화성적인 음의 결합과 견주면서 선율이나 리듬까지도 생각해 내게 되었으며, 화성법의 본질적인 기능을 거기서 발견해 갔다. ‘소나타 형식’의 구성 원리는 기능 화성의 사고법에 가장 어울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교향곡이나 협주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나 소나타 등의 기악곡은 ‘소나타 형식’과 ‘기능 화성법’을 필연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최고의 완성을 찾아낼 것임에 틀림없었다. 의욕적인 음악가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고전파 음악의 소지(素地)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클래식 중의 ‘클래식’ 음악이라고 할 만한 고전파 음악의 개화는 벌써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빈 고전파

바흐(독일)·헨델(독일) 이후의 유럽 음악사, 혹은 서양 음악사를 떠맡아 온 대음악가들의 생애나 작품은 이제 우리들과 친숙한 것이 많다. 이미 언급했듯이 하이든(오스트리아), 모차르트(오스트리아), 베토벤(독일) 3명은 ‘빈 고전파’라는 이름으로 일괄되는 것이 상식이다. 다만, 3명 중에서 빈과 가장 인연이 깊었던 것은 베토벤(독일)이며, 하이든(오스트리아)은 그리 깊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家)의 궁정 음악사였던 하이든(오스트리아)은 실질적으로 고용된 마지막 대음악가였다고 해도 좋다. 고용 음악사였다는 사실은 그의 업적을 평가할 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하이든(오스트리아)이 궁정 음악사가 아니었다면, 혹은 그것을 내팽개쳤더라면 고전파의 음악이 그만큼 종합적이고 보편적인 기초를 쌓을 수 있었을지 여부는 의문이다. 변덕스러운 모차르트(오스트리아)나 화를 잘 내는 베토벤(독일)은 이와 같은 기초사업에는 어울리지 않았음에 틀림없고, 하물며 보다 작은 음악가들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이든(오스트리아)의 위대함은 오히려 고용살이에 만족했던 점에 있을 것이며, 또한 만년에 가서도 런던에 웅비할 수 있었던 점에 있다고 해도 좋다. 하이든(오스트리아)이 에스테르하지 가에 취직해서 초기의 교향곡을 쓰고 있었던 무렵, 24세의 젊은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빈과 파리를 비롯한 여행의 시대로 들어간다. 여행지에서 각지의 음악의 다채로운 요소를 흡수해 온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아이젠슈타트의 시골에 근무하고 있었던 하이든(오스트리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풍부한 국제적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1781년에 빈에 정주하고 나서 두 사람은 직접 교제하게 되는데, 모차르트(오스트리아) 음악의 다채로움이 하이든(오스트리아)의 음악, 특히 교향곡의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그 고전적인 완성을 재촉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베토벤(독일)은 두 사람의 선배만큼 다작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마다 고전 양식을 확대하고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어 온 음악가였다. 이 확대는 때로는 고전 형식의 정형을 파괴하여, 이어지는 낭만파의 음악을 앞서가거나 중세의 옛날로 되돌아가려 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베토벤(독일)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들어와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의 음악은 자연히 감각적인 성격보다는 정신적인 색채를 띠게 되어, 느끼게 하기 보다는 감동시키는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가 살았던 시대는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해서 자유로운 시민 사회에 대한 이상이 세계를 크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국제 도시였던 빈은 긴장을 잉태하면서도 아직 일종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토벤(독일)의 음악에 의해 찬양되고 있는 인류적인 이상주의는 그의 불굴의 정신력 속에서 이들 두 개의 요소가 극적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빈과 관계가 있는 세 명의 거장의 노력에 의해 기능 화성적인 사고법이 확립되고 ‘소나타 형식’도 완비되었다. 특히 주제의 대조와 조작의 원리는 철저히 추구되고, ‘소나타 형식’은 유례 없는 유기성을 부여받게 된다. 또한 관현악법에도 어느 사이엔가 2관 편성의 기준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요소는 가장 종합적인 기악 양식인 ‘교향곡’에서―아니, 베토벤(독일)은 마침내 성악까지도 더했던 것인데―최고의 결실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교향곡은 모든 음악 형식에 군림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가들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 왔다. 교향곡이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낭만파의 음악

슈베르트(오스트리아) 이후 대략 19세기 전체의 음악을 낭만파의 음악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음악적인 특색은 음악이 다른 예술, 특히 문학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점이며, 음악과 문학과의 결합이 낭만주의 그 자체의 특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특정된 문학적·시적 혹은 회화적인 감정의 내용을 음악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표제 음악이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다만, 표제 음악 그 자체는 이미 바로크 시대에도 번영했던 것이지만, 낭만파의 경우에는 많건 적건 베토벤(독일)의 업적을 계승하려 하는 만큼, 내용은 더욱 깊어지고 철학적·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경향이 강하다.

낭만주의 운동은 상당히 혼란한 발전상을 나타내고 개인적·지방적인 특색도 풍부해지는데, 그것이 낭만주의의 특성이기도 하므로 이 운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려워진다. 
베토벤(독일) 뒤에 계속되는 낭만파로서 슈베르트(오스트리아) 이후의 독일(오스트리아) 낭만파의 계보를 다룰 수 있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베토벤(독일)을 언제나 존경했으며, 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베토벤(독일)은 주제나 그 동기를 긴밀하게 겹쳐 가는 구축적인 음악가였지만, 슈베르트(오스트리아)에게는 이러한 소질은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하면서 깊은 심리적인 음영을 새겨 가는 음악가였다. 베토벤(독일)은 자유주의자이며 빈의 귀족들과 대등하게 접촉한, 정신적으로는 귀족의 생활을 한 보기 드문 음악가였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이에 반해 보헤미안의 소시민적인 생활로 시종하였던 타고 난 자유인이었다. 두 사람에게 공통되어 있는 점은 세속에 별로 관심이 없고, 따라서 돈과도 인연이 적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업적은 독일 리트의 예술적인 완성에 있는데, 그의 리트의 매력 중 하나로 민요적인 요소를 꼽을 수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이미 언급해 두었듯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독일 음악이 아직 음악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무렵, 독일의 음악 생활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감상과 동경을 찬양한 민요풍의 ‘리트’였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이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낭만파 예술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오페라 「마탄의 사수」(오페라)로 독일 낭만파 오페라의 기초를 다진 베버(독일)는 세대적으로 말하면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선배가 되지만, 민족주의적인 감각(그의 경우 그것은 세속적인 기지와도 통하는 것인데)에서는 슈베르트(오스트리아) 이후의 낭만파에 속하는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페라 작가로서 그의 선배가 되는 글루크(독일)는 많은 개혁을 이룩했지만 고립되어 있었고, 독일의 전통적인 노래 연극 ‘징슈필’의 형식을 다룬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민족적이라기보다는 훨씬 국제적이었다. 

멘델스존(독일), 슈만(독일)에 의해 슈베르트(오스트리아)로 시작되는 독일 낭만파는 하나의 정점을 맞이한다. 이 계통에 속하는 음악가들은 수도 많고 저마다의 작품이나 생활 방식도 달랐지만, 리트나 소기악곡 등 소품에 매력적인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음악가가 적극적으로 문필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이러한 것들은 고전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베버(독일)의 「마탄의 사수」(오페라)가 1821년에 베를린에서 상연되고 이어 독일 각지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무렵 이탈리아의 로시니(이탈리아)는 이미 「세빌랴의 이발사」(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두어, 온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다시 파리까지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왕정 복권기의 파리 사회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긴장된 분위기 뒤에 거의 반사적으로 마음 편하고 경쾌한 오락을 바라고 있었다. 프랑수아 부아엘디외(François-Adrien Boieldieu, 1775~1834)나 오베르(Daniel François Esprit Auber, 1782~1871)에 의한 ‘오페라 코미크’는 이 시류에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페라 코미크의 성공은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의 ‘그랜드 오페라’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한 것이었다. 마이어베어는 베를린 태생의 유태계 음악가로서 1826년말 이래 파리에 정착하고 있었는데, 정평 있는 로시니(이탈리아)도 마이어베어의 굉장한 명성을 시샘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가 버린다. 오페라 코미크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계보에 입각하고 있음에 대해 ‘그랜드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 즉 정가극이라고 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다만, 마이어베어의 작품은 다분히 거창한 ‘겉치레’뿐인 요소를 지닌 역사물이 많다. 그것이 7월 혁명 후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로시니(이탈리아)와 함께 마이어베어도 교묘하게 낭만파적인 요소를 소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최고 작곡가인 쇼팽(폴란드)은 파리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작곡가였지만, 파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으로부터는 고립되어 있었다. 폴란드인이라는 사실이 이 고립의 원인의 하나였을 것이며, 또한 이 사실이 그를 고립 속에 빠지게 했던 것도 확실할 것이다. 베를리오즈(프랑스)는 쇼팽(폴란드)과는 반대로 역사의 흐름과 정면에서 대결하는 음악가였다. 「환상 교향곡(교향곡)」의 초연이 바로 7월 혁명의 해였음은 우연한 부합이지만 베를리오즈(프랑스)는 확실히 혁명자였다. 이런 점에서는 리스트(헝가리)와 바그너(독일)도 마찬가지였으며, 또한 베토벤(독일)에 열중한 시기를 가졌다는 점도 이들 3명에게 공통된 점이다. 

그러나 베토벤(독일)과 그들 사이에는 생활 방식과 음악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파리와 빈의 차이, 7월 혁명 전과 그 이후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자유라든가 평등이라고 하는 근대 시민 사회의 혁명적인 요소는 베토벤(독일)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관념적인 것,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미 현실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혁명의 물결은 그들의 현실 생활을 뒤흔들고 있었고, 자유도 평등도 곧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 방식은 매우 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기업가적이기는 했어도 영웅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베토벤(독일)이 이른바 절대 음악 속에서 그 이상주의를 인류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음에 대해 그들은 표제 음악이나 혁명적인 오페라 속에서 저마다의 리얼리즘을 확인하려 했던 것도 이 차이에 의거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바그너(독일)의 리얼리즘은 마침내 그를 현실의 정치 활동에 끌어들여 망명 생활을 하게 하는데, 그 체험이 이를테면 현실적 이상주의라고 할 만한 복잡한 경향을 강화했던 점도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 ‘민족주의로의 경향’, ‘중세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는 낭만주의의 기본적 모토를 모두 종합한 그의 음악은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복합체이며, 그런 만큼 많은 추종자와 적대자를 낳으면서 최근까지의 유럽 음악사를 바그너(독일)파와 반(反)바그너(독일)파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 왔던 것이다. 

전통주의자로서 보수적인 브람스(독일)는 바그너(독일)의 최대 적대자였으며, 비평가 한슬릭(Eduard Hanslick, 1825~1904)도 브람스(독일), 슈만(독일) 등의 절대 음악적 입장을 옹호했다. 그렇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로서 브람스(독일)의 깊은 뜻은 막스 레거(Max Reger, 1873~1916) 로 계승되었을 뿐이다. 브루크너(오스트리아), 말러(오스트리아), 볼프(오스트리아), R.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 등은 모두 바그네리안이었다. 그리고 홀로 브루크너(오스트리아)만이 소박한 종교적 자연 감정에 의해 독자의 세계를 개척한 것 외에는 모두 「트리스탄과 이졸데」(오페라)의 반음계주의의 영향을 받고, 전통적인 기능 화성의 사고법, 이를테면 음악에 있어서의 수직적 사고법에서 멀어져 간다.

국민주의와 민족주의

프랑스 혁명을 발단으로 해서 유럽 각지에 퍼져 있었던 시민 혁명의 물결은 나폴레옹 군에 대한 저항과 함께 도처에서 민족 의식을 자극하면서 근대적 통일 국가로의 기틀을 다져 갔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들은 낭만주의 운동과 병행되고 있었으며, 낭만파에서 현대로의 과정에는 다채로운 민족주의가 만발한다. 7월 혁명에서 2월 혁명으로 전형적인 시민 혁명의 과정을 걸어온 프랑스는 영국을 제외하면 근대로 발전되는 최선진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통적인 프랑스 낭만파였던 베를리오즈(프랑스)의 뒤를 이은 세대의 한 사람인 생상스(프랑스)가 프랑스 국민음악의 발달을 꾀하고 국민음악 협회를 혁명의 중심지 파리에 설립한 것이 1871년이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인 해였다. 왜냐하면 이 해에 독일은 오랜 숙원이었던 국가적 통일을 달성했고, 전해에는 이탈리아가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를 경계로 하여 세계사는 이른바 제국주의의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근대 음악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프랑크(프랑스)는 바그너(독일)까지 포함한 독일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곡가였다. 그가 구사한 ‘순환 형식’은 소나타 형식의 전통적인 구성 원리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생상스(프랑스)나프랑크(프랑스)의 많은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다분히 보여 주면서도 그것을 신선한 프랑스적 감각으로 처리하였다. 프랑스의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 음악의 최종 목표는 어떻게 바그너(독일)를 타도 극복하고, 독자의 음악을 수립하느냐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목표는 이윽고 드뷔시(프랑스)의 이른바 인상주의의 음악에 의해 달성되지만, 랄로(프랑스)나 샤브리에(프랑스)는 이상주의로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이미 낭만주의 운동에서 관념적으로는 완전히 고조되어 있었고, 독일 관념론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세계주의로 변모해 갔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분열을 거듭해 온 이 후진국이 드디어 통일국가를 획득했을 때, 독일의 음악은 이미 세계를 제패하고 그 세계성을 과시하고 있었다. 음악과 관념론의 철학에 관한 한, ‘모든 것에 군림하는 독일’이었다. 

바그너(독일)와 같은 해에 태어난 베르디(이탈리아 )는 이탈리아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바그너(독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는데 조국의 국가 통일 사업과 실제로 교차해 간 그의 국민주의적인 극작법(劇作法)에는, 바그너(독일)에게서는 구할 수 없는 절실한 리얼리티가 있었다. 그리고 베르디(이탈리아 )의 뒤를 이어받은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 1858~1919),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 푸치니(이탈리아) 등 베리스모의 오페라에 일관하는 리얼리즘이야말로 음악의 선진국 이탈리아의 전통적 특질이기도 하였다. 이 특질은 이윽고 레스피기(이탈리아)의 날카로운 감각적 리얼리즘에서 가장 순수한 결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정치적인 후진국이었던 것에 비해, 17세기에 이미 시민 혁명을 맞이한 선진국인 영국이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죽음과 함께 음악의 불모 시대에 들어가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활약이 겨우 근대 음악의 편린을 나타내게 된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미 포스터(미국)의 특이한 가곡이 있었음을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 나라는 시간과 정도의 차는 있지만 19세기말까지는 근대적인 국가 형태를 갖춘, 이를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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