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미스터리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미스터리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생일] 이오리 생일기념 고져스 세레브 푸딩 만들기 키쿠치마코토
- [유아대회]뜌따이의 추억이 담긴 모바일 게임들을 알려주마 No1채널
- 다른 나라에서는 핫도그를 어떻게 먹을까? またね
- 알리 저격하는 나거한 언론 조선인의안락사
- 일본의 상황으로 보는 국민연금의 미래 ㅇㅇ
- 다이소가 과자를 싸게 팔수있는 이유.jpg ㅇㅇ
- 싱글벙글 백종원 신메뉴 근황ㄷㄷ.. ㅇㅇ
- 도쿄 시부야 1호점 맘스터치 근황.JPG 특상。
- 닌자와 음침녀 4화 .MANHWA 군게
- 대한민국 경제 라이벌 이병철과 정주영...jpg 설윤아기
- 세계에서 상주인구대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NY런던파리
- 북한 근황 ㅇㅇ
- 몇롤 안남은 C200으로 찍은 오사카 ㅇㅇ
- 하재근 문화평론가 일침 ㄷㄷ ㅇㅇ
- 싱글벙글 요즘 얼빠들이 좋아한다는 AV 배우 흰콩
과연 독도는 한국땅이었을까?
독도문제에 대해서 한국측 주장은 크게 2가지임1. 1946년 SCAPIN-677로 독도는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제외되었다.2.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독도는 한국령으로 확정되었다.우선 SCAPIN- 677은 간단히 반박됨미국 국무부가 1952년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SCAPIN-677에 근거한 한국의 주장은 부당하며그것은 독도(다케시마)에서의 일본의 주권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음또한 한국측 주장이 모순되는 증거로서1948년, 1952년에 있었던 독도 폭격사건이 있음.독도는 전후 주일미군 소속의 폭격장으로 지정되었는데,한국 어민에게 폭격훈련을 통보하지 않아어민들이 희생당했던 사건임문제는 주일미군이 일본 어민들에게는 멀쩡히 통보했다는거임.만약 한국측의 주장대로 미국이 1946년 SCAPIN- 677로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면어째서 일본 어민들에게만 독도 폭격훈련을 미리 통보하고한국 어민들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는가?애초에 왜 한국정부측에 독도가 폭격장으로 지정된 경위를 알리지 않았는가?오히려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에시마네현 어민들에게만 폭격훈련을 통보하였고불법으로 근처에서 조업을 하던 한국 어민들은 미쳐 고려하지 못하여폭격훈련을 통보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 개연성이 높음그리고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고이로써 일본의 영토는 확정되게 되었음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일로부터 5달 뒤인 1952년 9월 15일또 한국 어민이 폭격에 휘말리는 사건이 발생함다행히 이번에는 희생자는 없었지만역시나 이번에도 미군은 일본 시마네현 어민들에게만 경고를 하였고한국 어민들에게는 하지 않았음.한국측 주장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면어째서 한국 어민들에게는 폭격훈련을 통보하지 않았고시마네현 어민들에게만 경고하였는가?반대가 되는게 정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음이후 1953년 3월독도는 조업을 원하는 일본 어민들의 요청으로 인해폭격훈련 구역에서 삭제됨이 역시 한국측의 주장과는 모순됨만약 독도가 한국땅이었다면, 폭격훈련 구역 지정등에 있어서어째서 일본 어민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졌을까?일본인들이 제주도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처럼독도가 한국땅이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없음과연 독도는 원래부터 한국땅이었을까?
작성자 : 야갤러고정닉
안싱글벙글 나훈아 얼굴에 흉터가 진 이유....jpg
한국 가요계의 씹상남자 나훈아 1968년에 데뷔하여 올해 은퇴를 발표한 원로가수이지만 여전히 콘서트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알파메일이다 그러나 나훈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하다. 그의 왼쪽 뺨에는 길쭉한 흉터가 나 있다. 요즘은 계속된 치료로 인해 별로 안 보이지만 십년쯤 전 사진만 봐도 흉터가 매우 잘 보인다 사실 나훈아는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hM5aAdpKwU때는 1971년 나훈아는 신곡 "찻집의 고독"을 8집에 수록하여 발표한다. 원래 60년대에 작곡가 박정웅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 곡은 다른 가수들이 몇 번 발표했었으나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그러나 박정웅은 포기하지 않고 당시 인기 가수였던 나훈아에게 부르게 시켰는데 앨범 출시 후에도 그다지 큰 인기가 없어서 박정웅은 매우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곡이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퍼지면서 애절한 나훈아의 목소리와 감미로운 반주에 매료된 사람들이 앨범을 찾기 시작했고 앨범 제작사였던 오아시스레코드는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인기에 부랴부랴 앨범을 재생산한다. 나훈아는 신곡 찻집의 고독으로 인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나가는 공연장마다 이 노래의 반주가 나올 때면 사람들은 열광하였다. 그러던 중 1972년 6월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나훈아는 앵콜 곡으로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던 중 어떤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된다. 강한 무대 조명에 앞이 안 보였기에, 팬인 줄 알고 악수하려 손을 뻗던 순간 나훈아는 괴한이 든 깨진 사이다병에 얼굴을 직격당한다. 다음 날 신문에 헤드라인으로 대문짝만하게 나온 나훈아의 붕대를 감은 모습은 전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피습당한 나훈아는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였지만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관객들과 관계자들도 단순한 단막극 정도로 생각했었기에 나훈아는 사이다병을 든 괴한과 8분 동안 난투극을 별였다. 팬들은 울분을 터트렸고 당시 관계자는 강찬 질책을 받고 해고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신경 손상은 없었지만 뺨 살이 잘려서 덜렁거릴 정도로 크게 다쳐 72바늘이나 꿰맨 나훈아의 얼굴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나훈아는 이 사건 이후로 "찻집의 고독"을 매우 싫어했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며 공연과 방송에서 거의 금지곡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1994년 공연에서는 매우 재치 있는 방식으로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할라 카기는 할라 카는데예... 제가 생각해보면 옛날에 만약에 저 혼자 노래를 안 하고 한 두셋이서 같이 노래를 했다면은 아마 이런 일이 없었을 거고 아니면은 왜 요즘 얘기 흔히 많이 하죠. 보디가드를 갖다가 양쪽에 세워놓고 노래를 했었으면은 이런 일이 없었을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긴 하겠습니다만은 옆에 꼭 세워놔놓고... 내 또 그 생각이 나서 안 될 것 같으니깐 세워놓고 하겠습니다." 친한 친구 두 명을 보디가드로 세워놓고 노래를 불렀다
작성자 : DDII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