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플랫폼이 한 플랫폼이 되고
모든 파이프라인 위에서 코드들의 질주가 멈춘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언어의 적서가 남김없이 규정된 시대에

한 남자가 호반에 서있었다.


<C++를 마시는 새>
원작, 이영도 판타지 장편소설 <피를 마시는 새>


편집기의 화면 위로 여섯 개의 소멸자가 얼비친다.

자기(磁氣)가 잔물결을 일으킬 때마다 화면은 그 위에 비치는 모든 코드를 몽상으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여섯 소멸자의 모습은 굳건하다. 그 영상은 하드 디스크 위의 소멸자를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멸자들은 화면 속에 있다.

판사이 인터페이스.

한 때는 판사이 클래스로 불리웠다. 상고토(上古土)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시절, 판사이 클래스는 고대의 디자인 패턴으로 가득했다. 저 유명한 왕의 헤더 파일 끝에 있는 여섯 소멸자는 물론이거니와 private에 우거진 멤버 변수 사이로 머리를 드러낸 가장 작은 정적 변수조차 장려한 역사의 증거였다. 고건물들 위로 무수한 문장이 흩날리는 컴파일의 계절이 오면 판사이 계곡은 대지가 은연 중에 드러낸 고대의 기억처럼 보였다.

하늘 아래 영원을 말할 수 있는 클래스는 없겠지만 판사이와 같은 종말을 맞은 클래스 또한 드물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 0"의 재난이 닥쳐온 그 날, 가상 함수들이 노호하여 순수 가상 함수가 되고 산허리와 둔덕을 타넘는 파도가 되어 계곡으로 몰아쳐왔을 때, 도시는 영원히 인스턴스를 생성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왕의 헤더 끝에 열주처럼 서있던 여섯 소멸자 또한 그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육 형제라 불렀던 그 여섯 소멸자는 판사이의 다른 부분들과는 좀 다른 결말을 맞았다. 범람한 "= 0"은 protected에서부터 private로 쏟아져 들어왔고 계곡의 함수들과 울창한 괄호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기세가 약해진 채 왕의 헤더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계곡의 가장 낮은 부분인 public에서 서서히 차올랐다. 그래서 육 형제 소멸자는 원형(prototype)을 유지한 채 화면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것을 판사이가 얻은 마지막 행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지금 판사이 인터페이스의 서쪽 기슭에서 물 속에 잠긴 육 형제 소멸자를 바라보는 검은 깃털의 레콘 같은 경우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발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버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레콘은 깃털을 부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레콘은 황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시야에서 육 형제 소멸자가 사라지자 레콘은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검은 깃털을 모조리 부풀린 채, 레콘은 차라리 바이러스에 삭제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견은 레콘의 뒤편에 있던 동료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라리 삭제되는 편이 낫지, 버그 속에서 저게 무슨 꼴이람."
 
레콘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레콘은 \'버그\'라는 단어를 태연히 사용하는 무신경함에는 화가 치밀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의 노여움에 찬 시선을 받게 된 것은 한 인간 소녀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녀는 사과했다.
 
"어,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