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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초반 일본 게임에 대해서
필피쉬의 인터뷰 념글 보고 써봄 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에 어느정도 통하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음 항상 글로벌하게 잘나가던 닌텐도를 제외하더라도 로컬 느낌이 강하던 당시 서양 고티 어워드에서 상을 탄 바하4라던가 흥행과 비평면에서 큰 재미를 본 데메크3 철권5 파판12 라던가 이코를 만든 우에다 후미토의 완다와 거상도 이때당시에 만들어져서 필피쉬가 말하던 gdc에서 고티를 수상하기도 했었음그런데 이때당시에 일본 게임업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일단 캡콤의 스타 디렉터들이 다수 퇴사한게 컸음바하의 미카미 신지, 데메크의 카미야 히데키, 록맨의 이나후네 케이지등 인기 디렉터들이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캡콤열차에서 전부 뛰어내리고데메크4는 괜찮았지만 바하5,6 록맨 x7 등은 처참한 퀄리티로 악평을 받았었음그런데 악재는 이뿐만이 아니었음 새로운 게임기인 ps3의 엉망진창인 환경 일단 FPS의 아버지 존카멕이 엑박 360의 개발환경을 칭찬하면서 반대로 난색을 표한 개발환경이 있었고 경쟁기기인 XBOX 360보다 100달러 비싼 제품의 가격 생산량 자체도 문제가 있어서 초기에 품귀사태도 심했고 이러다 보니까 플스3으로 출시된 게임을 역으로 PS2 로 이식하거나 NDS WII 같은 전세대 게임기 성능에 머무르는 제작사가 많았음그리고 이에 비해 서양은 xbox360이나 pc로 게임을 제작하고 플레이하면서효율 좋은 고성능 게임기를 활용하게 된거임...그리고 00년대 말 일본 게임이미지를 고정 시킨 특정게임이 발매되게됨 https://youtu.be/4H1UEHX_7X8 FINAL FANTASY XIII us Trailer FINAL FANTASY XIII us Traileryoutu.be파이널 판타지 13 파판12 발매후 3년만에 발매된 해당게임은 ps3 기준 최상위 그래픽에. 인기 시리즈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최신작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펄스의 팔씨의 르씨가 코쿤에서 퍼지로 대표되는 이해 안되는 고유명사의 남발이나 마을이나 npc 같은 상호작용이 없고 일자진행형으로 진행되는 게임방식 때문에 전투 스토리 전투 스토리 같은 느낌으로 지루한 플레이를 반복하게 했다고 함..심지어 이 게임은 760만장 이상이 판매 되기도 해서 일본게임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물론 이무렵에도 닌텐도는 진짜 잘나갔고 슈퍼스트리트 파이터4나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워커 같은 괜찮은 게임이 나오긴 했지만 메인 스트림에선 많이 밀려날수밖에 없었음2010~12년도에 이런 게임이 발매 되고 있었으니까...IGN에서 12년도에 개제한 JRPG에 대한 칼럼이나 필피쉬의 답변도 저 과정에서 나왔던거고 그런데 사실 11년도쯤 부터 일본게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음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면서도 완전 생소한 방식의 게임성을 들고와서 호평만큼 팔리진 못했던 데몬즈 소울의 후속작 다크소울 11년 출시 되고 1년만에 120만장 이상 팔리면서 전작의 총 판매량 100만장을 넘겼고2012년 DLC인 심연의 아르토리우스가 나오면서 완성 되었고. 인기 시리즈화로 발돋음 할 수 있게됨 그리고 페르소나4의 완전판인 페르소나 골든이 2012년 연말에 미국/캐나다에 출시되면서 살짝 글로벌화에 발을 올리고 드뚀이 전작이 발매되려고 하고 있었음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의외로 이승만 고로시에 앞장선새끼
바로 박정희임 틀니딱딱이들이 이승만 - 박정희를 거의 뭐 신마냥 빨아재끼는거 보고 오해하는 게이들도 있겠지만 이승만 박정희는 존나 철천지원수였다 ㅇㅇ 사상적으로도 정반대수준인 아예 접점자체가 없는, 차라리 김대중이 더 가깝다고 볼수도 있는 수준이였음 예를 들어 이승만은 끝까지 화폐개혁 할때 예금동결을 "국민의 재산권 침해" 라며 거부하고, 국가주도의 5개년 경제개발 계획도 공산주의 빨갱이나 하는 짓이라며 거부했음. 박정희가 화폐개혁 할때 제일먼저 예금동결에 환급상한까지 만들어놓은 것과는 대조적임. 에초에 이승만이 나라를 세운 국부지위에서 탈락된건 좆팔륙 운동권식 민족사관보다 박정희의 역할이 훨씬 큼 당장 북보르네오 침공(이것때문에 국제원조 완전중단됨), UN탈퇴, 친공산주의,친중같은 개씹똥싸다가 실각된 독립운동가 출신 인도네시아 국부 수카르노만 해도 현재까지 독립과 건국의 공로로 인도네시아에선 국부라고 불림. 이승만도 2공당시엔 실각했으나 여전히 국부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당인 자유당 인사들이 자리를 지키고있었음. 민간에서도 6.25 빤스런, 학살자 독재자라는 이미지보다 나라를 세운 큰 어르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음.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승만은 아직도 국부자리를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 이승만의 이미지는 박정희 집권이후 모든 게 바뀌었음. 이승만을 대체할 국부로 김구를 내세우고(5.16 참여했던 김구아들 김신에게 보답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임), 이승만 동상이 있었던 곳에 백범광장을 조성함. 4.19정신을 헌법에 넣은 것도 박정희임. (당시 5.16은 4.19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 ㅇㅇ) 참고로 "런승만" 도 박정희가 만든 이미지에 가까운데, 이때 당시 이순신 성역화사업도 박정희가 한 사업 중 하나임. (헌충사 확장, 이순신 동상 건축, 이순신 관련 연극,영화 제작 등) 한국의 나폴레옹같은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다 느낀 박정희는 당시 이순신을 성역화시키면서 (당시 이순신은 권율 장군, 곽재우 장군과 같은 구국의 장군이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전 국민적인 성역이자 성웅으로서 받들어진 건 박정희의 이순신 성역화 작업 이후임), 의도적으로 자신과 이순신을 오버랩되도록 만들었는데.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선조 = 이승만 (이승만이 왕족이였다는 점도 비슷함) 당파정쟁으로 혼란한 조선 = 2공체제 당시의 혼란 이순신 = 박정희와 혁명 세력들 대충 이런 프레임을 짜놨음. 2공이 민주화이후 재조명되고, 박정희가 폄하되면서 박정희가 짜놓은 프레임은 깨졌지만 선조 = 이승만이라는 공식은 사라지지 않아서 그대로 이승만은 국부보다 학살자 런승만으로 이미지가 굳혀짐. 1. 이승만이랑 박정희랑 존나 사이 나빴다. 2. 박정희는 집권후 자유당파 숙청, 김구 재조명, 이승만 격하등 이승만 개새끼 만드는데에 존나 진심이였다. 3. 결국 이승만이 학살자 런승만이 된 데에는 박정희 지분이 존나 크다. 정치라는게 원래 존나 서로 통수때리는거다. 박그네때도 박정희파 숙청시킨 엔두가 존나 꼬와서 5.18에 존나 호의적이였고, 김대중이랑 노무현도 사이 존나 나빴다. 싱붕이들은 정치인 개새끼들이 만들어놓은 좆같은 프레임에 걸려들지 말자 ㅇㅇ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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