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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4대 정경유착 -록히드 사건
미국의 방위산업체인 록히드는 신형 제트 여객기 L-1011 트라이스타라는 최첨단 여객기를 제작한다 그러나 이미 시장에는 보잉 747이나 멕도넬 더글라스 DC-10이 있었기에 이들과의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록히드는 어떻게든 트라이스타를 팔아먹어야 했기 때문에 각국의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벌였다 일본도 록히드사의 중요한 로비대상이었는데 이미 전일본공수(ANA)의 라이벌인 일본항공(JAL)이 DC-10의 대량 발주를 결정하면서, 록히드로서는 전일본공수라도 잡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전일본공수는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여객수요의 증가와 1972년에 예정된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대비해 신형 대형 여객기의 발주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사장 오오바 테츠오를 중심으로 한 선정작업이 이뤄졌다 세 종류의 여객기가 후보에 올랐고, 트라이스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트라이스타는 롤스로이스사의 신형 엔진 탑재가 난항을 겪은 탓에 전일본공수는 비록 최첨단 여객기라고 해도 엔진의 문제가 있는 트라이스타는 제외하기로 결정했고, 최종적으로 DC-10이 낙점을 받아 1970년 미츠이 물산을 통해 총 3기를 가발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DC-10의 발주에 관여한 사장 오오바가 사기사건에 휘말렸다는 괴문서가 주주총회 앞으로 배달되었고 결국 오오바는 사직, 전 운수차관 와카사 토쿠지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와카사는 트라이스타를 차기 대형 여객기 도입 후보에 다시 올리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따라 전일본공수 내부에서 재검토가 이뤄진 끝에 DC-10의 발주가 뒤집어지고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런 느닷없는 트라이스타 발주의 배경으로 그해 9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이 꼽혔다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은 록히드사의 공장이 위치한 캘리포니아가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닉슨이 당시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트라이스타의 발주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1974년 1월, 트라이스타가 정식으로 납품되어 2월에 운항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트라이스타의 발주는 상당히 느닷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직은 스캔들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다나카는 돈을 밝히는 금권주의 체질이라는 비판을 받아 그해 12월 9일 총리 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던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록히드가 일본내의 자사기 판매를 위한 로비를 위해 여러 나라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의 경우는 마루베니 상사를 통해 200만 달러를 일본의 고위 정계인사들에게 건넸다는 것 더구나 전일본공수의 신형 여객기 발주문제 뿐만 아니라 일본 해상자위대의 초계기 도입에도 록히드의 뇌물살포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당초 일본 해상자위대는 초계기를 도입하면서 자국 기업의 기체를 도입하기로 결정되었었는데 뒤집히고 록히드의 P-3 오라이언을 도입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록히드의 부회장과 도쿄 주재 사무소 대표가 록히드의 일본내 대리인 역할을 하고있던 코다마 요시오에게 소위 컨설턴트 비용이라면서 21억엔을 건넸고, 다시 코다마와 그의 친구 오사노 겐지를 통해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5억엔이 건네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당시 관련자들은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된다 일본 정계가 뒤집힐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나카 가쿠에이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일수교를 이끌었던 거물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후 다나카 후임 총리 미키 다케오(단상 앞에 있는 사람)는 검찰과 관련기관에 수사를 지시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나카 가쿠에이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민당내 자신의 파벌들을 적극 동원하기 시작했다 소위 친다나카 성향의 의원들은 록히드 사건 수사가 정권의 표적수사라고 주장하며 미키 다케오를 끌어내릴 궁리를 시작했고 미키 타케오는 자민당내에서는 소수파였기에 위치가 꽤 불리했다 자민당내 대표적 반미키 성향을 지닌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사건수사를 서두르는 미키를 "너무 까분다"라며 비판했고 다나카와 결탁해 1976년 5월 7일 회동을 가진 끝에 미키를 총리 자리에서 해임시키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오히라계, 후쿠다계, 시이나계, 미즈타계, 후나다계 등 대부분의 계파들이 여기에 찬동했고 유일하게 나카소네계만이 미키 총리쪽에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요시나가 유스케를 수사주임으로 하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례적으로 7월 26일 다나카를 체포했다 이를 나카소네계의 법무장관 아나바 오사무의 역지휘권 발동으로 간주한 다나카계는 맹공을 퍼부었다 1976년 12월 5일 치러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록히드 사건의 여파를 받아 자민당이 8석을 잃는 등 사실상 패배해, 미키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수상직을 사임했다 뒤를 이어 미키 내림을 주도한 후쿠다파의 리더의 후쿠다 타케오가 수상에 취임했다 그런데도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니가타 3구에 출마하고, 16만 8522표를 획득해 최다득표 당선 기록을 세웠다 ㄷㄷ 재판은 1977년 1월 27일에 시작되었다 1983년 10월 12일, 다나카에게 징역 4년에 추징금 5억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다나카는 판결에 불복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겠다고 뻔뻔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중의원 의장과 참의원 의장이 중요 제출 법안을 처리해주면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중재안을 제시해 자민당과 야당들이 동의하여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다나카는 당선되었지만 자민당은 되려 역풍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해 신자유클럽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55년 체제(1955년부터 1993년까지 자민당과 사회당 의석 비율이 각각 2 : 1에 가까운 의석 비율을 유지한 체제)는 잠깐 흔들렸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오사노 겐지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소환되었을때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記憶にない!)"를 연발해서 유행어가 되었다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골때리는 일도 일어나는데 마에노라는 우익활동가 겸 포르노 배우가 (배신자) '코다마에게 천벌을 내린다'며 소형 비행기를 몰고 고다마의 집에 특공을 하게된다 정작 목표인 고다마는 다른 곳에서 자고 있었기에 무사했고, 마에노 본인만 죽고 말았다 충돌할 때 일장기 완장을 달고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는 등의 행동을 해 일본 언론은 그를 '최후의 카미카제'로 불렀다 사스가 카미카제의 나라다 ㄷㄷ 참고로 전일본공수는 트라이스타를 잘 써먹다가 1995년에 퇴역시켰다고 한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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