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시계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시계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싱글벙글 유퀴즈 레전드 출연자 ㅇㅇ
- 부글부글 억울하게 성범죄자가 될 뻔한 썰..jpg Tagilla
- 일본인의 양심, 요양보호사편 (도쿄 스미다구) 난징대파티
- 닌자와 음침녀 8화 .MANHWA 군게
- 운동을 해도 몸이 변하지 않는 이유.jpg 감돌
- 올려라))) 박경완 전화 인터뷰 중 김범석 살 언급 모음.jpg ㅇㅇ
- 김풍이 말하는 IMF 시절 병특 괴담 육갤러
- 디씨를 처음하는 아재입니다. 제 사연 또한 도움이 될까 작성해 봅니다. 판갤러
- 6.25전쟁 55일간의 전투 낙동강 전투에 대한 증언...jpg 설윤아기
- 일본, 보육교사가 남자아이 폭행하다가 체포... 짜증나서 그랬다 난징대파티
- 소설가 정지돈, 전 연인에게 사과 및 출판 중단 요청.jpg ㅇㅇ
- 영국에서 판소리 인기 위엄.jpg ㅇㅇ
- 한국과 달리 고기 냄새를 살리는게 포인트인 우즈베키스탄 음식.jpg 감돌
- 남고 네이버 뉴스 입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벽!
- '물에 빠진채로 3분을', 수영하던 50대 '의문의 죽음'.jpg ㅇㅇ
정부, 미복귀 전공의 면허정지 안할듯…jpg
- 관련게시물 : 오늘 전공의 업무 복귀 명령 해제하고, 사표 수리한다.jpg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572665 [단독]정부, 미복귀 전공의 면허정지 안할듯… 수련규정 완화도 검토정부가 병원에 복귀하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뿐 아니라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서도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을 안 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다음 주 미복귀 전공의 대책을 발표하고 “복귀하든 사직하든 이n.news.naver.com이거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려나 지긋지긋하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황재균 이혼 언급한 부분
- 황재균지연 이혼말한 해설가 햇갈린거 아니래뒤로돌려서 3회초끝나고 광고시간에 맞춰보셈캐스터 : 황재균 기사뜬거 없다이광길 : 국장님한테 들었다니까?캐스터 : 그런얘기 여기서하면 안된다이광길 : 그래 여기선 하면 안되지캐스터 : 여러분들 이거 오피셜아닙니다 썰입니다 썰이광길 : 아 이거 마이크 들으가지 깜빡했다캐스터 : 진짜 아닙니다 위원님이 그냥 썰이있다더라 그거지절대 오피셜이아닙니다 여러분들 죄송합니다 그냥 들었다 이겁니다 (줄줄이 해명)이광길 : 아! 쏘리!~~일단 사실이든 아니든 나균안이랑 헷갈린건 확실히 아님---------------------------------------------------------------그런말은 한적 없댄다 영상에 다 나오는데 왜 자꾸 나균안이랑 햇갈렸다는 헛소리 하는거냐 티아라빠냐- 오피셜) 황재균 이혼설 벌괴ㅇ- “티아라 지연-황재균 이혼한 거 알아?” 뜬금없는 중계 발언[이데일리 홍수현 기자] 그룹 티아라 출신 가수 겸 배우 지연(본명 박지연·31)과 야구선수 황재균(36·kt위즈) 이 이혼설을 부인했다. 지연 전 소속사 관계자는 26일 “지연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이혼설은 전날 부산 경남권 방송 KNN라디오가 야구 중계를 하던 중 나왔다. 당시 방송 영상을 보면 한 중계진이 “황재균 이혼한거 아느냐”라고 말한다. 다른 중계진이 놀라서 되묻자 해당 중계진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 나누자. 국장에게 들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최근 황재균의 성적이 부진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대화는 광고 중에 이뤄져 라디오로는 송출되지 않았지만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돼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중계 내용이 확산하자 온라인상에서는 지연이 최근 유튜브 채널 업로드를 잠정 중단한 점도 재조명됐다. 앞서 지연은 지난 20일 커뮤니티 게시글을 통해 “개인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유튜브 영상 업로드가 어려울 것 같다. 구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글을 올렸다. 이같은 점을 근거로 두 사람의 이혼설이 빠르게 확산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지연은 황재균과 관련한 SNS 악플에 시달린 바 있다. 황재균이 이달 초 경기 종료 직후 상대팀 선수를 부르며 불쾌감을 드러낸 뒤 양팀의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한 것과 관련, 일부 야구팬들은 황재균의 돌발 행동을 비판하며 아내인 지연에게까지 악성댓글을 달았다. 지연이 유튜브를 잠정 그만둔 건 이 때문으로 알려졌다. 지연과 황재균은 지난 2022년 12월 결혼했다. 그룹 티아라 출신 지연(31)과 프로야구 선수 황재균(36·kt위즈) 이혼설이 불거졌으나 지연측이 이를 부인했다.지연 전 소속사 관계자는 25일 “지연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이혼설은 이날 부산 경남권 방송 KNN라디오가 야구 중계를 하던 중 나왔다.당시 방송 영상을 보면 한 중계진이 “황재균 이혼한거 아느냐”라고 말한다. 다른 중계진이 놀라서 되묻자 해당 중계진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 나누자. 국장에게 들었다”라고 한다.그러면서 최근 황재균의 성적이 부진한 것이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이 같은 대화는 광고 중에 이뤄져 라디오로는 송출되지 않았지만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돼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중계 내용은 확산하자 온라인상에서는 지연이 최근 유튜브 채널 업로드를 잠정 중단한 점도 재조명됐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한국전에서 귀환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후일담
William Dewey Freeman(1928년 10월 3일 – 2022년 5월 27일)전쟁이 끝나고 알게 된 것인데, 내가 속했던 중대 인원 중 1951년 횡성 학살에서 생존한 사람은 나 포함 고작 7명이었다.내가 생존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신의 도움 외에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당시 조지아의 내 고향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를 위해 무척 기도했다고 한다.난 신이 그 기도들에 응답했다고 생각한다.귀국해서 한 어르신이 그랬다. "자네는 날 모르지만 난 자네를 잘 알아. 자네가 한국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요일 아침과 저녁, 화요일 밤에 모두 모여 자네를 위해 기도 했었거든."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freeman_william_d/index.htmDale Alfred Erickson(1931년 1월 7일 – 2022년 11월 26일)캠프 펜들톤에 도착하자 질병검사 후에 재입대를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고 난 전쟁에서 충분히 군대를 경험했다고 생각했다.더 이상 폭력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임시중대에서 기차표를 줬다. 1951년 12월 13일 미 해병대에서 제대 했고, 그때 난 스무 살이었다.기차역에는 아무도 없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축하도 없었다. 내 형제를 비롯해서 친구들은 전쟁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마치 지난해에 여름캠프를 갔다온 기분이었다. 난 내 기억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으나 아무도 관심 없었다.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신경이 예민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한밤중에 갑자기 심장 마비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한국에서 전투하는 꿈을 꾼다.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1952년 난 미네소타-듀러스 대학에 등록해서 1년을 다녔다. 대학에 다닐 때 군 경력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다른 학생들과 섞이기 힘들었다.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밝지 못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erickson_dale/index.htmDavid Morris Williams(1932년 11월 17일 생)귀국명령을 받을 즈음 난 소대 전령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철의 삼각주 근처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전선의 마지막 밤은 정말로 신경이 예민했다.내가 처음 왔을 때 있었던 병사는 이제 몇 명 되지 않았다.난 전우들에게 행운을 빌며, 1951년 9월 초 한국을 떠났다. 계급은 상병. 샌프랜시스코(Golden Gate Bridge)의 금문교를 봤을 때 난 정말 감회에 젖었다.정말 집이구나 싶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항구에 나와 나를 반겼다.어머니는 나를 보시고는 살짝 놀라셨다. 참전 기간동안 난 키가 5cm 넘게 더 자랐고 체중도 30파운드가 더 늘었다. 떠나기 전보다 조용한 사람이 되었고, 전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한국전 경험은 날 정말 고착시켰고, 참전 이전에 비해 난 좀 더 거칠어졌다.한국전을 통해서 자기확신도 생겼지만, 남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williams_dave/index.htmEldon L. "Ike" Stanley(1930년 9월 6일 – 2017년 9월 6일)한국이 날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다.PTSD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곤 했다. 꽤 오래 갔다.난 텍사스 언저리로 가서 살기 시작했다. 나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한국을 잊기 위해 일부러 그런 곳에 자리 잡았고, 근처 모든 나무를 잘라 불태워버렸다. 민간인으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난 이미 훈련된 킬러였다.한 직장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한 군데서 3-40년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인생에서 최고로 오래 일한 곳은 9년이다. 운송회사에서도 일했고 아서 머래이 스타일 (현대무용)의 스튜디오에서 무용교사도 1년 반 동안 했다. 거기서 여자를 하나 만났는데 당시 가톨릭 사회에서는 개신교와 결혼하는걸 멀리했었다.1953년 경에 반지와 모든 걸 준비해 청혼했으나 그녀는 반지를 돌려주며 거절했다. 이후 그 일을 그만 두고 6개월간 은둔했다.그 어떤 직업도 정착이 안 됐다. 오클라호마 시티의 댄스 스튜디오로 갔다. 거기서 로리타 로빈슨을 만나 결혼했고 장인을 위해 4년간 일했다.그 다음 정유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고, 이후 트럭회사에서 4년간 일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tanley_ike/index.htmHarold John Sydnam Jr.(1927년 7월 28일 – 2017년 3월 30일)민간인이 되었을 때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한 동안 배에 수류탄과 대검을 놓지 않으니 잠이 안 왔다.내 왼쪽 귀는 청력을 상실했었고, 1년이 지나고서야 부분적으로 돌아왔다.난 대학으로 돌아가 탄광 엔지니어링을 더 배우려고 했다.그러다 알래스카의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패시픽 노던 항공 알래스카 지사였다.나의 해병대 총 근무기간은 4년 10개월 3일이었다. 알래스카에서 아내를 만나 1953년 결혼했다.1959년 항공사에서 퇴사하고 알래스카에서 주립경찰이 되었다. 주방위군으로도 참여해서 1979년에 중령 계급으로 알래스카 주방위군 부 작전관이 되었다.1983년에 은퇴해 캐나다에 정착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ydnam_harold/index.htmCarl Edward Bowers(1932년 10월 13일~2008년 10월 2일)1951년 5월 일본에서 미국으로 도착한 한국전 참전병 3,759명, 테네시 출신 75명 중 내가 있었다. 시애틀에 도착했는데 세 번째 한국전 참전병 combat rotation의 시기로 분주했다.난 1952년 3월 29일 육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 육군병원이었다.제대하고 90일 후 난 다시 공군에 재입대했다. 로리다 탬파의 맥딜 공군기지로 전입을 가서 외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KC-130과 KC-135 통신병도 했다.그때 아니타 에슬린을 만나 53년 7월에 결혼했다. 공군에서 2년을 근무하고 복부의 부상 부위가 좋지 않아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었다.난 현재 한국전 전상 100% 장애인 판정인 상태다.아들 셋을 낳았고 둘째인 마이클은 이라크에 세 번이나 참전했다. 아내는 2002년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올해 2007년에 난 심장마비 두 번을 겪었고, 9월에 다시 폐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겪었던 것들은 내가 잊고 싶었고 그것이 떠오르면 어떨 때 정말 나를 괴롭힌다.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었다.전장을 정말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투가 어떤 것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wers_carl/index.htmRichard Cornelius Bohart(1928년 9월 4일 생)항구에 안기가 잔뜩 낀 아침에 도착했는데 아무런 행사도 없었고 크게 "WELCOME HOME!"이란 플랭카드가 보였다.배에서 내리니 커피와 도넛이 제공되었다. 미국 땅을 다시 밟는 기분은 정말 감격스러웠다.너무 감정이 차올라 목이 막힌다. 그 감흥은 3일간이나 계속 되었다.전화로 가족들에게 난 아무 문제없다고 알렸다.나는 샌디에고 신병 보충대에서 대기하다 1951년 12월 7일 정식으로 제대했다. 제대하기 전 한국에서 얻은 부상을 치료하고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을 했다.캔자스 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남은 학업을 끝내고 1954년 1월 졸업했다.재입대는 꿈꾸지 않았다. 난 전쟁과 죽음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국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전쟁은 길어졌지만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일상에 전쟁은 없었다.제대 후 해병대 경험은 나를 보다 모범적인 시민으로 만들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밤마다 악몽이 찾아와 한국은 결코 날 떠나지 않았다. 전투가 어제의 일처럼 막 불타오른다. 술 정말 많이 마셨다.이후 화학회사에 들어가 중남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거기서 화학회사의 거대한 시설 총괄 매니어 일까지 했고 4년 전에 은퇴했다.재혼한 아내와는 올해 결혼 36주년을 맞았고 두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 이전의 결혼에서는 아이가 없었다.한국전 이후 나 자신은 힘들었다.한국에서의 전투와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밤에 찾아오는 악몽도 싫었지만, 낮에도 어떤 냄새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숲을 걷다가 갑자기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돌아오곤 했다.그런 이유로 이번 인터뷰는 어려웠다. 어떤 질문으로 인해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났다. 잠자리에 들면 악몽으로 인해 편두통이 늘어나기도 했다.지금도 과거 전투에 대한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아내는 내가 인터뷰 도중 과거의 기억에 더 민감해졌다는 걸 알았다. 나와 연관된 해병 전우들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정말 내 기억을 되살릴 다양한 질문을 받았고 난 성심성의것 답변했다. 가장 컸던 것은 PTSD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http://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hart_richard/index.htm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