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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국제의용군 한국인의 증언..드론의 공포
우크라 국제의용군으로 참전한 한국인그는 큰 부상을 입고 한쪽 팔을 잃었다우크라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대드론 체계를 투입하고 있지만현재 러우전은 재밍이 통하지 않는 광섬유 드론이 전장을 휩쓸고 있다우크라 역시 광섬유 드론을 적극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우크라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러시아 드론들이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강물 위를 비행한 뒤 도심으로 날아들어 공격한다러시아 드론을 요격하기 위한 군함우크라의 드니프로강은 러시아 드론이 침투하는 통로가 되버렸다만약 북한이 한강을 따라서 공격드론을 보낸다면 어떻게 막아야 되나?한강은 넓이가 1키로가 넘는다. 한강다리 밑을 통과하는 군함이 몇개일까?드론폭격으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자신들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인걸 인지하고 있지만화재진압을 멈출수는 없다더블 탭 공격..포격을 가해 상대편 병사를 쓰러뜨린 뒤 구조팀이 오면 재차 공격하는 방식드론 공격으로 화재진압 하던 소방관들이 더블 탭 공격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현재 러시아는 드론양산 체제를 갖췄고 드론 집중공격으로 전술이 변하고 있다최전선은 한 목표물에 드론 10-15대를 대량투입하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진다우크라 도시에 있는 건물을 드론이 공격했다면 똑같은 곳으로 2차3차 공격이 갈수 있다우크라 입장에서는 더블 탭 공격이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집중공격..전사한 전우의 무덤에서 하루종일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남자
작성자 : 배터리형고정닉
알렉산더 알레킨 1부 - 제국의 총아
[시리즈] 체스사 시리즈 · 체스는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 중국 장기는 중국인이 발명했는가?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벤저민 프랭클린, 체스의 교훈 · 1824년, 런던 - 에든버러 클럽 서신체스 매치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 엠마누엘 라스커와 지크베르트 타라쉬, 두 독일 유대인 체스마스터의 삶 · 에드워드 라스커, 엠마누엘 라스커와 바둑 · 예술운동으로서의 하이퍼모더니즘 · 식민지인이었던 내가 대영제국의 체스 챔피언?! · 1933년, 체스 최강자와 쇼기 최강자의 만남 · 체스 선수는 기보 저작권의 꿈을 꾸는가?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체스 역사 속의 TMI들 · 체스를 주요 모티프로 삼은 유명 문학작품들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알레킨은 1892년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는 보로네시 지방의 대지주였으며, 훗날 두마(러시아 국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한 명사(名士).어머니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거대한 섬유공장을 지닌 프로호로프 가문의 여식이었다.형 알렉세이와 누나 바르바라, 그리고 막내 알레킨으로 이뤄진 5인 가족.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알레킨은 부모와 형·누나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교양 있는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에게 가정교사와 함께 다양한 예술들을 가르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체스였다.알레킨은 7살부터 체스를 배웠고, 네 살 터울의 형 알렉세이는 그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상대가 되어주었다.두 아들이 체스에 몹시 열중하게 됨에 따라, 곧 알레킨 가문에서 체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알레킨 가문은 모스크바의 여러 체스대회에 후원자로 자주 이름을 올렸고,형의 체스 친구들은 종종 알레킨 가족의 집을 방문하여 알레킨과 함께 체스를 두기도 하였다.부유한 집안답게, 때로는 유명한 체스선수를 초청하여 지도를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알레킨은 모스크바 최고의 사립학교 중 하나였던 폴리바노프 김나지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알레킨은 조용하고 냉소적인 아이였으며, 학우들은 그런 알레킨을 티샤(조용한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물론, 체스가 얽히면 전혀 조용해지지 않았지만.한번은 어느 학우가 체스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자 알레킨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하일 치고린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한다"며 불같이 화를 냈으며,수학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이트를 희생시키면... 백이 승리한다!" 하고 소리쳐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다.김나지움에서도 그렇게 체스에 미쳐살던 알레킨이었지만, 학업 성적은 (평범했던 수학을 제외하면) 굉장히 우수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알레킨은 형과 함께 모스크바 체스 서클에서 활동하며 꾸준히 체스 실력을 성장시켜 나갔고,특히 서신체스에서 두각을 드러내, 김나지움을 다니면서도 여러 서신체스 대회에서 성과를 냈다.긴 시간을 들여 포지션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서신체스의 경험은, 훗날 알레킨이 뛰어난 체스 주석가로 거듭나는 밑바탕이 되었다.19세기 말엽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러 체스대회의 개최지로 부상하고 있었다.1908년에는 위대한 러시아 체스 거장 미하일 치고린이 사망함에 따라, 그 다음 해 2월에 치고린을 기리기 위한 대규모 토너먼트가 기획되었고,러시아 황실에서도 상당한 상금과 상품을 후원하여, 이 대회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이 대회는 국제(프로) 부문과 아마추어 부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16세의 고등학생 알레킨은 모스크바 체스 클럽의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여 아마추어 부문 출전권을 따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국제 부문에서는 전성기를 맞이한 아키바 루빈슈타인과 세계 챔피언 엠마누엘 라스커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치열하게 맞붙었고,아마추어 부문에서는 우리의 주인공, 알렉산더 알레킨이 우승을 차지하였다.고등학생의 나이에 알레킨은 '마에스트로'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았으며, 부상으로는 황제가 기증한 650루블 상당의 귀중한 꽃병이 수여되었다. 1909년의 우승은 알레킨을 치고린의 뒤를 잇는 러시아 체스계의 유망주로 급부상시켰고, 고향 모스크바에서도 알레킨은 유명인사로 떠오르며 금의환향하였다.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기도 전에 원고료를 받으며 체스잡지에서 칼럼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그는 이후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이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고,1년 뒤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법학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학업을 이어나갔다.부유한 집안, 명석한 두뇌, 뛰어난 외모, 화려한 명성.제국의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나가고 있는 그에게 부족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문화적 교양 역시 뛰어났던 알레킨은 사교계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생 알레킨을 만났던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는데,그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증언된 내용은 알레킨의 병적인 긴장증세, 그리고 비정상적인 기억력이었다.사교적인 자리나 가볍게 두는 체스게임에서도 알레킨은 이상할 정도의 집중력을 항시 유지하고 있었고,또 정말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마저도 사진기억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하게 기억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지인들이 그의 기억력을 칭찬할 때마다 알레킨은 "쓸모없는 것들까지 또렷이 떠올라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그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체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꾸준히 국제 대회 경험을 쌓아올렸고, 점점 더 뛰어난 선수로 성장해나갔다.그러던 와중 1913년 11월, 알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쿠바 하바나 출신의 체스 천재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것이었다.알레킨도 나름 러시아 체스계에서 주목받는 신예였지만,카파블랑카는 그야말로 당시 전세계 체스계의 초신성과도 같은 존재였다.1909년, 20세의 나이에 그는 아메리카 최강자라고 여겨졌던 프랭크 마셜을 매치에서 8승 14무 1패로 무참히 박살냈다.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1911년 2월의 산세바스티안 토너먼트.이 토너먼트에는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유명 체스마스터들만 초대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루빈슈타인, 타라쉬, 비드마, 슐레흐터, 마록지, 님조비치 등의 엄청난 출전자 라인업이 꾸려졌다. ("라스커 빼곤 여기 다 모였다"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베른슈타인과 님조비치는 여기서 카파블랑카는 아직 증명한 것도 없는데 왜 초대를 받았냐며 주최측에 항의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카파블랑카는 이 대회에서 내로라 하는 선수들을 모두 꺾으며 우승을 차지, 곧바로 증명을 해버리고 만다.이 시점에서 이미 카파블랑카는 '신예'라는 단어를 아득히 초월해있었고, 세계무대에 데뷔하자마자 벌써부터 차기 세계 챔피언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덤으로, 하도 외모가 출중해서, 체스 경기장에 여성팬들이 몰려닥치는 여지껏 체스계가 경험한 적 없는 괴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고...쿠바 외무부는 카파블랑카의 그칠 줄 모르는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명예 외교관으로 임명하여, 쿠바의 외교행사에 적극 활용하였다.그리고 그런 카파블랑카의 첫 임무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파견이었던 것이다.카파블랑카와 알레킨은 성격상으로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쾌활하고 사람을 끄는 카파블랑카. 조용하고 날카로운 알레킨.그렇지만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던 이 두 젊은 체스선수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고,사람들은 카파블랑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 당시 알레킨이 카파블랑카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안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물론, 체스에서는 아직 승부가 되질 않았다. 두 번의 연습게임에서 알레킨은 카파블랑카에게 연이어 패배했다.그 당시 알레킨은 카파블랑카에게 일종의 존경심, 혹은 경외감을 품고 있었으며,자신이 나중에 세계챔피언에 도전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라스커가 아니라 카파블랑카일 것이라고 그때부터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그리고 1914년. 격동의 해가 찾아왔다.1914 상트페테르부르크 토너먼트. 주최측이 "세계 최고의 선수 20명을 초청한다"라는 포부를 내걸었으며, 러시아 황실까지 후원에 나선 대회답게, 출전자 라인업은 굉장히 화려하게 구성되었다.라스커, 타라쉬, 루빈슈타인, 마셜, 님조비치, 카파블랑카, 건즈버그, 블랙번 등 당대 최강자들과 원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다만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의 국제적 긴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선수들(슐레히터, 타르타코워 등)은 참가하지 못했다.사실 알레킨은 이 안에서 그리 기대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러시아 체스계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키바 루빈슈타인 쪽이었다.알레킨은 공식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러시아 마스터 토너먼트(훗날 러시아 챔피언십)를 우승하여 출전권을 따내 출전했던 것이기 때문.이 토너먼트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라스커와 카파블랑카의 첫 맞대결이었다. 향후 세계 챔피언 자리의 향방을 가늠하게 될 결정적인 승부처. 허나, 이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또다른 미래의 두 세계 챔피언의 경기가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알레킨이 시원하게 두 판 다 말아먹었지만.그리고 싱글 라운드 로빈으로 펼쳐진 예선전이 끝났을 때,결선 진출자 명단은 세간의 예상과는 크게 어긋나 있었다.1위 진출자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2위 진출자 엠마누엘 라스커.3위 진출자 지크베르트 타라쉬.4위 진출자 알렉산더 알레킨.5위 진출자 프랭크 마셜.카파블랑카가 라스커보다 높은 순위로 결선에 진출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가장 유력한 세계 챔피언 도전자로 거론되던 아키바 루빈슈타인이 예선 탈락, 그 대신 신예 알렉산더 알레킨이 본선에 진출한 것은 정말 커다란 이변이었다.이어지는 결선에서는 라스커와 타라쉬가 카파블랑카를 꺾으며, 1위 라스커, 2위 카파블랑카, 3위 알레킨, 4위 타라쉬, 5위 마셜의 순위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토너먼트는 마무리된다.라스커는 노련한 세계 챔피언이 다시 한 번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고, 카파블랑카는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그 강력함을 뽐내며 챔피언 도전자로서의 확고부동한 지위를 손에 넣었으며,알레킨은 러시아의 신예에서, 체스계 전체의 주목을 받는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로 거듭났다.1914년 여름, 기세를 이어 알레킨은 독일의 만하임 토너먼트에 참가한다.만하임 토너먼트의 개회식에서, 최근의 국제적 긴장을 의식한 듯 주최자들은 "체스가 평화를 전제로 하는 정신적 싸움"이며, "(각국에서 모인) 이 자리의 체스 마스터들은 평화의 대사"라 소리 높이며 유럽의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였다.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강력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알레킨은 두각을 드러내며 9승 1무 1패로 빠르게 선두를 차지했다.그리고 12라운드가 시작되어, 1위 알레킨과 2위 비드마 사이의 결정적인 승부를 가려야 했던 그때,모든 토너먼트가 중단되었다.주최자들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타라쉬는 전쟁이 당연히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해 토너먼트의 1년 연기를 제안했지만, 사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독일은 적국 러시아의 체스마스터들을 모두 억류하였고,이에 알레킨, 보골류보프를 비롯한 11명의 러시아 선수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아무 것도 없는 컴컴한 감옥에서, 알레킨과 보골류보프는 체스판 없이 머릿속으로 체스를 두곤 하였다.이후, 알레킨은 병역 부적격자로 판명되어 석방, 스위스로 보내졌고,스위스, 이탈리아, 런던, 스웨덴, 핀란드를 거치는 여정 끝에, 모국 러시아로 돌아왔다.알레킨은 해외와 국내에서 여러 차례 동시대국을 개최하며 모금을 하였고, 그렇게 모은 돈을 아직 억류되어 있는 러시아 체스선수들이 영치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독일에 송금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 복귀한 그는 자원입대를 선택,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그는 의무부대의 장교로 갈리시아 전선에서 복무하며 부상 입은 병사들을 구해냈고,그 과정에서 자신이 부상을 입어 두 차례 입원하기도 했다. (입원 중에는 당연히 눈가리개 체스를 두었다.)성 조지 훈장 두 개와 성 스타니슬라스 훈장을 수여받은 기록 또한 남아있다.그리고 얼마 뒤, 알레킨의 조국에 대한 열렬한 헌신은, 모조리 무용지물로 돌아갔다.러시아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인민들의 고통이 가중되자, 참다 못한 러시아 인민들은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알레킨의 집안은 혁명 중에 신분과 재산을 잃었고, 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러시아는 세계대전에 이어 곧바로 내전에 휘말렸다.혁명군(적군)과 반혁명군(백군) 사이의 내전은 러시아를 피투성이로 만들었고, 알레킨 역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갔다.군을 전역한 뒤, 각지에서 체스를 두며 생계를 이어가던 알레킨은 1919년 오데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오데사는 적군과 백군이 격렬하게 충돌한 도시였기에 정치적 광기가 휘몰아쳤고, 체카(볼셰비키 정치경찰)에 의한 적색테러가 더욱 극심하게 발생하였다.알레킨은 체카에 의해 백군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곧 사형을 언도받았다.같은 시기 오데사에 체류하고 있었던 체스선수 베른슈타인은 변호사로서 은행가들과 기업가들을 위해 일했다는 단순명쾌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할 뻔하였으니, 사실 명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러시아 체스 천재의 삶은 이때 정말로 끝날 뻔하였다.그러나 처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오데사 혁명재판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던 어느 유대인 체스선수(Yakov Vilner)가 처형 명단에서 알레킨의 이름을 발견했고,이 체스선수가 소비에트의 고위 관료에게 즉시 연락하여 알레킨을 석방해야 한다고 요청, 덕분에 알레킨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레킨은 이제 러시아 제국의 국민이 아닌,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살아가야만 했다.재산도, 신분도 모두 잃었고, 부모는 전쟁 중에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혁명 직후의 러시아에서 체스로 먹고 살 길이 있을 리도 없으니, 그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알레킨은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누나 바르바라의 권유로 한때 배우 양성기관인 국립영화학교에 재학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모스크바 중앙경찰서의 수사관으로 근무하였다(어학 및 법학 지식이 풍부했으므로).녹록지 않은 생활 와중에서도 희망적이었던 것은, 전후 폐허가 된 러시아에서도 점차 체스계가 재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알레킨은 전기가 종종 끊기며 제대로 난방조차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체스모임에 꾸준히 얼굴을 내밀었고,1920년 전러시아 체스 올림피아드(훗날 1대 소련 챔피언십으로 인정받음)에 참가하여 우승, 초대 소련 체스 챔피언이 되었다.알레킨의 형 알렉세이 또한 당시 아마추어 부문에 참가하여 3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알레킨은 모어인 러시아어 외에도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과 언어능력은 곧 경찰서 내에서도 크게 인정받아, 수사관 업무와 병행하여 코민테른의 통역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1920년 여름, 알레킨은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외국 사절단과 동행하며 통역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업무 중 스위스 사회민주당을 대표하여 찾아온 스위스인 기자 아넬리제 뤼에크(Annelise Rüegg)라는 여성과 가까워져, 1921년 3월 결혼까지 하게 된다.그러나 과연 순수한 의도의 결혼이었을까.뤼에크는 코민테른의 고위 당직자들과 친분이 있었고, 뤼에크를 통해 알레킨은 결혼한 지 5주 만에 임시 출국 허가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그렇게 1921년 5월, 알레킨은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알레킨은 얼마 되지 않는 돈, 그리고 1909년 황제에게 받은 커다란 세브르 꽃병을 들고 러시아를 떠났다.그 사이 서방에서는 알레킨이 혁명 중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그는 이제 국적도, 재산도, 명성도 없는 망명자였다.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직 체스가 남아있었다.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리기 위해 알레킨이 선택한 길은, 체스 세계의 정점으로 향하는 것.그 정점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쓰러뜨려야만 하는 상대가 있었다.옛 지인이자, 앞으로 평생의 라이벌이 될 상대─제3대 세계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바로 그였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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