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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노근본 국가들이 세계를 장악한 분야.JPG
그건 바로 음악. 전세계 음반 판매량 순위 스웨덴의 전설적인 그룹인 ABBA를 제외하면 유럽 가수는 전멸했고, 중국과 일본 가수는 당연히 전멸했다.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영국 가수들이 국제 음악시장을 호령하는 모습이고, 그 이후로도 영국과 미국이 순위권을 장악하고있다. 과거 16세기와 18세기 사이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던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수많은 음악강국들이 현대에 와선 열화되어 모두 영국에 흡수되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음악에 한정해서이지, 전체적인 문화, 즉 소프트파워는 유럽,중국,일본 모두 매우 막강하다. 그러나 전체 소프트파워 순위에서도 미국과 영국이 1~2위를 차지하고있다. 전세계 음악 스트리밍 가수 순위 음반은 20세기 기준이라면, 21세기는 당연히 스트리밍이 기준이 되어야할것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와 높은 정보기술 수준을 보유하고있는 미국과 영국은 스트리밍 시대에도 빨리 적응하였다. 1위부터 25위까지 모두 미국과 영국, 캐나다 가수들뿐이라는것이 충격적이다.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룹 순위 그렇다면 흥행수익은 어떨까. 오로지 미국,영국,아일랜드 그룹만이 순위권을 차지했다. 이정도면 시대별로 1등을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해쳐먹는 수준이다(..) 21세기 이후 여전히 영어권은 꾸준하게 범세계적 젊은 아티스트가 배출되는중이다. 미국은 최근 테일러 스위프트와 빌리 아일리시, 비욘세, 리한나, 마돈나 등을 탄생시켰고, 영국은 에드 시런, 아델, 두아리파, 해리 스타일스, 앤 마리 등을 최근 탄생시킨데다 캐나다는 저스틴 비버, 위켄드, 드레이크 등 레전드 아티스트를 최근 탄생시켰다. 음악강국들의 세계 점유율 변화 놀랍게도 현재 세계 음악시장의 국가 점유율은 역사적으로 엮으면 상당히 왜곡되었다.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과 영국은 음악적으로 전세계 비중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다시피했고, 그전까진 클래식을 주축으로 독일,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 등이 압도적인 세계 점유율을 차지하고있었다. 그것보다 더 옛날로 가면 중국 음악이 전세계 40%를 차지하고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보다시피 유럽전체와 중국,일본 가수들을 모두 합쳐도 영국 가수 하나에도 미치지못하며 미국과 영국가수가 국제무대 점유율의 85%를 차지하고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근본없는 나라들이 가장 우수해진 일종의 모순과 왜곡이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휘문고정닉
일본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JPG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상의 수상자들은 백인 일색이었다. 특히 과학 분야의 경우 편중이 더욱 심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과학의 발전이 매우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아 동쪽 끝 섬나라에서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난다. <유카와 히데키> 그는 원자핵 속의 새로운 입자인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하는 이론을 세운 업적으로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유카와는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한 일본 국내파라는 점에서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간 것은 1939년인데, 그때는 이미 중간자 이론으로 유명해진 후였다. 유학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어린 유카와는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의 과학 거장들을 보며 과학자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중에는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 초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가 1921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일본으로 향하던 배 안에서였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을 맞이하는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도쿄와 나고야, 교토, 오사카 등을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는데, 관중 속에는 중학생인 유카와 히데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게 중간자라는 힌트를 준 것은 바로 당나라 이백의 시와 장자의 응제편에 나오는 ‘혼돈사칠규’라는 우화였다. 빛과 그늘, 즉 세월은 천지라는 만물의 숙소를 스쳐가는 과객이라고 읊은 이백의 시에서 그는 시공과 소립자의 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또한 장자의 혼돈사칠규에 등장하는 남해의 임금 숙은 재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북해의 임금 홀은 재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중간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숙이나 홀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면서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유카와의 이 같은 기발한 발상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런데 3년 후인 1937년 중간자로 해석할 수 있는 입자가 실제로 관측됐다. 그리고 1947년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의 세실 파월 연구팀이 높은 고지대에서 장시간 우주 방사선 노출 실험끝에 파이온을 발견한것이다. 이후 유럽의 물리학계에서는 유카와를 보는 시선이 급격히 변화해 그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연이어 추천하기 시작했다. 노벨위원회는 결국 194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유카와 히데키를 선정했다. 유카와의 수상은 이론 분야의 업적을 잘 인정하지 않는 노벨위원회의 수상 원칙을 최초로 깬 노벨상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은퇴 후에는 여러편의 에세이를 쓰고 물리학 저널 편집하는 일을 했다. 또한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을 비롯한 이들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반(反)핵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상으로 모시던 아인슈타인과 함께한 유카와 히데키) (닐스 보어,오펜하이머와 함께) - dc official App
작성자 : 방파제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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