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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 채상병母 편지에 여야 다른 반응.. 책임 떠미는 사단장-대대장
- 관련게시물 : 채상병 어머니의 편지 전문.jpg- 관련게시물 : [JTBC] "1주기 전 진실 밝혀지길"…고 채상병 어머니, 답답함 토로채 상병의 어머니가 아들의 순직 1주기를 앞두고 보낸 절절한 편지를 두고도 정치권에서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수색을 하게 했는지 밝혀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국민의힘은 공수처를 향해 수사를 빨리 끝내달라고 했고 민주당은 "반드시 특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했습니다.채 상병의 어머니가 애끓는 편지로 요구한 건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누가 구명조끼도 없이 흙탕물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 수색을 하게 했는지 빨리 밝혀달라", 이 사건을 수사하다 항명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을 선처해달라"는 것입니다.국민의힘은 경찰과 공수처에 빠른 수사 종결을 요구했습니다.박 전 단장에 대해선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면서도 "법원 결과가 나온 뒤"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이미 '채 상병 특검법'을 재의결에서도 부결시킨 국민의힘은 특검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민주당은 여당이 언급하지 않은 '특검법'을 강조했습니다.이렇게 같은 편지를 놓고도 여야가 다른 해법을 내놓으면서, 아들을 잃은 엄마의 부탁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야당은 어제(12일) 국회 법사위를 단독으로 열고 채 상병 특검법을 상정했지만 국민의힘은 불참했습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7055Q.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보이네요. 항명이라더니 사면? 무슨 얘기인가요.박정훈 전 수사단장, 채 상병 사건 수사 과정에서 항명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죠.어제 채 상병의 어머니가 박정훈 전 단장을 선처해 달라는 편지를 공개했습니다.추경호 원내대표는 "법원의 결과가 나온 뒤 대통령 권한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건의하겠다" 고 답했는데요.대통령 권한, 사면권을 의미하죠.Q. 아직 재판 결과도 안나왔는데, 사면 가능성까지 언급을 했어요?재판 결과를 보고 조치하겠다는 건데요,당내에서는 박 전 단장의 혐의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얼마 전까지만해도 항명이라고 하더니 분위기가 달라진거죠.Q. 왜 달라진거에요?박 전 단장 어머니의 이런 호소가 반영된걸까요.여권 내부에서는 박 전 단장 어머니나 채상병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합니다.당 지도부도 국민 정서를 고려한 거겠죠.다음달이면 채상병 사망 1주기인데 그 전까지 진상규명이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49/0000277437그런가 하면 군 관계자들은 서로 자신은 채 상병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임성근 사단장은 당시 무리한 수색을 지시한 것은 대대장이었다는 탄원서를 냈는데 이번엔 대대장이 임 사단장 때문에 정신병동 입원까지 했었다고 주장하며 채 상병의 묘역을 찾았습니다.채 상병 실종 당시 현장에서 작전을 지휘했던 이모 중령이 채 상병 사망 이후 처음 대전 현충원을 찾았습니다.방명록에는 "어두운 곳에 혼자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적었습니다.이 중령은 채 상병 사건 수사결과를 재검토한 국방부가 최종적으로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2명 중 1명입니다.지난 2주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이 중령은 그동안 부대에서 집단적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이 중령의 변호인은 "채상병 순직 이후 이 중령은 해병대 사령부로부터 차별적 학대를 받았다"면서 "임성근 사단장이 부대 안에서 이 중령을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이러한 내용이 담긴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에 제출하며 긴급구제도 신청했습니다.반면 임성근 사단장은 지난 10일 경찰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사실상 이 중령을 사고 책임자로 지목했습니다."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부하들의 선처를 바란다"면서도 "이 중령의 의욕 또는 과실로 작전 지침을 오해해 부하들이 하천 본류까지 들어가 작전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무리한 수색 지시를 누가 내렸는지 밝히는 것이 이번 사건 규명의 핵심인 가운데 당사자들은 서로 화살을 겨누고 있는 모습입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7058- 흐느끼는 채상병 전 대대장 ㄹㅇ...jpg임성근이 처벌받아야 되는데 하 ㄹㅇ... - [JTBC] '尹 동기' 고석, 채상병 사건 회수 다음날 이종섭과 통화채 상병 사건 관련 소식으로 이어갑니다. 야권에서 '수사외압 의혹'에 새로운 인물이 있다는 의혹 제기에 나섰습니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고석 전 고등군사법원장입니다.채 상병 사건이 경찰로 이첩됐다 회수된 다음 날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런 의혹이 나오는 건데, 고 전 원장의 입장까지 유선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통화 기록엔 지난해 8월 3일 오후 2시 45분 '010-71'로 시작하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한 통 있습니다.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고석 전 고등군사법원장입니다.이날은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과 세 차례 통화한 다음 날이자, 해병대수사단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을 경찰로 넘겼다가 군검찰이 회수해 온 바로 다음 날입니다.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은 윤 대통령과 가까운 고 전 군사법원장이 김동혁 국방부 검찰단장에게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윤 대통령, 김 검찰단장과 모두 친한 고 전 군사법원장이 이 날 왜 이 전 장관과 통화했는지, 그 통화가 수사 외압과 관련이 있는지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이 전 장관과 고 전 군사법원장이 통화하기 직전, 이 전 장관의 보좌관이 김 검찰단장과 3차례 통화한 기록도 파악됐습니다.고 전 군사법원장은 의혹을 전면 부인했습니다."당시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어떤 관여도 한 적이 없다"면서, "육사 졸업 후 이 전 장관과 만난 건 단 한 번뿐"이라고 했습니다.또 이런 일방적인 주장은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비난했습니다.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705- 채 상병 사건 대대장 ㄹ황...jpg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4746548?rc=N&ntype=RANKING 채상병 전 대대장, 사령관 상대 인권위 진정… 지난해 수해 실종자 수색 중 순직한 채모 상병이 속했던 해병대 제1사단 7포병대대의 전 대대장 이모 중령 측은 해병대사령관 등이 자신을 차별하고 따돌렸다며 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 중령 측은 순직n.news.naver.com오늘자 대대장 모습..영관 장교들이 고생이구나수사단장이나 대대장이나
작성자 : 정치마갤용계정고정닉
흥선대원군은 과연 전통건축의 구세주인가?
요즘 글을 거의 안쓰고 있는데, 경복궁 관련해서 말들이 많길래 경복궁을 중건한 인물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말해보려 함.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별 악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들은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음. [광화문과 북악산]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로지 문화재와 건축에 국한된 부분이지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재들이 지금 남아 있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음. 다만,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복궁을 중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함. [안동 호계서원, 산청 덕천서원, 안동 묵계서원, 밀양 칠탄서원. 사진 : 문화재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서원철폐령이었음. 서원은 조선시대에 지방권력을 틀어쥐고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어 지방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있었음. 특히나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해져 가고 있던 상황에, 서원의 악행은 묵과할 수 없던 부분이었음.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훼철시킴. 정책적 측면을 떠나 문화재적 가치로만 접근하자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에서 서원은 궁궐 다음으로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고, 또한 그 수도 많았기에 당시에 1000개소가 넘던 서원을 극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없앴다는 것은 조선 건축의 한 뿌리가 사라진 것과도 같음. 훼철 이후 여러 서원들이 재건되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입지나 배치가 훌륭한 곳들이 많아 대원군에 정책에는 수긍하면서도 50년만 더 버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함. 특히나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의 우저서원, 파산서원, 사충서원 등 남아있던 47곳 중에서도 소실된 것이 많은 점은 더욱 안타까움. [경복궁 흥례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복궁임.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된 이후 몇몇 왕들이 찾기는 했으나 270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음.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초기 궁궐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뜻함. 조선 초기는 경복궁-창덕궁 양궁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태종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주로 머물렀으나 세종 등의 경우에는 경복궁을 선호하였음. 따라서 경복궁에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음. 세종조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과학적 성과들의 흔적이 1865년까지 경복궁에 남아 있었는데, 옥루, 앙부일구 등이 설치되어 있던 흠경각과 일영대, 천문관측을 하는 장소였던 간의대 등이 남아 있었음. 그러나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며 이것들은 모조리 헐리고 말았음. 이를테면 간의대 옥석의 경우에는 근정전 뜰의 품계석으로 쓰였음.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전략)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과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기록에서 경복궁 터를 다녀온 호조판서 심이지가 보루각 터를 둘러보았으며 흠경각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다고 했는데, 이는 1794년의 기록임. 이 흠경각은 광해군 때인 1613년 재건한 것인데,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효종조 잠시 언급되었다가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음. 물론 정조 때에도 이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중건 시점이 이로부터 70년 뒤이니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경복궁 경회루] 흔히 조선 초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돌기둥에 용 조각이 있었음에 주목함. 성종조에 조각된 이 돌기둥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다가, 중건 시점에는 48개 중 3개만 서 있고 나머지는 무너져 있었다고 함. 중건 시점에서 용 조각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돌기둥들이 화재로 상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계체석으로 썼다고 적혀 있음. 아마도 경회루 기단의 돌들이 검게 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돌기둥들을 깎아 재사용한 것으로 보임. 물론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조각은 분명 남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른 용도로 재사용되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음. 현재의 돌기둥들은 삼청동과 송계별업 등지에서 새로 떼어 와 제작한 것들임. 가끔 가다 용 조각은 오래되서 지워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 한편, 경복궁을 재건하던 당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단과 월대는 다시 제작되었음. 당시 기록을 보면 외형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돌을 뜯어내니 안쪽은 물이 스민 흔적이 없이 완벽했다고 함. 기단 안쪽을 채우던 돌들은 그대로 사용했다고는 하나 월대와 기단은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흔적이 아님. [경희궁 흥화문과 숭정전. 사진 : e뮤지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바로 경희궁임. 경희궁은 비록 직전 왕들인 헌종-철종조(1834-1864)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헌종 이전의 순조를 비롯하여 인조, 숙종, 영조 등 많은 임금들이 애용하던 궁궐이었음.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남아있었다면 큰 역사적 가치를 가졌을 것임.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며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이 헐리게 되었음. 따라서 경희궁은 위 사진과 같이 5개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음. 막상 헐고 나니 상한 목재가 많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함. 경희궁은 이후 망국 이전까지 이따금 군사를 사열하는 등의 장소로 쓰이다가 망국 이후 남은 건물들은 모조리 팔려나가고 그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음.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오래 서 있었음. 흥화문은 1988년이 되어서야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옛 터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래 자리는 되찾지 못했음. 참고로 박석 갖고도 시끄러운 거 같은데, 내 추정으로는 임란 이전까지는 박석이 없었을 것으로 보임. 현재 경복궁 내에서 박석이 사용된 장소는 근정전 앞마당뿐임. 그런데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과 안현(안국동고개. 현재 광화문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길)에 깔려 있던 박석들을 싸그리 철거해서 들고 왔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에서 새로 떼어 왔다고 함. 애초에 박석은 바닥에 까는 돌이니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한들 굳이 철거한 후 다시 깔 필요는 없어 보임. 중건 이후 고종은 30년도 안되는 경복궁 생활 동안 멀쩡한 침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이후 또 다시 폐허가 되었음. 군주의 위상을 세우겠다고 엄포한 고종은 또 다시 궁궐 공사를 시작했고, 여기에 더불어 평양의 풍경궁이나 안동별궁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음. 경운궁은 완공된 지 1년만에 전소되어 중층 중화전 건물을 단층으로 재건하는 촌극을 벌였고, 풍경궁은 완공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 중 점거하여 돈낭비로 그쳤음. 언젠가 고종의 토목공사 욕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음.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벌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원군을 찬양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음. 더군다나 그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봤을 때,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시발점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19세기 조선에 그대로 대입하여 흥선대원군을 평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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