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마음을 내줄만한 영화를 만날 일은 드물다. 그 점을 고려할 때 윤가은 감독은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감독의 첫 장편작이자 첫 관계 맺음에 접어든 아이들의 복합적인 감정을 담았던 에서는 '피구 편 가르기'라는 소재를 통해 무리에서 배제될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의 표정으로 시작해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단숨에 납득시켰다. 차기작 에서는 학교가 아닌 일반 가정집으로 공간을 옮겨 부모의 언성에 짓눌린 주인공 소녀 '하나'를 주인공으로 비춘다.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부모를 대신해 밥상을 차리고 애써 그 대화에 비집고 들어가지만 꺾이고 튕겨져 나오는 소녀의 눈에는 (의 주인공 '선'과는) 또 다른 결의 불안이 담겨 있다.
하나는 내내 반목한 채 화해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무정한 부모, 차라리 이혼을 하라며 나몰라라 하는 오빠를 대신해 직접 팔을 걷고 관계를 회복해 내고자 대신 집안일을 도맡기도 하고, 가족 여행을 가자고 조르며 부단히 애를 쓴다. 그렇게 분투하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던 하나는 어른들 없이 떠도는 유미 유진 자매를 발견하고, 우연히 언니를 잃은 유진을 도와주다 언니인 유미와도 친해지게 된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부모님 대신 삼촌의 간헐적인 돌봄 아래 있는 자매를 위해 하나는 제 장기인 요리를 활용해 아이들에게 좋은 언니가 되어준다. 그러던 중 자매는 갑작스레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잦은 전학과 이사에 지쳐 있던 자매는 하나의 조력에 힘입어 집 매매를 방해하기 위한 작전들을 짜고 야물진 손과 천진한 상상력을 활용해 실행에 옮긴다.
때로는 그런 얕은 수들이 통할 때도 있고, 혹여 좌절되더라도 그런 대로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함께 있다는 느낌 자체를 즐기지만, 점차 제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절감하게 된다. 하나는 갖은 노력을 통해 겨우 여행 허락도 받아냈고, 부모님의 다툼도 눈에 띄게 줄어 관계가 호전되었다고 안심했지만 사실은 자녀들 몰래 차차 이혼을 준비해가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으며 배신감을 느낀다. 한편, 방문도 걸어잠그고 집도 어지럽히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아보려 했지만 어른들이 부재한 상황에 당장 집이 매매될 위기에 처하자 애써 정붙인 집을 떠나게 될까 유진 유미는 다시금 불안해진다.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러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온 하나의 제안으로 자매는 직접 부모를 찾고자 지방으로 향한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지만 복잡한 초행길에 아이들은 우려대로 길을 잃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마저 통용되지 않자 애써 숨기고 담담한 척 했지만 제 고민만으로도 버겁고 서러운 아이들의 속내가 삐죽삐죽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당장 가정이 붕괴될까 두려운 하나는 집만 이동할 뿐 화목해 보이는 부모님이 있는 유미의 투정이 성가시고, 결국 부모와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못한 채 이사가 확정되고 만 상황에 유미는 모든 것을 회유한 하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아무리 속깊고 철든 아이들이라 해도 결국은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렇게 투닥거리고 주저 앉아 울던 아이들은 우연히 아늑한 텐트와 식료품들을 발견하고는 금새 해맑게 화해에 이르고 한데 누워 동심을 부풀려 미래에 함께 살 집에 대한 이야기들을 속닥이기도 한다.
영화가 부러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진 않지만 현실로 복귀한 후 하나의 가족은 부모의 이혼과 동시에 와해될 것이고, 자매는 결국 이사를 갈 것이다. 다만 이는 모두가 애초에 예상하던 바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목표의 성패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 결과에 당도하는 동안의 과정일 것이다.
전작 과 마찬가지로 의 주인공들 또한 소위 '애어른'이라 불릴 만한 속깊은 아이들이다. 감독은 이번에도 또래들보다 한 뼘 더 자란 듯 보이는 아이들의 등 뒤로 새겨진 그만큼의 그늘을 포착한다. 다만 어두운 면면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이란 것이 다 그렇듯, 가끔은 울적하고 때로는 행복하고, 어떤 노력을 들여도 회복하거나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는 반면 선물처럼 찾아오는 만남도 있고, 상처를 받기도 내기도 하지만 서로를 치유로 이끌기도 하고, 아픈 순간도 있지만 그 모든 걸 상쇄할 만한 찬란한 순간들도 존재한다는 진리에 입문해가는 아이들의 여정과 성장을 선명한 질감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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